베트남전 종전 30돌 기념 특별인터뷰- 베트남군 전 총사령관 보응웬잡 장군(94) 디엔비엔푸 전투에 이어 세계 최강국 미국을 물리친 바로 그 '전설의 노장' 을 만나다
▣ 하노이=구수정 전문위원 chaovietnam@hotmail.com
보응웬잡 장군을 만나러 가는 길에 후드득 몇낱 비꽃이 피었다. 봄비치고는 제법 방울이 굵다 싶더니 빗발이 금세 가랑비에서 날비로 바뀐다. 비가 좍좍 쏟아질 때 차 안에 앉아 있으면, 다만 유리창 한장으로 갈린 세상에서, 내가 비 오는 저편에 팽개쳐지지 않고 이편에 무사하게 들어앉아 있다는 사실에 더할 수 없는 안도감이 든다. 마음이 들썽거려 밤새 헛잠에 부대낀 나는 등받이 깊숙이 몸을 기대고 눈을 감았다. 장군을 만나면, 호칭을 어떻게 해야 할까… 잠시 생각하다가 얼핏 잠이 들었던가 말았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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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왜 호앙지에우 거리에 둥지를 틀었나
눈을 뜨니 차가 멈추어 있었다. 하노이 호앙지에우 거리 30번지. 베트남 거리 이름은 대부분 구국의 영웅 같은 역사적 인물들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외무부 직원이 수위실에서 간단한 절차를 밟는 사이, “호앙지에우라 호앙지에우…” 역사 속의 인물들을 더듬어가는데 순간, 아! 머릿속을 스치는 것이 있었다.
1929년, 그의 나이 18살 때, 잡은 난생처음 하노이에 발을 디뎠다. 신월혁명당의 동지였던 응웬반따오가 잡을 데리고 처음 간 곳이 하노이성의 북문이었다. 하노이성이 함락될 때 새겨진 프랑스군의 포탄 자국을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이 성을 지키기 위해 필사적으로 프랑스군에 맞서 싸웠던 호앙지에우 장군은 패전의 책임을 지고 왕묘 앞 나무에 목을 매어 자결했다. 나중에 하노이 탕롱숙사의 역사 교사가 된 잡은 아이들을 데리고 장보 둑에 올라 프랑시스 가르니에의 묘를 내려다보고, 저이 다리에서 앙리 리비에르의 묘를 응시했으며, 마지막으로 이곳 하노이성에 들렀다. 식민지 조국에서 태어나 치욕과 눈물을 먹으며 자라난 아이들에게 항불 저항정신을 심어주기 위해서였다.
그리하여 마침내 역사적인 디엔비엔푸 전투를 승리로 이끈 뒤 하노이로 돌아온 보응웬잡 장군은 순절한 장군 호앙지에우의 이름을 딴 거리에 둥지를 틀고 들어앉았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장군은 줄곧 그곳에 살고 있다. 역사는 이렇게 우연의 다리를 놓아서라도 그의 억울한 영혼을 위로하고 싶었던 걸까. 그래서 호앙지에우의 슬픈 넋은 역사의 위무에 조금이라도 안식을 얻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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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프랑스 사람들은 잡을 ‘눈 덮인 활화산’이라고 불렀는데, 안에 불같은 기질을 감추고 있는 얼음장처럼 차가운 외면 때문이었다. 그는 나이가 들면서 부드럽고 유연해진 것 같다. 소리도 없이 응접실로 들어선 ‘전설의 노장’은 놀랍게도 베트남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너무도 친숙한 ‘할머니’의 얼굴을 닮아 있었다. 그는 안에 솜을 누빈 듯 두툼한 카키색 제복을 입고 있었는데, 견장에 달려 있는 네개의 별도 95살 노장의 야윈 어깨를 충분히 감추지는 못했다. 그러나 그의 눈빛만은 여전히 그를 승리로 이끌고 그리하여 마침내 그를 전설로 만든, 지적인 힘과 치열한 마음가짐을 드러내 보이고 있었다. 지금껏 나는 그처럼 강하면서도 부드러운 눈빛을 본 적이 없다.
“장군님, 뵙게 되어 기쁘고 영광입니다.” 나는 한국식으로 허리를 깊이 숙여 인사했다. 고개를 든 나는 얼결에 또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앙상하게 뼈마디가 불거진 그의 손은 뜻밖에 통통한 여인의 그것처럼 부드러웠다. 그가 한 걸음 더 다가와서는 내 두 볼에 번갈아 입을 맞추었다. 프랑스식 인사법이다. 그러고는 엉거주춤 서 있는 내게 말했다. “꼬(Co·선생), 앉아요, 앉아.”
