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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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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라크 침공은 역사의 단죄 받을 것”

등록 2005-04-27 15:00 수정 2020-05-02 19:24

베트남전 종전 30돌 기념 특별인터뷰- 베트남군 전 총사령관 보응웬잡 장군(94) 디엔비엔푸 전투에 이어 세계 최강국 미국을 물리친 바로 그 '전설의 노장' 을 만나다

▣ 하노이=구수정 전문위원 chaovietnam@hotmail.com

보응웬잡 장군을 만나러 가는 길에 후드득 몇낱 비꽃이 피었다. 봄비치고는 제법 방울이 굵다 싶더니 빗발이 금세 가랑비에서 날비로 바뀐다. 비가 좍좍 쏟아질 때 차 안에 앉아 있으면, 다만 유리창 한장으로 갈린 세상에서, 내가 비 오는 저편에 팽개쳐지지 않고 이편에 무사하게 들어앉아 있다는 사실에 더할 수 없는 안도감이 든다. 마음이 들썽거려 밤새 헛잠에 부대낀 나는 등받이 깊숙이 몸을 기대고 눈을 감았다. 장군을 만나면, 호칭을 어떻게 해야 할까… 잠시 생각하다가 얼핏 잠이 들었던가 말았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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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왜 호앙지에우 거리에 둥지를 틀었나

눈을 뜨니 차가 멈추어 있었다. 하노이 호앙지에우 거리 30번지. 베트남 거리 이름은 대부분 구국의 영웅 같은 역사적 인물들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외무부 직원이 수위실에서 간단한 절차를 밟는 사이, “호앙지에우라 호앙지에우…” 역사 속의 인물들을 더듬어가는데 순간, 아! 머릿속을 스치는 것이 있었다.

1929년, 그의 나이 18살 때, 잡은 난생처음 하노이에 발을 디뎠다. 신월혁명당의 동지였던 응웬반따오가 잡을 데리고 처음 간 곳이 하노이성의 북문이었다. 하노이성이 함락될 때 새겨진 프랑스군의 포탄 자국을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이 성을 지키기 위해 필사적으로 프랑스군에 맞서 싸웠던 호앙지에우 장군은 패전의 책임을 지고 왕묘 앞 나무에 목을 매어 자결했다. 나중에 하노이 탕롱숙사의 역사 교사가 된 잡은 아이들을 데리고 장보 둑에 올라 프랑시스 가르니에의 묘를 내려다보고, 저이 다리에서 앙리 리비에르의 묘를 응시했으며, 마지막으로 이곳 하노이성에 들렀다. 식민지 조국에서 태어나 치욕과 눈물을 먹으며 자라난 아이들에게 항불 저항정신을 심어주기 위해서였다.

그리하여 마침내 역사적인 디엔비엔푸 전투를 승리로 이끈 뒤 하노이로 돌아온 보응웬잡 장군은 순절한 장군 호앙지에우의 이름을 딴 거리에 둥지를 틀고 들어앉았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장군은 줄곧 그곳에 살고 있다. 역사는 이렇게 우연의 다리를 놓아서라도 그의 억울한 영혼을 위로하고 싶었던 걸까. 그래서 호앙지에우의 슬픈 넋은 역사의 위무에 조금이라도 안식을 얻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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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프랑스 사람들은 잡을 ‘눈 덮인 활화산’이라고 불렀는데, 안에 불같은 기질을 감추고 있는 얼음장처럼 차가운 외면 때문이었다. 그는 나이가 들면서 부드럽고 유연해진 것 같다. 소리도 없이 응접실로 들어선 ‘전설의 노장’은 놀랍게도 베트남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너무도 친숙한 ‘할머니’의 얼굴을 닮아 있었다. 그는 안에 솜을 누빈 듯 두툼한 카키색 제복을 입고 있었는데, 견장에 달려 있는 네개의 별도 95살 노장의 야윈 어깨를 충분히 감추지는 못했다. 그러나 그의 눈빛만은 여전히 그를 승리로 이끌고 그리하여 마침내 그를 전설로 만든, 지적인 힘과 치열한 마음가짐을 드러내 보이고 있었다. 지금껏 나는 그처럼 강하면서도 부드러운 눈빛을 본 적이 없다.

“장군님, 뵙게 되어 기쁘고 영광입니다.” 나는 한국식으로 허리를 깊이 숙여 인사했다. 고개를 든 나는 얼결에 또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앙상하게 뼈마디가 불거진 그의 손은 뜻밖에 통통한 여인의 그것처럼 부드러웠다. 그가 한 걸음 더 다가와서는 내 두 볼에 번갈아 입을 맞추었다. 프랑스식 인사법이다. 그러고는 엉거주춤 서 있는 내게 말했다. “꼬(Co·선생), 앉아요, 앉아.”

