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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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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격 없이 조심조심 살살…

등록 2004-04-21 15:00 수정 2020-05-02 19:23

열린우리당 승리 뒤 남북 · 대미 관계 향방… 보수진영 · 외국인 투자가 의식해 부분적 변화만 추구할 듯

임을출 기자 chul@hani.co.kr

열린우리당의 승리로 역사상 처음으로 개혁세력이 다수당이 됐다.

‘개혁’이라는 단어 속에는 대북·대미 관계에서 진보적인 변화도 예고한다. 그간 여소야대의 장벽이 전향적인 외교안보 정책을 추진하는 데 적잖은 부담으로 작용했다. 열린우리당의 지적처럼 “한나라당은 지난해 국회의 2004년도 예산 심의에서 정부가 책정한 남북협력기금 3천억원을 1700억원으로 삭감했고, 인도적 대북 지원조차 퍼주기”라고 비난했던 터다. 남북협력기금은 지금 남북 관계를 견인하는 몇 안 되는 수단 가운데 하나다. 대북 사업을 하는 기업들이 모두 쓰러지는 판이라 이 기금마저 없다면 남북 관계는 중단될 수밖에 없을 정도다. 이처럼 기금에 대한 시각은 곧 남북 관계 개선에 대한 특정 정당의 의지를 보여주는 지표이다.

남북협력기금 늘린다 하지만…

열린우리당은 우선 삭감된 남북협력기금을 확충하겠다는 뜻을 분명히 밝혔다. 기존의 비료 지원과 개성공단 기반시설 지원은 물론, “노무현 대통령 임기 안에 나머지 11만명이 화상 상봉이라도 할 수 있도록 남북협력기금을 확충하는 특별법을 제정하겠다”고 밝혔다. 그렇지만 사실 이 정도 내용이라면 지금 노무현 정부의 대북 정책 기조와 별다를 게 없다. 열린우리당이 내놓은 ‘4·15 총선 중앙공약집’에 들어 있는 통일안보 정책도 현 정부의 정책을 그대로 베껴놓은 인상을 주고 있다. 남북 정상회담 정례화를 통해 남북간 실질적 협력관계를 한 단계 발전시키겠다는 의지를 드러내고 있으나, 이 역시 “핵 문제의 해결 없이 정상회담을 하지 않겠다”는 노 대통령의 확고한 뜻으로 말미암아 실효성이 의문시된다. 열린우리당 차원에서는 별도의 정책 대안을 제시하기보다는 현 정부의 평화와 번영의 국가안보 정책을 힘있게 뒷받침하는 역할에 방점을 두고 있는 셈이다.

앞으로 주목할 대목은 국가보안법의 폐지 여부와 대미 관계의 재조정이다. 대미 관계와 관련해서는 당장 현안으로 떠오른 이라크 파병 재고 등이 초미의 관심사다. 열린우리당은 북한에 대한 주적 개념을 반대하고, 국가보안법은 폐지가 아닌 개정을 주장해왔다. 이른바 본격적인 남북 교류협력 시대의 변화상과 어울리지 않는 독소 조항만 골라 없애겠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사실 이 정도의 변화만으로도 남북 관계의 ‘획기적 변화’를 예고한다. 하지만 이 문제 역시 북핵 위기가 지속되고 있고, 탄핵과 총선을 거치면서 보-혁간 긴장이 꼭지점에 와 있는 상황이라 선뜻 손대기가 쉽지 않아 보인다.

