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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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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 폄하’ 파장은 어디까지

등록 2004-04-08 00:00 수정 2020-05-03 04:23
TK뿐 아니라 PK · 수도권까지 한나라당 지지율 치솟아… 정동영-김근태 진영 힘겨루기 측면도

박창식 기자 cspcsp@hani.co.kr

정동영 열린우리당 의장의 ‘노인 폄하 발언’이 4·15 총선 정국에 긴 파장을 드리우고 있다. 야당들이 쟁점 부풀리기를 꾀하는데다, 정 의장의 발언 내용이 세대갈등이라는 인화성 강한 지점을 건드린 측면이 있기 때문이다.

표심에 어떤 영향?

대구·경북 지역을 중심으로 한 영남권에서 한나라당 지지층의 결집을 촉진하는 촉매 역할을 강하게 하고 있는 것으로 분석된다. 경북 영주에 출마한 열린우리당 이영탁 후보가 공개적으로 정동영 열린우리당 의장의 선대위원장 사퇴를 요구하거나, 대구 서구에 출마한 같은 당 서중현 후보가 ‘정동영 망언에 사죄하는 석고대죄’라는 현수막을 내건 것은 이런 기류를 대변한 것으로 해석된다.

관심의 초점인 부산·경남과 수도권 일부 지역에서도 비슷한 흐름이 일부 나타나는 것으로 알려졌다. 열린우리당 관계자는 “4월4일 조사결과 수도권에서 열린우리당 후보가 인물경쟁력이 강한 지역에선 영향이 없지만, 지명도 등이 약한 지역에선 한나라당에 역전당하는 곳이 나타나고 있다”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수도권에서 우리 당 후보의 인물경쟁력이 약한 지역은 정당지지율이 10% 가까이 내려갔으며, 그와 비슷한 비율로 한나라당 지지율이 올랐다”고 말했다.

이런 흐름은 차떼기 불법 대선자금 수수사건과 탄핵 정국을 거치면서 한나라당에서 이탈했던 잠재적 지지층이 한나라당으로 되돌아가는 데 따른 결과로 분석된다. 김형준 한국사회과학데이터센터 부소장(정치학 박사)은 “한나라당에 실망해 거리를 뒀던 잠재적 지지자들이 그동안 뭐라고 입을 떼기 어려워하다가 열린우리당쪽이 악재를 제공함에 따라 활기를 되찾기 시작하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열린우리당은 이에 따라 선거 관심사를 탄핵쪽으로 되돌리기 위한 전략을 구사하고 있다. 정 의장이 4월5일 부산 기자회견을 통해 ‘탄핵 철회를 위한 한나라당과의 대표 회담’을 제안한 것도 이런 맥락으로 해석된다. ‘노인 폄하’ 정국을 ‘탄핵 정국’으로 되돌리려는 국면 전환 전략인 셈이다. 그러나 한나라당과 민주당은 “국면 전환을 위한 정략적 제안”이라며 거부했다.

정 의장의 ‘말 실수’ 이후 대응 전략을 놓고 빚어지는 내부 갈등도 관심을 끌고 있다.

정 의장은 , , 총선기자단이 자신의 발언을 보도한 첫날인 4월1일 지방유세 도중 “20~30대가 투표에 많이 참여했으면 좋겠다는 취지로 한 말이 거두절미됐다”며 “만약 오해가 있게끔 말한 것이라면 잘못된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만약 오해가 있게끔 말한 것이라면…”이라고 자신의 표현에 가정법을 두는 등 전면적 사죄보다는 ‘우회적 유감 표명’ 입장을 취했다. 또한 자신의 발언을 보도한 대학생 아마추어 기자들을 향해 “대학생 기자들이 벌써부터 그런 것을 배우면 안 된다”고 불만도 표시했다.

그러나 정 의장은 다음날인 4월2일 중앙당사 기자회견을 통해 백배사죄 성명서를 발표함으로써 ‘전면적 사죄’쪽으로 태도를 수정했다. 그는 대한노인회 등 노인단체 관계자들과 만나 거듭 사죄의 뜻을 밝혔다. 정 의장은 이날 하루 근신의 뜻으로 유세활동을 자제했다.

열린우리당 내부의 미묘한 기류

이 와중에서 열린우리당 중앙당은 선거대책본부장단 회의를 통해 정 의장의 근신기간을 연장하고 대신 김근태 공동선대위원장을 전면에 내세우도록 선거전략을 수정하는 방안을 집중 검토한 것으로 알려졌다. 특히 대구·경북 지역 일부 후보들이 정 의장의 선대위원장직 사퇴를 요구하며 강하게 반발하는 기류를 중시했다고 당 관계자는 전했다.