전쟁에서 이겼던 가장 큰 동인은 ‘인간’

“이게 아닌데….” 이곳에 오기 전 나는 호칭에 대해 고민했다. 베트남 사람들이 호찌민 주석을 ‘박 호’(Bac Ho·호 아저씨)라고 부르듯이 나도 장군을 ‘박’(Bac·할아버지뻘 되는 어른에게 쓰는 친밀한 호칭)으로 불러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엉뚱하게 ‘장군님’이라는 호칭이 튀어나온 것이다. 내가 자연스럽게 그를 ‘박’으로 불렀다면 그도 나를 ‘짜우’(Chau·손자손녀뻘 되는 사람에게 쓰는 친밀한 호칭)라고 불렀을까? ‘좀더 당당하게, 그러나 편안하게’ 나는 마음속으로 다짐하며 그의 앞자리에 허리를 곧추세우고 앉았다. “할아버지, 건강은 좀 어떠세요?” 나는 안부인사로 말문을 열었고, 장군은 “오늘은 좋아. 신문 이름을 어떻게 읽지?”라고 되물었다.

“한…겨…레.” “한….” “한…겨…레라고 읽습니다.” ‘한겨레’를 수없이 반복했지만 장군은 그 발음에 쉽게 익숙해지지 않았다. “한…기여…리에….” “네, 맞습니다.” “허허참.” “‘한겨레’는 하나의 겨레라는 뜻으로 우리 민족을 이르는 말입니다. 발음이 어려우시면 그냥 베트남어로 ‘다이 연 똑’(대민족)이라고 불러주세요.” “아니야, 아니야, 한…겨어…레에…, 한. 겨. 레. 됐어.”

장군의 검질긴 고집에 옆에 있던 비서며 보좌관이며 주치의까지도 “장군님, 하안…겨어…레에… 해보십시오”라며 진땀을 뺐지만, 나는 그것이 <한겨레>에 대한 장군의 예의 표시인 것 같아 내심 뿌듯했다. 그러나 시간이 너무 많이 흘러버렸다. 인터뷰 제한 시간은 20분, 나는 서둘러 질문을 던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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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로 베트남 종전 30주년이 되는 해인데, 이제 얼마 안 있으면 역사적인 4월30일을 맞이하게 됩니다. 감회가 남다르실 텐데….

음, 올해는 그 지난했던 항불전쟁과 항미전쟁을 거쳐 우리 베트남이 외세로부터 완전히 해방된 지 딱 30년이 되는 해지. 그날 우리 당 정치국원은 모두 총참모본부에 앉아 있었어. 그게 오전 11시쯤이었을 거야. 라디오 방송에서 드디어 우리 베트남기가 대통령궁에 게양됐다고 전한 것이. 우리에겐, 적어도 내겐 혁명 일생에서 가장 행복한 순간이었어. 곧바로 호 아저씨에게 보고하러 갔지(아마도 호찌민의 묘를 찾았을 것이다).

아시아의 작은 국가인 베트남이 세계 최강국인 미국과 맞서 싸워서 이길 수 있었던 가장 큰 동인은 무엇입니까?

아시아의 작은 나라, 낙후된 농업국가였던 베트남은 공업이라고 할 만한 것도 현대식 군대도 없는 상태에서 세계에서 가장 강한 침략군들과 맞서 싸워야 했어. 프랑스와 싸울 때는 프랑스가, 미국과 싸울 때는 미국이 가장 강한 나라였지. 호찌민 주석은 언제나 ‘자신의 힘’으로 싸울 때만 제국주의를 이길 수 있다고 강조하셨어. 자신의 힘. 우리는 인민의 군대로 인민의 전쟁을 한 거야. 미국의 그 어떤 현대적 무기도, 아무리 정교한 전자장비도, 다른 모든 것들도 결국 아무 소용이 없었지. 전쟁에는 두 가지 요인이 있는데, 그것은 인간과 무기야. 그렇지만 인간이 더욱 결정적인 요인이지. 인간… 인간.

미국은 후유증을 치유할 책임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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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20세기 베트남의 승리가 21세기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디엔비엔푸 전투의 승리는 역사상 처음으로 한 작은 식민지 국가가 제국주의 본국을 무찌른 사건이야. 이 승리는 그 뒤 유럽 제국주의의 지배에서 벗어나려는 약소국들, 특히 라틴아메리카, 아프리카 식민지 국가들의 해방의 물결을 이끌었지. 미국과의 전쟁도 마찬가지야. 이것은 베트남 인민의 영광스러운 승리이자 민족의 독립과 자주와 통일을 갈망하는 전세계 인민의 승리였어. 나는 우리나라의 역사만큼이나 긴 항전의 역사를 통해 자유와 독립보다 더 소중한 것은 없다는 것을 배웠어. 그것은 21세기에도 유효하지. 오늘날의 강대국들도 독립과 자유를 바라는 약소국의 열망을 절대 얕봐선 안 돼.