전쟁에서 이겼던 가장 큰 동인은 ‘인간’
“이게 아닌데….” 이곳에 오기 전 나는 호칭에 대해 고민했다. 베트남 사람들이 호찌민 주석을 ‘박 호’(Bac Ho·호 아저씨)라고 부르듯이 나도 장군을 ‘박’(Bac·할아버지뻘 되는 어른에게 쓰는 친밀한 호칭)으로 불러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엉뚱하게 ‘장군님’이라는 호칭이 튀어나온 것이다. 내가 자연스럽게 그를 ‘박’으로 불렀다면 그도 나를 ‘짜우’(Chau·손자손녀뻘 되는 사람에게 쓰는 친밀한 호칭)라고 불렀을까? ‘좀더 당당하게, 그러나 편안하게’ 나는 마음속으로 다짐하며 그의 앞자리에 허리를 곧추세우고 앉았다. “할아버지, 건강은 좀 어떠세요?” 나는 안부인사로 말문을 열었고, 장군은 “오늘은 좋아. 신문 이름을 어떻게 읽지?”라고 되물었다.
“한…겨…레.” “한….” “한…겨…레라고 읽습니다.” ‘한겨레’를 수없이 반복했지만 장군은 그 발음에 쉽게 익숙해지지 않았다. “한…기여…리에….” “네, 맞습니다.” “허허참.” “‘한겨레’는 하나의 겨레라는 뜻으로 우리 민족을 이르는 말입니다. 발음이 어려우시면 그냥 베트남어로 ‘다이 연 똑’(대민족)이라고 불러주세요.” “아니야, 아니야, 한…겨어…레에…, 한. 겨. 레. 됐어.”
장군의 검질긴 고집에 옆에 있던 비서며 보좌관이며 주치의까지도 “장군님, 하안…겨어…레에… 해보십시오”라며 진땀을 뺐지만, 나는 그것이 <한겨레>에 대한 장군의 예의 표시인 것 같아 내심 뿌듯했다. 그러나 시간이 너무 많이 흘러버렸다. 인터뷰 제한 시간은 20분, 나는 서둘러 질문을 던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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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로 베트남 종전 30주년이 되는 해인데, 이제 얼마 안 있으면 역사적인 4월30일을 맞이하게 됩니다. 감회가 남다르실 텐데….
음, 올해는 그 지난했던 항불전쟁과 항미전쟁을 거쳐 우리 베트남이 외세로부터 완전히 해방된 지 딱 30년이 되는 해지. 그날 우리 당 정치국원은 모두 총참모본부에 앉아 있었어. 그게 오전 11시쯤이었을 거야. 라디오 방송에서 드디어 우리 베트남기가 대통령궁에 게양됐다고 전한 것이. 우리에겐, 적어도 내겐 혁명 일생에서 가장 행복한 순간이었어. 곧바로 호 아저씨에게 보고하러 갔지(아마도 호찌민의 묘를 찾았을 것이다).
아시아의 작은 국가인 베트남이 세계 최강국인 미국과 맞서 싸워서 이길 수 있었던 가장 큰 동인은 무엇입니까?
아시아의 작은 나라, 낙후된 농업국가였던 베트남은 공업이라고 할 만한 것도 현대식 군대도 없는 상태에서 세계에서 가장 강한 침략군들과 맞서 싸워야 했어. 프랑스와 싸울 때는 프랑스가, 미국과 싸울 때는 미국이 가장 강한 나라였지. 호찌민 주석은 언제나 ‘자신의 힘’으로 싸울 때만 제국주의를 이길 수 있다고 강조하셨어. 자신의 힘. 우리는 인민의 군대로 인민의 전쟁을 한 거야. 미국의 그 어떤 현대적 무기도, 아무리 정교한 전자장비도, 다른 모든 것들도 결국 아무 소용이 없었지. 전쟁에는 두 가지 요인이 있는데, 그것은 인간과 무기야. 그렇지만 인간이 더욱 결정적인 요인이지. 인간… 인간.
미국은 후유증을 치유할 책임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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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20세기 베트남의 승리가 21세기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디엔비엔푸 전투의 승리는 역사상 처음으로 한 작은 식민지 국가가 제국주의 본국을 무찌른 사건이야. 이 승리는 그 뒤 유럽 제국주의의 지배에서 벗어나려는 약소국들, 특히 라틴아메리카, 아프리카 식민지 국가들의 해방의 물결을 이끌었지. 미국과의 전쟁도 마찬가지야. 이것은 베트남 인민의 영광스러운 승리이자 민족의 독립과 자주와 통일을 갈망하는 전세계 인민의 승리였어. 나는 우리나라의 역사만큼이나 긴 항전의 역사를 통해 자유와 독립보다 더 소중한 것은 없다는 것을 배웠어. 그것은 21세기에도 유효하지. 오늘날의 강대국들도 독립과 자유를 바라는 약소국의 열망을 절대 얕봐선 안 돼.
