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평화주의자’라는 단 한마디로 군대를 안 갈 수 있는 노르웨이, 그곳에도 불평불만이 있었으니…
▣ 오슬로=글·사진 고경태 기자 k21@hani.co.kr
“나는 평화주의자가 아니다.”
아슬락 시라 뮈레(Aslak Sira Myhre·31)는 군대를 거부했다. 그럼 대체복무제를 선택하면 될 텐데, 역시 거부했다. 평화주의자도 아니라는 이유였다. 이건 처음에 노르웨이 사회에서도 생소하게 받아들여졌다. “나는 국방의 필요성을 인정한다. 그러나 노르웨이 군대는 1999년 나토의 유고 침략에 동참했다. 이런 공격적인 군대에는 동의할 수 없다.”
아슬락은 왜 몽땅 거부했는가
그는 징집명령을 따르지 않았고, 2001년 노르웨이군 헌병에 체포됐다. 6개월여를 끈 재판의 결과는 ‘무죄’였다. 군대와 대체복무를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노르웨이 사회에서 ‘완전거부자’는 보통 1년간의 옥살이를 한다. 군검찰은 그를 ‘완전거부자’처럼 기소했지만, 군대를 근본적으로 부정하는 것이 아니었기에 재판부는 유죄를 선고하지 않았다. 풀려나온 그는 현재 청소년 독서권장 캠페인 회사의 대표로 활동하고 있다. 아직도 징집대상 연령에 속하지만 계속 버티는 중이다.
노르웨이 사회에서 대체복무를 할 수 있는 근거는 단 한 가지뿐이다. 대체복무 신청서에 ‘평화주의자’라고 표시만 한다면, 별도의 인터뷰나 검증절차 없이 대체복무 시설에서 근무할 수 있다. 정치적 신념이나 종교적 배경은 묻지 않는다.
그럼에도 아슬락이 자신은 평화주의자가 아니라며 대체복무까지 거부한 이유는 무엇일까. 이는 그가 노르웨이 사회에서 널리 얼굴이 알려졌다는 점과 무관하지 않다. 그는 97년부터 2003년까지 선거 때마다 만들어지는 급진적 좌파정당들의 연합체인 ‘적색연합’의 대표를 지냈다. 자신의 사회적 영향력을 의식했기에, 더더욱 양심에 반하는 거짓말을 할 수 없었다고 한다. 물론 튀는 행동을 통해 이를 의도적으로 화젯거리로 부각시킨 쇼맨십의 측면도 있긴 하다. 그의 이야기는 결국 노르웨이 군대가 미국이나 나토의 침략적 역할에 동참하지만 않는다면, 군대에 갈 수도 있다는 선언이었다. 그의 결단은 노르웨이 사회에서 하나의 획을 그은 사건으로 평가받고 있다.
지난 10월 초 오슬로를 찾아 대체복무제 관련 기관을 방문하고 여러 사람들을 만났다. 병역거부와 대체복무를 일찌감치 받아들인 사회민주주의 국가 노르웨이를 한국과 단순비교하는 건 무리다. 한국에서는 2001년에서야 병역거부 문제가 공론화됐다. 최근 들어 정치권에서 대체복무제 입법 움직임이 일고 있는 수준이다. 노르웨이는 1900년에 병역거부를 수용하는 법조항이 생겼으니, 무려 1세기의 격차가 있는 셈이다. 따라서 노르웨이인들은 한국의 현실을 이해하기 힘들어했다. 대체복무자들을 대상으로 펴내는 반전평화 시사 월간잡지 (Balder)의 편집장 안드레아스 에이클(Andreas Eicle·20)은 “한국에선 군대를 거부하면 무조건 감옥에 가야 하고, 올해 그 대상자가 1100명에 이른다”는 이야기를 전해듣고선 관심을 표명했다. “특이한 뉴스다. 특집기사로 한번쯤 다루고 싶다”는 거였다. 2004년, 한국에선 대체복무제 실시 여부를 놓고 티격태격하고 있었지만, 노르웨이 사회에서 논쟁의 지점은 달랐다.