전쟁이 끝난 지 30년이 지났지만, 그것이 남긴 상처는 여전히 깊습니다. 전쟁의 책임 문제, 특히 미국의 배상 문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제네바협정 제21조에는 이렇게 쓰여 있어. “미국은 전쟁이 끝난 뒤에 베트남이 그 후유증을 극복할 수 있도록 도울 책임이 있다.” 이제는 미국과 베트남의 관계가 완전히 정상화돼서 비록 법리적 책임은 묻지 않는다 하더라도, 인도적 차원에서 전쟁이 남긴 이 끔찍한 후유증에 대해 반드시 배상해야 할 책임이 미국에는 있는 거지. 최근 베트남 고엽제 피해자들이 미국의 고엽제 제조회사들을 상대로 소송을 벌였어. 나도 파리 상원에서 열린, 미국의 고엽제 배상을 촉구하는 국제회의에 편지를 보냈지. 그렇게 따질 것은 따지면서 한편으론 미국과의 친선관계도 지속적으로 발전시켜가야 하는 거지.

그러나 안타깝게도 21세기에도 여전히 전쟁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이라크 전쟁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내가 오랫동안, 지금까지도 변함없이 굳게 지켜온 생각이 있어. 어떤 나라든지, 아무리 부강한 나라라도, 그 어떤 첨단무기를 가진 나라라 하더라도, 다른 나라에 대해 자신의 의도를 무력으로 관철하려는 시도는, 다른 나라의 주권과 독립을 침탈하는 행위는, 인간의 생존권과 행복추구권을 침해하려는 음모는 반드시 실패하고 말 거야. 이것이 역사의 교훈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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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은 다시 이라크를 침공했고, 한국 정부도 또다시 이라크에 군대를 파견했습니다. 할아버지, 저는 솔직히 역사는 반복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을 지울 수 없습니다.

짜우어이(얘야)! 역사는 결코 반복되지 않아. 역사는 쉼없이 흐르는 거대한 물줄기 같은 거야. 그러나 인간의 잘못은 반복될 수 있지. 우리가 노력하지 않는다면 말이야. 하지만 종국에는 역사의 단죄를 받게 될 거야. 그것이 역사의 묵연한 법칙이지. 그런데 이제 새 세기가 왔는데도, 이제 2000년대에 들어섰는데도….

호찌민이 준 금언 “혁명은 이공위상”

원래 약속한 인터뷰 시간을 훨씬 넘겼다. 손목시계를 흘금대며 계속 눈총을 주던 보좌관이 내 뒤로 다가와 귀엣말로 일렀다. “시간이 많이 지났습니다. 장군님이 힘들어하십니다.” 그의 목소리는 낮고 정중했지만, 말마디를 도막도막 힘주어 뱉는 말투가 내 등을 떠밀어대는 것 같았다. 장군은 상대방의 눈을 똑바로 응시하면서 말을 하는데, 내 시선은 줄곧 그 지극한 눈빛에 묶여 있었다. 나는 처음으로 노장의 얼굴을 찬찬히 살폈다. 그의 매끄럽고 하얀 피부는 훤칠한 이마에 돋아난 검버섯을 더욱 도드라져 보이게 했고, 축 처진 눈시울은 흥분으로 붉게 젖어 있었다. 그리고 귤껍질처럼 바싹 마른 입술엔 검은 딱지가 앉아 있었다. 나는 그를 내 마음속에 들여앉히기라도 할 것처럼 반히 들여다보다 ‘이쯤에서 접자’고 마음먹었다. “할아버지, 저는 더 말씀을 나누고 싶은데 피곤하실까 걱정됩니다.” 갑자기 그가 우레 같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직 아니야. 나 하나도 안 피곤해.” 나는 자세를 바로 하고 바투 다가앉았다. “<한겨레>는 한국 언론으로서는 유일하게 베트남전 당시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 문제를….” 내가 다시 질문을 이어나가는데, 장군이 속삭이듯 그러나 분명한 어조로 말했다. “박이(내가) 안다, 박이 알아. 1999년이었잖아.”

네, 그렇습니다. <한겨레21>은 베트남 피해자들의 고통을 함께 나누고자 캠페인을 벌였고, 특히 저희 독자들은 기꺼이 성금운동에 동참해주었습니다. 이 자리를 빌려 독자들에게 한 말씀 해주십시오.

융깜(Dung cam·용감)… 융깜… 융깜! <한겨레>가 과거 한국군의 흔적을, 그 상처의 현장을 스스로 찾아나선 것은 정말 용감한 행동이야. 한국의 여론도 “부끄러운 과거를 씻자”는 <한겨레>의 호소에 응답했다고 들었어. 이 말을 꼭 전해줘. <한겨레>가 그렇게 역사를 존중하는 자세로, 인도주의 정신으로, 용감한 행동으로 앞으로도 계속해서 두 민족이 서로 이해할 수 있도록 가교 역할을 해주었으면 좋겠어. 두 민족의 우애를 위해서, 두 나라의 관계 발전을 위해서, 난 더 이상 긴말은 하지 않겠어. 자네가 <한겨레> 독자들에게 내가 개인적으로 보내는 인사를 꼭 전해주었으면 해.

고맙습니다. 평소 늘 가슴에 새기는 금언 같은 것이 있으신지요?