이라크 추가 파병 문제도 난제 중에 난제다. 열린우리당 지지층의 상당수는 즉각적인 파병 결정의 철회를 요구하고 있다. 하지만 정권과 의회 권력을 모두 거머쥐고 책임정치를 보여줘야 하는 부담을 안고 있는 열린우리당이 엄청난 국내외 파장을 무릅쓰고 파병 결정을 번복할 수 있을까. 열린우리당 지도부가 3월22일 통일외교안보관계 정책정례회의를 열고 정부쪽과 이라크 파병 등 현안을 협의하는 자리에서도 파병 지역과 시기를 고민했지, 파병 철회를 언급하지는 않았다. 김근태 원내대표는 4월15일 “민주노동당과 노선이 다르다”며 “책임 있는 여당으로서 실천 가능한 대안을 제시할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따라서 국가보안법 개정이나 파병 철회 등 민감한 현안들이 이른 시일 안에 처리될 것 같지는 않다. 야당인 한나라당과 타협이 불가능할 정도로 첨예하게 견해가 엇갈리는 현안들이다. 대미 관계의 악화는 당장 국민들이 요구하는 경제 살리기 분위기를 해칠 수 있다는 점에서도 단호한 결정이 어려운 대목이다. 대책 없이 자주성을 강조하기가 쉽지 않다는 얘기다. 외국 언론들은 벌써부터 진보 성향의 인사들이 대거 포함된 열린우리당의 국회 과반 의석 확보를 두고 우려의 시선을 보내고 있다. 총선 직후 는 “훨씬 자주적이고 북한에 우호적인 우리당의 승리로 한국 국회는 1961년 쿠데타 이후 처음으로 진보주의자가 지배하게 됐다”고 썼고, 은 “한국 젊은 세대의 신장의 결정적 시기에 한-미 관계를 복잡하게 할 수 있다”고 우려를 담았다.

미국 의회조사국의 래리 닉시 박사는 4월15일 (RFA)과의 회견에서 “이번 총선 결과가 한-미 관계에 직접 영향을 주지는 않더라도 양국이 주한미군 재배치 등 그동안 입장 차이를 보여온 이슈들을 놓고 대립할 가능성이 커진 것은 사실”이라고 말했다. 열린우리당이 외국 투자자나 보수 진영의 우려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게 된 셈이다. 고건 대통령 권한대행 국무총리가 4월16일 딕 체니 미 부통령과의 회담에서 “참여정부가 지금까지 추구해온 외교안보 정책과 시장경제에 입각한 정책 기조에 변화가 없을 것”이라고 강조한 것도 비슷한 맥락이다.

국보법 개정 · 파병 문제 갈 길 멀어

더구나 진보적 대미·대북 정책을 놓고 열린우리당 내에서도 한 목소리만 나올지도 투명하지 않다. 열린우리당 내에도 워낙 정치이념이 다양한 인사들이 뒤섞여 있는 터라 국가보안법 개정이나 파병 등 민감한 현안들을 놓고 내부 격돌이 예고된다. 심지어 일부 고위급 인사는 북핵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법으로 ‘봉쇄론’을 펴는 이들도 있다.

열린우리당이 어렵게 과반을 넘는 의석을 차지했지만 앞으로 헤쳐나가야 할 개혁의 길은 여전히 멀고도 험난함을 잘 보여준다. 타협과 설득의 정치가 얼마나 성공하느냐가 개혁의 열쇠인 셈이다. 이런 맥락에서 정동영 의장의 발언은 새겨들을 만하다. 그는 3월17일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개혁의 절대적 기준은 국민의 요구”라며 정치권 일각에서 거론되는 국가보안법 개정 문제 등은 최우선 순위가 아니라는 의견을 내비쳤다.

그는 “국민들의 요구에는 우선순위가 있다. 당장 부딪혀서 소리가 나는 것보다 국민적 공감대가, 여야간 공감대가 있는 부분을 처리하는 것이 수순에 맞다. 절대적 기준은 국민의 요구다. 우선순위, 국민이 뭘 가려워 하느냐, 등이 가려우면 등부터 긁어야 한다. 지금 등이 가려운데 어깨만 긁으면 시원한가. 지금은 민생경제를 살리라는 게 국민들의 아우성 아니냐”고 말했다.

정 의장의 실용주의 노선을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요컨대 열린우리당이 총선에서 과반을 넘는 의석을 차지했지만 이른 시일 안에 대북·대미 정책에서 큰 폭의 변화를 시도할 가능성은 크지 않아 보인다. 당분간 보-혁 갈등 구도를 더 심화시키기보다는 국민통합 차원에서 가급적 야당과 합의한 틀 안에서의 부분적 변화만 예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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