열린우리당은 ‘탄핵 철회 여야 대표회담’ 기자회견도 정 의장 대신에 김근태 공동위원장이 하는 방안을 검토했다. 그러나 열린우리당은 “정 의장이 기자회견에 나서야 제안이 좀더 주목받을 수 있다”며 애초의 방침으로 되돌아갔다.

이런 논쟁 이면에는 총선 뒤의 당 주도권을 둘러싼 정동영-김근태 진영간 힘겨루기 측면도 작용한 것으로 분석된다. 두 진영은 애초 선거전략을 놓고도 ‘탄핵 무효, 민생 우선’(정동영) 대 ‘탄핵 무효, 민주 수호’(김근태)론으로 맞서며 대립한 바 있다.

한편 대한노인회(회장 안필준)가 4월2일 정 의장의 사죄 방문을 받고 더 이상 문제 삼지 않기로 했다가, 다음날 입장을 번복해 정 의장의 정계은퇴를 주장하는 성명서를 발표한 과정도 ‘노인 정치’ 차원에서 흥미롭다. 열린우리당의 한 관계자는 “대한노인회 집행부의 경우 노인복지를 확대하는 공약을 추가로 제시받는 선에서 사죄를 받아들이기로 사전에 조율된 바 있다”며 “그러나 노인회 시·도 지부장 회의를 연 결과 야당 성향이 강한 서울과 부산쪽이 들고 일어나는 바람에 입장이 번복된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대학생 기자도 몰매 맞다

[폄하 발언 보도, 그 뒤]

박창식 기자 cspcsp@hani.co.kr

정동영 열린우리당 의장의 ‘노인 폄하 발언’을 단독 인터뷰해 보도했던 대학생 아마추어 기자 박하린씨가 정 의장과 나란히 곤혹스러운 처지에 빠졌다.

박씨에게 ‘사건’이 일어난 것은 CBS, iTV, 가 공동으로 운영하는 대학생 총선기자단 50명 중의 한 사람으로 활동한 지 사흘째였다. 총선기자단은 아마추어 저널리즘 차원의 새로운 시도로, 단원들은 간단한 캠코더 또는 그게 없는 사람은 동영상을 찍을 수 있는 휴대전화라도 들고 현장을 뛰고 있다.

그는 3월26일 정 의장의 대구 그랜드호텔 기자간담회에 정규 언론사 기자들과 함께 참석했다가 간담회를 마친 정 의장에게 다가갔다. 정규 언론사 기자들의 세에 눌려 한마디도 질문하지 못했으니 자신에게도 기회를 달라고 요청한 것이다.

정 의장은 흔연히 요청에 응했으며, 이에 박씨는 “20, 30대를 위한 특별한 홍보 전략이 있는지? 그리고 정치에 무관심한 젊은 유권자들에게 한마디 해주세요”라고 했다. 시간을 넉넉히 잡은 인터뷰라기보다는 단 한 꼭지의 질문과 답변에서 총선 정국을 뒤흔든 문제의 발언이 불거져나온 것이다.

박씨는 인터넷 사이트에 실은 취재 후기에서 촬영한 동영상을 놓고 “편집을 하는 이틀 동안 문제의 장면의 삽입 여부를 놓고 많은 고심을 했다. 그러나 원래 우리 프로그램의 의도는 정 의장의 솔직한 모습을 모두 보여주자는 것이었기에 그 장면을 삽입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정 의장은 문제의 발언이 보도되면서 비난 여론이 들끓자 노인단체들을 찾아다니며 백배 사죄하기에 이르렀다. 야당들은 드디어 수세 탈출용 호재를 잡았다며 일제히 쟁점 부풀리기에 나섰다.

이런 가운데 사이트의 총선기자단 코너에는 “박 기자는 수구세력의 앞잡이 아니냐” “딴나라당에나 가라” “철없는 행동” 등으로 박씨를 비난하는 글들이 쏟아졌다. 열린우리당의 상승세가 꺾일 것을 걱정하는 사람들이 ‘박하린 기자 두들기기’를 하는 듯한 양상이었다. 박씨는 개인 홈페이지도 운영해왔는데 여기에도 비난글이 쏟아지자 홈페이지를 폐쇄했다고 한다. 어떻게 번호를 알았는지 휴대전화로도 온갖 전화가 걸려와 전원을 끊었다.

CBS 관계자는 “박씨가 총선기자단 활동을 중단하고 외부와의 연락도 끊은 상태”라며 “그를 둘러싼 정치적 오해의 소용돌이가 빨리 가라앉았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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