“요즘은 완전거부자들이 화두다.” 편집장 안드레스 에이클은 “최근 대체복무와 군대 모두 택하지 않는 완전거부자들에 대한 관심이 높다”며 “이들 대다수가 정치적인 이유에 따른 선택적 거부자들”이라고 설명했다. “아슬락이 용감하게 치고 나간 뒤 재판받는 장면이 언론에 보도되면서 그를 돕고 싶다는 전화를 많이 받았다. 덕분에 아프가니스탄이나 이라크 파병에 불만을 품고 자신의 행동에 정치적 이슈를 담는 이들이 많이 늘었다.” 한국으로 치면, 대한민국 영토를 방위하는 군대에는 들어갈 수 있지만 주한미군의 주둔을 반대해서 입영을 거부한다거나 판문점 근무만은 못 하겠다는 이들이다. 문제는 이들을 단순한 ‘완전거부자’로 묶어선 안 된다는 것이었다. 안드레아스 에이클은 “완전거부자들에게 1년의 형을 선고하는 것도 가혹하다”고 비판했다. 현재 완전거부자 10여명이 갇혀 있는데, 정부가 나서서 다른 방법을 모색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대체복무자 노조가 이틀간 파업한 이유
얼마 전 가 대체복무자 822명을 대상으로 여론조사한 바에 따르면 노르웨이 군대를 100% 찬성하는 비율은 21%에 불과했다. 완전 반대는 15%였고, 정치적 이유에 따른 선택적 반대는 24%에 이르렀다. “찬성하지만 변해야 한다”는 35%였다. 거기엔 미국 주도의 이라크 전쟁에 자기 나라 군대가 끌려가는 것에 대한 경멸이 담겨 있었다. 비록 지금 이라크에 남아있는 병력이 정보장교 10명뿐이라 할지라도….
매년 노르웨이에서 대체복무를 신청하는 숫자는 1500명 내외다(군 복무 신청자는 8500여명). 노르웨이 정부 대체복무기구 대표 한스 오 홀란(Hans O. Haaland·53)에 따르면 늘지도 않고 줄지도 않는 추세라고 한다. 1965년에 처음으로 대체복무와 관련된 특별법이 만들어져, 그동안 진화를 거듭해왔다. 예전엔 대체복무를 하려면 경찰서에서 인터뷰를 해야 했지만, 2000년부터 달랑 문서 한장으로 간소해졌다. 앞에서 밝혔지만, 평화주의자라는 사실만 밝히면 된다. 2002년부터는 복무기간이 14개월에서 13개월로 줄었다. “개선할 점은 없느냐”는 질문에 한스 오 홀란 대표는 “없다”고 잘라 말했다. 대신 “대체복무자들이 너무 쉬운 일자리만 선호하는 경향이 있어서 문제”라고 덧붙였다.
과연 그럴까. 노르웨이 대체복무자 노조위원장 안드레아스 할란 에켈리(Andreas Haland Ekeli·21)는 “노르웨이 정부 대체복무기구가 거만하다”고 생각한다. 대체복무자들이 개별적으로 대체복무기구에 민원을 제기하면 대답도 잘 안 해준다는 주장이다. 그래서 대체복무자들의 권익단체를 만들었다. 대체복무자들은 15개 지역으로 나뉘어 활동한다. 각 지역에서 선출된 15명의 대표는 한달에 한번씩 만나 현안을 토론한다. 이들의 총대표가 안드레아스 할란 에켈리다. “우리는 대체복무자들의 불만사항을 전달한다. 가장 자주 일어나는 문제는 대체복무자를 고용하는 이들이 거주 문제를 해결해주지 않는 일이다.” 대체복무자 노조는 파업을 벌이기도 한다. 지난해 노르웨이 군대가 이라크 남부에 지뢰제거 부대 150명을 파견했을 때는 항의의 표시로 이틀간 작업을 하지 않았다.
“13개월을 3~4개월로 줄일 수 있다”
완전거부자 문제와 함께 요즘 떠오르는 또 하나의 화두는 ‘여성’에 관한 것이다. 대체복무자들끼리 회의를 할 때마다 “여성이 대체복무 시스템 안으로 들어와야 하는가”를 놓고 격론을 벌인다고 한다. 의 편집장 안드레아스 에이클의 개인적 견해는 “남자 여자 구별 없이 대체복무제를 실시해야 한다”는 쪽이다. “젊은 남자만 13개월 일해야 하는 이 제도가 너무 불공평하다. 남성이나 여성이나 모두 군대에 안 갈 수 있는데, 여성들도 군대와 대체복무 중 하나를 의무적으로 선택하게 해야 한다. 그러면 대체복무 기간도 3~4개월로 줄어들 것이다.” 한국의 군 가산점 폐지 논쟁을 떠올리게 하지만, 노르웨이는 군대가 강요되지 않는 사회이므로 전혀 다른 차원의 쟁점이다.
너무 행복한 고민은 아닐까? 한국 사람의 눈으로는 이상향으로만 보이는 노르웨이의 대체복무제. 그럼에도 마구 불평을 퍼붓는 이곳 젊은이들을 보며 ‘병역의무의 이데올로기’에 오랫동안 길들여져온 한국의 청년들, 군대에 빠지기 위해 오줌까지 조작하다 여론의 오물을 뒤집어써야 했던 프로야구 선수들이 자꾸만 오버랩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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