금언이라… 많지. 그러나 오늘은 내가 얘기를 하나 들려주는 것으로 대신하지. 내게는 더없는 행복이 하나 있어. 그것은 호 아저씨와 아주 오랜 시간을 함께할 수 있었다는 거야. 그 중에 내가 평생 잊지 못할 추억은, 팍보 동굴의 아주 혹독하게 추웠던 어느 겨울밤이야. 나는 호 아저씨 곁에 놓인 나무 평상에 누워 있었어. 날은 춥고, 평상은 딱딱하고, 누워 있으면 등이 무척 아팠지. 화로 옆에는 동지들이 둘러앉아 무장투쟁에 대해 얘기를 나누고 있었어. 갑자기 호 아저씨가 하던 말을 멈추고 나를 불렀어. “반(Van)아- 반은 그때 내가 쓰던 암호명이었어- 혁명은 이공위상(以公爲上)이다.” 혁명을 하려면 나보다 우리를 섬겨야 한다는 뜻이지. 당을 알고, 인민을 먼저 위하고, 개인의 이익을 생각하지 말라는 거야. 나는 이 말을 평생 가슴에 새기고 살아왔어. 나는 단지 인민과 평화를 위해 싸워온 군인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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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장의 볼을 타고 흐르는 눈물

시간이 한 시간 가까이 흘러 있었다. 나는 장군에게 마지막으로 <한겨레> 독자에게 보내는 짧은 친서를 부탁했다. 보좌관은 이제 나는 상대하기도 싫다는 듯 장군에게 직접 보고했다. “다음 방문객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장군의 대답은 짤막했다. “종이를 다오.” 나는 황급히 하얀 A4 용지를 장군 앞에 펼쳐놓았는데, 미리 준비한 사인펜이 보이지 않았다. 핸드백을 샅샅이 뒤져보았는데도 없었다. 장군이 허허 웃더니 보좌관에게 펜을 가져오라고 했다. 보좌관이 마뜩찮은 표정으로 장군에게 볼펜을 디밀었다. “아니, 좋은 붓으로, 좋은 붓….”

한자한자 정성스럽게 써내려가던 장군이 갑자기 “어이구, 이를 어쩌나…” 했다. 글자의 한획이 살짝 비뚤어져 있었다. 눈여겨보지 않으면 알기 어려울 정도였다. 게다가 한글도 아니고 알파벳 아닌가. 나는 “할아버지, 괜찮습니다. 제가 잘 읽을 수 있습니다” 했고, 옆에 서 있던 비서며 보좌관이며 맞은편에서 달려온 주치의까지 “장군님, 훌륭하십니다”라고 한마디씩 거들었다. 간신히 서명까지 마친 장군이 “얘야, 이리 오련” 하고 나를 불렀다. “읽어 보련.” 나는 장군의 옆에 앉아서 초등학생처럼 또박또박 읽어내려갔다. 함께 눈으로 따라 읽던 장군이 아까 글씨가 삐뚤어진 그 대목에서 손을 내저었다. “안 되겠다. 다시 종이를 갖다줘.” 펜을 움켜쥔 장군의 손등에 푸른 힘줄이 돋고, 종이에 닿는 붓끝이 파르르 떨렸다. 우리는 숨을 죽였다.

“짜우라고 써도 되지? ‘꼬’는 너무 격식을 차리는 것 같잖아.” 장군이 자신이 쓴 책에 서명을 하면서 물었다. <디엔비엔푸>와 <호찌민 사상과 베트남 혁명의 길> 두권이다. “이건 내가 직접 쓴 책이야.” - 최근에는 장군의 회고록을 대필해 쓰는 작가들이 많다- 노장의 얼굴에 어린아이 같은 자랑이 어렸다. “54년에 디엔비엔푸 전투에서 승리를 했지. 그해에 얻은 맏아들 이름을 디엔비엔이라고 지었지.” 장군은 또 벽에 걸린 액자를 가리켰다. 반바지 차림에 슬리퍼를 신은 호 아저씨와 찍은 사진이다. “사람들은 저 사진을 보면 그러지. ‘어이구, 우리 호 아저씨.’ 46년에 찍은 사진이야. 우리 호 아저씨 차림을 좀 봐. 그때 호 아저씨가 우리 베트남민주공화국의 주석이셨다고. 난 그날 무슨 공식행사가 있어서 양복을 빌려입었지. 엉성하지?”

하고많은 사진 중에 장군은 왜 하필 이 사진을 골라 벽에 걸었을까. 장군은 날마다 저 사진을 들여다보면서 호찌민의 ‘이공위상’을 마음속에 되새기는지도 모른다.

그때, 이날의 만남을 촬영하던 팜꾸옥빈 감독이 장군에게 또 다른 사진 액자를 증정했다. 병상에 누워 있는 호찌민 주석의 마지막 순간을 젊은 잡 장군이 안타까이 지키고 있었다. 액자를 받아든 장군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나는 노장의 볼을 타고 소리 없이 흐르는 한 줄기 눈물을 보았다. “얘야, 할아버지 빰에 뽀뽀해주련.” 나는 장군의 앙상한 어깨를 끌어안고 그 볼에 오래도록 입을 맞추었다.