전쟁이 끝난 지 30년이 지났지만, 그것이 남긴 상처는 여전히 깊습니다. 전쟁의 책임 문제, 특히 미국의 배상 문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제네바협정 제21조에는 이렇게 쓰여 있어. “미국은 전쟁이 끝난 뒤에 베트남이 그 후유증을 극복할 수 있도록 도울 책임이 있다.” 이제는 미국과 베트남의 관계가 완전히 정상화돼서 비록 법리적 책임은 묻지 않는다 하더라도, 인도적 차원에서 전쟁이 남긴 이 끔찍한 후유증에 대해 반드시 배상해야 할 책임이 미국에는 있는 거지. 최근 베트남 고엽제 피해자들이 미국의 고엽제 제조회사들을 상대로 소송을 벌였어. 나도 파리 상원에서 열린, 미국의 고엽제 배상을 촉구하는 국제회의에 편지를 보냈지. 그렇게 따질 것은 따지면서 한편으론 미국과의 친선관계도 지속적으로 발전시켜가야 하는 거지.
그러나 안타깝게도 21세기에도 여전히 전쟁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이라크 전쟁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내가 오랫동안, 지금까지도 변함없이 굳게 지켜온 생각이 있어. 어떤 나라든지, 아무리 부강한 나라라도, 그 어떤 첨단무기를 가진 나라라 하더라도, 다른 나라에 대해 자신의 의도를 무력으로 관철하려는 시도는, 다른 나라의 주권과 독립을 침탈하는 행위는, 인간의 생존권과 행복추구권을 침해하려는 음모는 반드시 실패하고 말 거야. 이것이 역사의 교훈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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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은 다시 이라크를 침공했고, 한국 정부도 또다시 이라크에 군대를 파견했습니다. 할아버지, 저는 솔직히 역사는 반복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을 지울 수 없습니다.
짜우어이(얘야)! 역사는 결코 반복되지 않아. 역사는 쉼없이 흐르는 거대한 물줄기 같은 거야. 그러나 인간의 잘못은 반복될 수 있지. 우리가 노력하지 않는다면 말이야. 하지만 종국에는 역사의 단죄를 받게 될 거야. 그것이 역사의 묵연한 법칙이지. 그런데 이제 새 세기가 왔는데도, 이제 2000년대에 들어섰는데도….
호찌민이 준 금언 “혁명은 이공위상”
원래 약속한 인터뷰 시간을 훨씬 넘겼다. 손목시계를 흘금대며 계속 눈총을 주던 보좌관이 내 뒤로 다가와 귀엣말로 일렀다. “시간이 많이 지났습니다. 장군님이 힘들어하십니다.” 그의 목소리는 낮고 정중했지만, 말마디를 도막도막 힘주어 뱉는 말투가 내 등을 떠밀어대는 것 같았다. 장군은 상대방의 눈을 똑바로 응시하면서 말을 하는데, 내 시선은 줄곧 그 지극한 눈빛에 묶여 있었다. 나는 처음으로 노장의 얼굴을 찬찬히 살폈다. 그의 매끄럽고 하얀 피부는 훤칠한 이마에 돋아난 검버섯을 더욱 도드라져 보이게 했고, 축 처진 눈시울은 흥분으로 붉게 젖어 있었다. 그리고 귤껍질처럼 바싹 마른 입술엔 검은 딱지가 앉아 있었다. 나는 그를 내 마음속에 들여앉히기라도 할 것처럼 반히 들여다보다 ‘이쯤에서 접자’고 마음먹었다. “할아버지, 저는 더 말씀을 나누고 싶은데 피곤하실까 걱정됩니다.” 갑자기 그가 우레 같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직 아니야. 나 하나도 안 피곤해.” 나는 자세를 바로 하고 바투 다가앉았다. “<한겨레>는 한국 언론으로서는 유일하게 베트남전 당시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 문제를….” 내가 다시 질문을 이어나가는데, 장군이 속삭이듯 그러나 분명한 어조로 말했다. “박이(내가) 안다, 박이 알아. 1999년이었잖아.”