인민들의 '계획출산사업'도 맡아

호찌민의 마지막 유언이었던 ‘하나됨’은 베트남 사람들의 가슴에 비명처럼 새겨졌다. 보응웬잡을 비롯해 레주언, 쯔엉찐, 레둑토, 팜반동, 응웬반린 등 11명의 정치국원들은 항쟁을 이끌었다. 그리고 베트남 인민들은 호찌민의 마지막 희망대로 흔들림 없이 단결해 마침내 자신의 힘으로 제국주의의 쇠사슬을 끊었다.

1973년 1월23일, 파리에서 미국은 평화협정에 서명했고, 베트남에서 철군을 단행했다. 이 공로로 키신저와 레둑토는 노벨평화상 공동 수상자로 지명되지만, “베트남에는 아직 진정한 평화가 오지 않았다”는 이유로 레둑토는 수상을 거부했다. 이렇게 해서 동양인 최초의 노벨평화상은 주인을 잃었지만, “위선자 키신저처럼 비굴해지지 않겠다”는 베트남의 자존심을 레둑토는 전세계에 통렬하게 보여주었다.

베트남에 레둑토가 말했던 진정한 평화가 찾아오자 보응웬잡 장군은 자신의 소임을 다했다며 은퇴를 희망했다. 1977년 잡은 국방장관직을 사퇴했다. 1982년에는 중앙당 정치국원의 자리도 내놓았다. 1983년 잡은 계획출산을 위한 국가위원회 위원장직을 맡았다. 그해 고향을 찾은 잡은 모처럼 쩨오 시장에 들러 주민들에게 물었다. “예전에 여기 쩨오 시장은 새우젓에 찍어먹는 쌀국수가 무척 유명했는데, 지금도 그렇게 맛이 있나요?” 평생을 장군으로 인민들의 안위를 위해 싸우다가 이제는 인민들의 가족계획까지 책임지는 ‘밤의 파수꾼’이 된 노장을 보며 주민들은 울음을 터뜨렸다고 한다.

그러나 잡은 내게 말했다. “나는 내가 스스로 선택한 길을 걸었고, 그래서 어떤 시련이 닥쳐와도 견딜 수 있었어. 그것으로 내 인생은 충분히 행복했고, 또 오래 살았지. 나는 호 아저씨의 ‘이공위상’을 따랐어. 나는 임무를 맡았고, 그 임무를 완수했지. 계획출산 사업, 그것도 내가 맡은 임무 중 하나였을 뿐이야.” 20세기에 혁명을 꿈꾸었고, 그 이상을 부둥켜안은 채 누구보다 치열하게 20세기를 통과해 마침내 그 꿈을 완성한 노장의 얼굴에 평생의 스승인 호 아저씨를 닮은 미소가 떠올랐다.