네, 그렇습니다. <한겨레21>은 베트남 피해자들의 고통을 함께 나누고자 캠페인을 벌였고, 특히 저희 독자들은 기꺼이 성금운동에 동참해주었습니다. 이 자리를 빌려 독자들에게 한 말씀 해주십시오.
융깜(Dung cam·용감)… 융깜… 융깜! <한겨레>가 과거 한국군의 흔적을, 그 상처의 현장을 스스로 찾아나선 것은 정말 용감한 행동이야. 한국의 여론도 “부끄러운 과거를 씻자”는 <한겨레>의 호소에 응답했다고 들었어. 이 말을 꼭 전해줘. <한겨레>가 그렇게 역사를 존중하는 자세로, 인도주의 정신으로, 용감한 행동으로 앞으로도 계속해서 두 민족이 서로 이해할 수 있도록 가교 역할을 해주었으면 좋겠어. 두 민족의 우애를 위해서, 두 나라의 관계 발전을 위해서, 난 더 이상 긴말은 하지 않겠어. 자네가 <한겨레> 독자들에게 내가 개인적으로 보내는 인사를 꼭 전해주었으면 해.
고맙습니다. 평소 늘 가슴에 새기는 금언 같은 것이 있으신지요?
금언이라… 많지. 그러나 오늘은 내가 얘기를 하나 들려주는 것으로 대신하지. 내게는 더없는 행복이 하나 있어. 그것은 호 아저씨와 아주 오랜 시간을 함께할 수 있었다는 거야. 그 중에 내가 평생 잊지 못할 추억은, 팍보 동굴의 아주 혹독하게 추웠던 어느 겨울밤이야. 나는 호 아저씨 곁에 놓인 나무 평상에 누워 있었어. 날은 춥고, 평상은 딱딱하고, 누워 있으면 등이 무척 아팠지. 화로 옆에는 동지들이 둘러앉아 무장투쟁에 대해 얘기를 나누고 있었어. 갑자기 호 아저씨가 하던 말을 멈추고 나를 불렀어. “반(Van)아- 반은 그때 내가 쓰던 암호명이었어- 혁명은 이공위상(以公爲上)이다.” 혁명을 하려면 나보다 우리를 섬겨야 한다는 뜻이지. 당을 알고, 인민을 먼저 위하고, 개인의 이익을 생각하지 말라는 거야. 나는 이 말을 평생 가슴에 새기고 살아왔어. 나는 단지 인민과 평화를 위해 싸워온 군인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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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장의 볼을 타고 흐르는 눈물
시간이 한 시간 가까이 흘러 있었다. 나는 장군에게 마지막으로 <한겨레> 독자에게 보내는 짧은 친서를 부탁했다. 보좌관은 이제 나는 상대하기도 싫다는 듯 장군에게 직접 보고했다. “다음 방문객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장군의 대답은 짤막했다. “종이를 다오.” 나는 황급히 하얀 A4 용지를 장군 앞에 펼쳐놓았는데, 미리 준비한 사인펜이 보이지 않았다. 핸드백을 샅샅이 뒤져보았는데도 없었다. 장군이 허허 웃더니 보좌관에게 펜을 가져오라고 했다. 보좌관이 마뜩찮은 표정으로 장군에게 볼펜을 디밀었다. “아니, 좋은 붓으로, 좋은 붓….”
한자한자 정성스럽게 써내려가던 장군이 갑자기 “어이구, 이를 어쩌나…” 했다. 글자의 한획이 살짝 비뚤어져 있었다. 눈여겨보지 않으면 알기 어려울 정도였다. 게다가 한글도 아니고 알파벳 아닌가. 나는 “할아버지, 괜찮습니다. 제가 잘 읽을 수 있습니다” 했고, 옆에 서 있던 비서며 보좌관이며 맞은편에서 달려온 주치의까지 “장군님, 훌륭하십니다”라고 한마디씩 거들었다. 간신히 서명까지 마친 장군이 “얘야, 이리 오련” 하고 나를 불렀다. “읽어 보련.” 나는 장군의 옆에 앉아서 초등학생처럼 또박또박 읽어내려갔다. 함께 눈으로 따라 읽던 장군이 아까 글씨가 삐뚤어진 그 대목에서 손을 내저었다. “안 되겠다. 다시 종이를 갖다줘.” 펜을 움켜쥔 장군의 손등에 푸른 힘줄이 돋고, 종이에 닿는 붓끝이 파르르 떨렸다. 우리는 숨을 죽였다.