군사훈련 독학… 호찌민보다 격정적

신화처럼 싸우고 기적처럼 승리한 베트남 인민군대의 상징, 보응웬잡의 일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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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응웬잡은 1911년 8월25일 꽝빈성 안싸 마을의 한 가난한 유학자의 집에서 태어났다. 그는 점령당했으나 굴복하지 않는 조국에 태어나 반란의 분위기 속에서 성장했다. 잡의 가족사는 불우했다. 잡은 일곱 동기 중 다섯째 아들로 태어났는데, 맏형은 콜레라에 걸려 죽었고, 맏누이는 홍수로 잃었다. 프랑스군에게 잡혔다가 풀려나 항전구로 들어간 셋째 누나는 어디서 어떻게 죽었는지 확인할 길도 없다. 넷째 누이까지 중병을 앓다 죽자 잡의 아버지는 다시는 약을 짓지 않았다.
1925년 후에의 국학중등학교에 입학한 잡은 판보이쩌우 사면운동, 판쭈찐 장례투쟁, 동맹휴교 등 학생운동에 적극 가담하다 1927년 퇴학당했고, 이후 정치활동으로 투옥되기도 했다. 그의 가족에 대한 프랑스 정부의 박해도 극심했다. 잡의 아버지 보꾸앙응히엠은 프랑스군에 붙잡혀 후에 감옥에 갇힌 뒤 생사가 불명하다. 다만 프랑스 병사들이 그를 지프 뒤에 매달고 다니는 것을 보았다는 사람이 있다. 인도차이나 공산주의 운동사에서 가장 빛나는 여성으로 일컫는 잡의 처형 응웬티민카이도 31살의 나이로 총살형을 당했다. 그의 남편이며 잡의 동서인 레홍퐁 역시 풀로콘도르 감옥의 악명 높은 감방인 ‘호랑이 우리’에서 죽었다. 그리고 잡의 젊은 부인 응웬티꾸앙타이도 감옥에서 최후를 맞았다. 그래서인지 잡은 젊은 시절 격정적이고 호찌민보다 훨씬 호전적인 인물이었다고 한다.
잡은 자신을 ‘독학한 장군’이라고 부른다. 역사 교사였던 잡은 군사 경험이 전혀 없었지만 호찌민은 그에게 군대를 맡겼다. “한번은 수류탄이 손에 들어왔는데, 그걸 어떻게 터뜨리는지 알 수가 없었어. 제식훈련을 어떻게 하는지도 몰랐지. 우리는 프랑스 군대를 흉내내면서 배웠어. 나는 먼저 ‘욍(un·하나), 되(deux·둘), 욍, 되’ 이런 숫자를 베트남어로 번역했지. 못(mot), 하이(hai), 못, 하이…(하나, 둘, 하나, 둘).” 1940년 잡은 군사훈련을 받기 위해 중국 옌안의 중국공산당 군사학교로 가는 도중 호의 전보를 받았다. 프랑스가 독일에 점령당했고, 인도차이나에 새로운 변화가 일어났으니 바로 돌아오라는 내용이었다. 이후 잡은 정규 군사훈련을 받지 못했다.
1944년 12월22일, 잡은 34명의 게릴라 대원을 모아 까오방에서 베트남 해방군 무장선전대를 창설한다. 이것이 현 베트남 인민군의 기초가 되었고, 1975년 베트남이 통일됐을 때는 100만 대군으로 성장한다. 잡은 45년 베트남 민주공화국이 성립된 뒤 내무장관이 되었다가 46년에는 국방장관에 취임했고, 47년 베트남 인민군 총사령관이 되었다. 그리고 48년 호찌민에게서 대장 칭호를 받았다. 외국의 한 기자가 전문적인 군사교육을 전혀 받지 않은 잡에게 왜 대장 칭호를 주었느냐고 묻자, 호찌민은 이렇게 대답했다. “우리 베트남 인민군대는 소장과 싸워 이기면 소장을 주고, 중장과 싸워 이기면 중장을 주고, 대장과 싸워 이기면 대장을 준다.”
보응웬잡은 호찌민의 가장 뛰어난 제자였고, 호가 가장 아끼고 신임하는 장군이었다. 둘은 항불·항미 전쟁 전 기간을 통해 하나였다. 잡의 병사들 역시 한마음으로 움직였던 순결한 전사들이었다. 밥 한 공기만으로 험난한 산악지대를 하룻밤에 50km씩 주파하는 베트콩 전사들, 6개월을 꼬박 걸어야 통과할 수 있었던 호찌민 루트, 포신을 허리에 묶고 한번에 1인치씩, 하루에 반 마일씩 석달을 끌고 갔던 정글 속의 대포…. 그들은 신화처럼 싸우고 기적처럼 승리했다. 잡은 이처럼 혁명 대오에 우뚝 섰던 수백만 전사들의 신임을 받았으며, 모든 인민의 사랑을 받았다. 그리고 그는 지금 베트남 인민군대의 ‘맏형’으로 추앙받고 있다.