“짜우라고 써도 되지? ‘꼬’는 너무 격식을 차리는 것 같잖아.” 장군이 자신이 쓴 책에 서명을 하면서 물었다. <디엔비엔푸>와 <호찌민 사상과 베트남 혁명의 길> 두권이다. “이건 내가 직접 쓴 책이야.” - 최근에는 장군의 회고록을 대필해 쓰는 작가들이 많다- 노장의 얼굴에 어린아이 같은 자랑이 어렸다. “54년에 디엔비엔푸 전투에서 승리를 했지. 그해에 얻은 맏아들 이름을 디엔비엔이라고 지었지.” 장군은 또 벽에 걸린 액자를 가리켰다. 반바지 차림에 슬리퍼를 신은 호 아저씨와 찍은 사진이다. “사람들은 저 사진을 보면 그러지. ‘어이구, 우리 호 아저씨.’ 46년에 찍은 사진이야. 우리 호 아저씨 차림을 좀 봐. 그때 호 아저씨가 우리 베트남민주공화국의 주석이셨다고. 난 그날 무슨 공식행사가 있어서 양복을 빌려입었지. 엉성하지?”
하고많은 사진 중에 장군은 왜 하필 이 사진을 골라 벽에 걸었을까. 장군은 날마다 저 사진을 들여다보면서 호찌민의 ‘이공위상’을 마음속에 되새기는지도 모른다.
그때, 이날의 만남을 촬영하던 팜꾸옥빈 감독이 장군에게 또 다른 사진 액자를 증정했다. 병상에 누워 있는 호찌민 주석의 마지막 순간을 젊은 잡 장군이 안타까이 지키고 있었다. 액자를 받아든 장군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나는 노장의 볼을 타고 소리 없이 흐르는 한 줄기 눈물을 보았다. “얘야, 할아버지 빰에 뽀뽀해주련.” 나는 장군의 앙상한 어깨를 끌어안고 그 볼에 오래도록 입을 맞추었다.
인민들의 '계획출산사업'도 맡아
호찌민의 마지막 유언이었던 ‘하나됨’은 베트남 사람들의 가슴에 비명처럼 새겨졌다. 보응웬잡을 비롯해 레주언, 쯔엉찐, 레둑토, 팜반동, 응웬반린 등 11명의 정치국원들은 항쟁을 이끌었다. 그리고 베트남 인민들은 호찌민의 마지막 희망대로 흔들림 없이 단결해 마침내 자신의 힘으로 제국주의의 쇠사슬을 끊었다.
1973년 1월23일, 파리에서 미국은 평화협정에 서명했고, 베트남에서 철군을 단행했다. 이 공로로 키신저와 레둑토는 노벨평화상 공동 수상자로 지명되지만, “베트남에는 아직 진정한 평화가 오지 않았다”는 이유로 레둑토는 수상을 거부했다. 이렇게 해서 동양인 최초의 노벨평화상은 주인을 잃었지만, “위선자 키신저처럼 비굴해지지 않겠다”는 베트남의 자존심을 레둑토는 전세계에 통렬하게 보여주었다.
베트남에 레둑토가 말했던 진정한 평화가 찾아오자 보응웬잡 장군은 자신의 소임을 다했다며 은퇴를 희망했다. 1977년 잡은 국방장관직을 사퇴했다. 1982년에는 중앙당 정치국원의 자리도 내놓았다. 1983년 잡은 계획출산을 위한 국가위원회 위원장직을 맡았다. 그해 고향을 찾은 잡은 모처럼 쩨오 시장에 들러 주민들에게 물었다. “예전에 여기 쩨오 시장은 새우젓에 찍어먹는 쌀국수가 무척 유명했는데, 지금도 그렇게 맛이 있나요?” 평생을 장군으로 인민들의 안위를 위해 싸우다가 이제는 인민들의 가족계획까지 책임지는 ‘밤의 파수꾼’이 된 노장을 보며 주민들은 울음을 터뜨렸다고 한다.
그러나 잡은 내게 말했다. “나는 내가 스스로 선택한 길을 걸었고, 그래서 어떤 시련이 닥쳐와도 견딜 수 있었어. 그것으로 내 인생은 충분히 행복했고, 또 오래 살았지. 나는 호 아저씨의 ‘이공위상’을 따랐어. 나는 임무를 맡았고, 그 임무를 완수했지. 계획출산 사업, 그것도 내가 맡은 임무 중 하나였을 뿐이야.” 20세기에 혁명을 꿈꾸었고, 그 이상을 부둥켜안은 채 누구보다 치열하게 20세기를 통과해 마침내 그 꿈을 완성한 노장의 얼굴에 평생의 스승인 호 아저씨를 닮은 미소가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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