베트남의 파벨, 선뚱

어린 시절부터 호찌민과 교유한 그의 오그라든 손에서 문학이 피어나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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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보응웬잡 장군을 만날 수 있도록 적극 주선해준 사람은 ‘베트남의 파벨’로 불리는 국민작가 선뚱(77)이다. <강철은 어떻게 단련되었는가>의 주인공 파벨처럼 그 역시 소년 시절 혁명가의 삶을 시작해 전장에서 부상을 당했고, 평생을 가난과 병고에 시달리면서도 개인의 안락에 철저히 무관심한 채 늘 푸른 한 그루 소나무처럼 살아왔다.
선뚱은 1928년 호찌민의 고향인 응에안성에서 태어났다. 소년기부터 응에안성의 청년단에서 활동했던 선뚱은 호찌민의 누나와 형의 집을 자기 집처럼 드나들며 호찌민의 가족사와 유년 시절에 대해 직접 듣고 자료도 수집했다. 50년대 말부터 60년대 초까지 선뚱은 베트남인민대학의 교원으로 일하면서 당과 정부의 지도자들과 친분을 쌓았다. 1964년에는 <선봉>지에서 호찌민 주석 수행 전담기자로 활약했다.
67년 선뚱은 홀연히 자기 집을 조국에 헌납하고 종군기자가 되어 남부로 이어진 쯔엉선 산맥에 올랐다. “북의 사람은 끝났다. 이제 남의 사람이 되어 해방의 그날까지 싸우겠다고 생각했어. 분단된 조국의 산허리를 산바람처럼 넘나들고 싶었지.” 그래서 암호명도 선퐁(Son Phong·山風)이었다.
남부 B2 전선에서 <청년해방신문>을 창간하고 책임자로 일하던 선뚱은 1971년 미군이 쏜 M79 로켓포탄이 사무실에 떨어지는 바람에 온몸에 파편이 박히는 중상을 입었다. 들것에 실려 호찌민 루트를 타고 다시 하노이로 돌아오는 데는 꼬박 1년이 걸렸다. 도착 직후 치료를 위해 3년 예정으로 중국에 보내진 선뚱은 석달 만에 하노이로 돌아왔다. “조국이 불타고 있는데 나 혼자 병상에 누워 있을 수는 없었어.” 그로부터 또 다른 사투가 시작됐다. 매일 오전 세시면 일어나 참선과 기공 수련, 냉수 목욕을 한 뒤 오그라든 손에 억지로 펜을 끼워 글쓰기 연습을 했다. 그렇게 하기를 10년. 바스러진 어깨에 오그라붙은 오른팔이 아래로 내려지고, 힘줄이 끊어져 고부라진 열 손가락 가운데 세개가 펴졌다. 거의 잃었던 시력도 서서히 회복됐다.
이제 막 해방된 조국은 생의 극점에서 살아온 전사들을 품 안에 다 거두지 못했다. 그들이 맞닥뜨린 현실은 가혹했고, 전쟁 말고는 기억할 것이 없는 그들의 영혼은 피폐했다. 70년대 중반, 선뚱은 전후의 혼란 속에서 절망하고,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방황하던 예술가들을 위해 허름한 자기 집에 돗자리를 펼쳤다. 그로부터 30년간 ‘돗자리 문학회’는 베트남 문화의 산실이었다. 베트남 국가를 작사·작곡한 고(故) 반까오, 호찌민 연구로 유명한 대학자 다오판, 극동고고학연구소의 대언어학자 응웬쫑펀 등 수많은 명사들이 이 문학회를 거쳐갔다.
“다른 사람보다 내가 더 잘 쓸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오만이지. 내 몫 이상을 쓰는 것도 탐욕이고….” 그들은 고민과 경험을 서로 나누고, 사회의 여러 문제들을 토론하면서 창작열을 불태웠다. 창작물을 돌려보면서 서로 고쳐주기도 했다. 그렇게 해서 당대의 문학으로 가치를 인정받는 작품들이 줄을 이었다. 작가 씨에우하이의 역사적인 삼부작 <탕롱의 오후 그림자> <경성의 햇빛> <또릭 강의 달빛 조각>, 민지앙의 <후에의 두 눈>, 환갑이 넘어 처녀작을 선보인 씨이지앙의 <연>이 대표적인 경우다. 역사소설의 대가인 선뚱은 베트남 전기문학의 새 지평을 연 작가로 평가받고 있다.
여섯평 남짓한 선뚱의 집은 돗자리 문학회원들이 둘러앉는 거실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가족들은 다락방에서 지낸다. 게다가 한평이 채 안 되는 선뚱의 작업실은 삼면의 벽을 책이 가득 꽂힌 책장이 차지하고 있어 셋이서 앉으려면 일렬 횡대로 앉아야 한다. 그나마 이 작은 집도 정부가 그의 부인에게 배당한 것이다.
좁고 누추한 그의 집에는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그의 얘기에 귀를 기울이러 오는 것이다. 외국인이라도 호찌민 연구자거나 베트남 근현대사 전공자라면 한번쯤은 선뚱을 찾는다. 내가 보응웬잡 장군의 일대기를 듣기 위해 선뚱의 집을 찾은 날, 그의 와이셔츠 목덜미 부분에는 거무죽죽한 피가 말라붙어 있었다. 그의 부인이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에구, 내가 몸은 닦아주었는데 옷 갈아입히는 걸 잊었네.” 선뚱의 몸에는 아직도 14개의 파편이 남아 있는데, 그 중 두개골 깊이 박혀 있는 세개가 날씨가 변덕을 부리거나 무리를 한 날이면 그의 몸에 경련을 일으키고 아홉개의 구멍에서 피를 솟게 하는 것이다.
선뚱이 세 손가락으로 써온 책들은 어쩌면 그의 상처가 뿜어낸 ‘각혈’의 흔적일지 모른다. 그러나 오늘도 그는 기록을 통해 호찌민 시대를 살았던 아름다운 사람들을 망각의 늪에서 건져올리는 작업에 몰두한다. 그에게는 그것이 ‘먼지가 수북이 앉은 마르크스·레닌의 책에, 그리고 호 아저씨에게 다시 혼을 불어넣는’ 일이기 때문이다.




호찌민은 왜 미라가 되었는가

화장해달라는 유언 무시… 죽어서도 베트남 경제를 먹여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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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찌민의 생애 마지막 시간들이 극비리에 촬영됐다. 이 필름은 1969년 8월29일부터 9월3일까지 6일간의 기록으로, 임종 직전 병상에 누워 있는 호찌민의 모습, 사망 직후의 모습 그리고 옛 소련 전문가들에 의해 그의 유해가 방부 처리되는 과정까지를 담고 있다. 그 뒤 필름은 봉인되어 20년간 철저한 보안과 통제 속에 ‘안전하게’ 보관됐다. 이 필름은 호찌민 탄생 100주년이 되던 해인 1989년 5월19일 세상에 처음 공개됐다. “호 아저씨 본인도 몰랐지. 촬영은 호 아저씨가 잠들어 있을 때 문 밖에서 몰래 찍는 식으로 이루어졌어. 호 아저씨가 숨을 거둔 뒤에야 촬영팀이 병실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지.” 이 필름의 기획, 제작, 보관 그리고 뒤에는 각본, 편집, 연출까지 모든 과정을 책임졌던 팜꾸옥빈(78) 감독의 말이다.
8월20일 이후 호찌민의 병세는 조금 호전되는 것 같았다. 9월2일에 있을 독립기념식에 반드시 참석하겠다는 호 주석의 집념이 가져온 결과였다. 그날 저녁 호찌민은 하루 한 숟가락씩 먹던 밥을 한 숟가락 더 달라고 해서 먹었다고 한다.
죽음을 눈앞에 두고도 호찌민은 단 10분 아니 5분만이라도 인민들을 직접 만나게 해달라고 졸랐다. “내가 목에 수건을 두르고 나갈게. 주석단 의자에 내가 먼저 앉아 있고, 무대의 막이 오르면 그때 행사가 시작되는 거야. 내가 아프다는 사실을 인민들이 전혀 눈치채지 못하도록 내가 잘 말할게.” 그러나 당일 기념식장 단상에 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사는 것도 힘이지만 죽음으로 가는 것도 힘이다. 오로지 민족의 해방과 통일을 위해 평생을 바쳤던 호 아저씨는 조국의 완전한 독립에 대한 사무치는 그리움으로 마지막 하룻밤을 애써 견뎠던 걸까. 1969년 9월2일 오전 9시47분, 자신이 베트남의 독립을 선언하고 베트남민주공화국의 수립을 선포했던 바로 그날, 정확히 24년 뒤의 그 아침을 기어이 보고서야 그의 심장은 멈추었다.
호찌민은 유언을 자주 고쳤지만, 어느 것에나 화장을 해달라는 조항은 꼭 들어 있었다. 어머니 묘소 옆에 묻어달라고 유언했던 레닌이나 화장해서 조국 산하에 뿌려달라고 했던 마오쩌둥, 그리고 유해를 북부와 남부, 중부에 고루 나누어 뿌려달라고 했던 호찌민. 이들의 유해는 모두 자신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미라로 만들어져 유리관에 안치된 채 일반인들에게 공개되고 있다. 베트남 당 지도부는 “내가 죽은 다음 거창한 장례식으로 인민의 돈과 시간을 낭비하지 말라”는 호찌민의 유지를 명백히 무시했다. 게다가 이에 대한 공개적인 비판을 피하기 위해 호찌민의 유언장에서 사후 처리에 관한 부분을 삭제했으며, 독립기념일 행사 차질을 우려해 호찌민이 실제보다 하루 뒤인 9월3일에 서거했다고 발표했다.
“당시 조국은 분단되어 싸우고 있었지. 호 아저씨는 언제나 우리 항쟁의 구심점이었어. 호 주석은 죽기 전에 남부에 한번 가는 것이 소원이었고, 남부의 인민들도 생전에 호 주석을 한번 보는 것이 평생 소원이었어. 그때는 호 아저씨의 유해를 기념관에 보존하는 것이 인민의 이익을 위한 조치라고 믿었지.” 영화 <호 아저씨의 마지막 순간>을 만든 빈 감독의 해명이다. 언젠가 방송 일로 호찌민 영묘 앞에서 한 베트남 청년을 인터뷰한 적이 있다. “이렇게 호 아저씨를 보기 위해 길게 줄 서 있는 외국인들을 보면 어떤 생각이 듭니까?” 그는 당황한 듯 부동자세로 서서 더듬더듬 답했다. “아 예. 우리의 위, 위대하신 호, 호찌민 주석께서는 죽어서도 우, 우리 조국을 먹, 먹여살리고 계십니다.”
이제 호찌민이 죽은 지 36년이 흘렀고, 베트남전쟁이 끝난 지도 만 서른해가 된다. 평생을 ‘조국과 혁명’을 위해 헌신했고, 죽어서도 ‘인민’을 위해 그만큼 ‘봉사’했으면 이제 그만 그의 육신도 놓아주고, 그의 영혼도 쉬게 해주어야 하는 게 아닐까? 오늘날 호찌민의 유업을 계승했다는 그의 후계자들에게서 호가 마지막으로 당부했던 혁명의 순결성이나 인민의 충실한 공복의 모습을 찾아보기는 쉽지 않다. 도이머이 개혁 이후 베트남의 경제가 급격히 성장해온 것은 사실이지만 “인민에게 승리의 열매를 나누어주라”고 했던 호찌민의 유언에서는 오히려 점점 더 멀어지고 있는 듯하다.
바딘 광장에서 호찌민 영묘를 정면으로 바라보면 붉은 바탕에 흰 글씨로 쓰인 문구가 한눈에 들어온다. “우리의 위대한 호찌민 주석은 우리의 사업 속에 영원히 살아 있다.” 이제는 베트남의 당과 정부 지도자들이 호찌민의 그늘에서 걸어나와 스스로 쌓아올린 공적으로 당당히 인민들의 평가를 받아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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