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한겨레21이 주목한 사람들] 다른 눈으로 세상을 만났다

등록 2004-03-11 00:00 수정 2020-05-02 04:23

이 주목한 사건 속의 사람들… 그들은 지금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가

은 한국사회 10년의 변화를 얼마나 주도했을까. 세상을 바꾸고자 하는 열망은 강렬했다. 그것을 얼마나 지면에 반영했는지에 대해선 아쉬움이 적지 않다. 하지만 이 주목한 사건과 사람들이 한국사회 변화에 기여했다는 사실만은 기억하고 싶다. 10년 동안 매호에 만의 목소리를 담으려했다. 그 목소리는 을 만드는 사람들만의 것이 아니었다. 우리 사회 곳곳에서 변화의 열망을 품고 나름의 몫을 하는 사람들의 것이었다. 창간 10년을 맞아 이 주목한 사건 속의 사람들을 묶었다. -편집자

목숨을 삼킨 분단의 질곡

김정일 국방위원장 처조카 고 이한영씨

안재승 기자/ 한겨레 경제부 jsahn@hani.co.kr

7년 전 세상을 떠난 이한영씨를 이 만난 사람 가운데 한명으로 꼽은 이유는, 그의 길지 않은 생이 남북 분단의 질곡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이한영씨는 가 1996년 2월13일 을 인용해 “김정일의 본처 성혜림씨와 언니 성혜랑씨가 서방 세계로 탈출했다”고 보도하면서, 존재가 세상에 알려졌다. 성혜랑씨의 아들인 그는 세상에 알려진 지 정확히 1년만인 97년 2월15일 괴한의 총에 맞고 서른여덟의 파란 많은 삶을 마감했다.
은 당시 국내 신문들이 성혜림씨 망명설과 관련해 선정적인 추측 보도로 지면을 도배하다시피 할 때, 이한영씨를 만났다. 그는 이틀 동안의 인터뷰에서 성혜림씨 망명설의 진실과 자신의 인생에 대해 솔직히 털어놓았다. 1982년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아들 김정남을 따라 스위스로 연수를 갔다가 미국에 가고 싶은 욕심에 한국대사관을 찾았고, 남쪽에 오게 된 일. 그리고 남쪽에서 성형수술과 함께 신분을 감추고 살게 된 과정. 남쪽 사회에 적응하지 못한 채 횡령죄로 구속되고, 생활고에 빠지자 모스크바에 있는 어머니에게 도움을 청한 사연. 이 과정에서 을 찾아가 어머니와 이모의 망명 계획을 돈을 받고 팔려고 했고, 이 약속을 깨고 보도하는 바람에 일을 그르치게 된 경위 등등…. 그는 인터뷰를 끝내며 “언론사를 찾아가지 않았더라면 조용히 일이 이뤄졌을텐데. 어머닌 날 원망할 것이다”고 한탄했다.
그해 6월 그를 다시 만나, 그가 14년간의 남쪽 생활을 책으로 정리한 을 건네받았다. 또 그해 11월엔 서울 시내의 한 백화점에서 그를 우연히 다시 만났다. 그 백화점의 식품 매장에서 초콜릿을 판다는 그는 비교적 활기찬 모습이었다. 그 이듬해 2월 그가 경기도 분당의 집 앞에서 괴환이 쏜 총을 맞았다는 소식을 들었다. 자신의 후회처럼 그는 자신의 잘못으로 어머니를 만나지 못한 채 비참하게 생을 마감한 것이다.
안기부는 대선 직전인 97년 11월 이한영씨 피살 사건의 범인이 북한 공작원들로 밝혀졌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그의 죽음에 관한 진실은 여전히 오리무중이다. 지난 2월24일 이씨의 딸과 함께 사는 부인 김종은(35)씨는 재출판 기념회에서 “지난 수년간 우리 가족이 고통과 아픔을 가슴에 묻고 살아온 현실은 공포 그 자체였다”고 말했다.


온 겨레의 힘, 이번엔 전당으로!

정대협 사무총장 윤미향씨

유현산 기자 bretolt@hani.co.kr

“국민으로서 할 도리를 한 거죠.” 1996년 11월부터 1997년 5월까지 과 함께 ‘정신대 할머니 온겨레 돕기 운동’을 펼친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아래 정대협) 사무총장 윤미향(41)씨는 당시를 이렇게 회상한다. 이 운동은 일본이 군위안부 피해자에게 법적 배상을 할 수 없다는 공식적 입장을 밝히자 “우리가 할머니들을 위로하고 보호하자”는 취지로 시작됐다.
군위안부 할머니들의 증언과 각계 독자들의 사연이 매주 지면에 실리며 모금이 진행됐다. “모은 돈으로 할머니 한분당 250만원씩 드렸죠. 정말 적은 돈이에요. 하지만 소중한 돈이죠.” 기업의 후원이나 재력가의 큰돈을 받지 않고 학생, 직장인, 종교인들의 작은 정성을 모았기 때문에 그만큼 의미가 있다는 뜻이다. 안타까운 것은 할머니들이 많이 돌아가시고, 지금 살아 계신 분들도 대부분 인터뷰를 못할 정도로 몸이 안 좋다는 점이다.
정대협은 1990년 11월 공식 발족했다. 10여년 세월 동안 국제연대, 진상조사 등 다양한 활동을 펼친 정대협은 최근 ‘일본군 위안부 명예와 인권의 전당’ 건립에 모든 역량을 쏟아붓고 있다. 할머니들이 한분씩 세상을 떠나면서 그들의 역사가 그냥 사라질지 모른다는 위기감이 들었기 때문이다. 할머니들도 “우리가 죽고 나면 뭐가 남느냐. 후손들이 우리처럼 희생당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며 몇백만원 혹은 매달 10여만원씩 생활비를 모아 기부했다.
교회 여성기관에서 일하던 윤씨는 김학순 할머니의 증언을 듣고 충격을 받아 군위안부 문제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여기 실무자들은 다 자발적으로 ‘강제 연행’ 당한 사람이죠.” 윤씨가 말하는 정대협 활동가들의 생활은 고난 그 자체였다. 윤씨는 지금 초등학교 5학년인 딸의 아침을 차려본 적이 없다. 일주일에 사흘은 할머니 쉼터에서 자며 식사와 간호를 한다. “이승연 누드 사건 때문에 일주일 집에 못 들어가고 정선례 할머니 돌아가셔서 사흘 동안 지방에 내려갔다 올라오니 또 3·1절이더군요.”
윤씨는 독자들에게 이런 인사를 남긴다. “ 독자라면 건강한 사회의식을 가진 분들이겠죠. 할머니들의 아픔을 온 겨레가 나눌 수 있도록 도와주셨으면 해요. 독자들이 홈페이지(www.womenandwar.net)에 군위안부와 관련된 각종 소식 등을 올려주세요. 물론 모두 명예와 인권의 전당 회원이 돼주실 거죠?”


배우를 잃고 나를 찾았네

최초의 연예인 커밍아웃 홍석천씨

신윤동욱 기자/ 한겨레 syuk@hani.co.kr

커밍아웃 3년6개월, 홍석천(33)씨는 나를 찾은 대신 배우를 잃었다. 그는 커밍아웃을 하자마자 방송에서 ‘아웃’당했다(본지 2000년 9월26일 제327호 ‘누가 그의 결단을 유린했는가’ 참고). 그리고 2003년 9월 드라마 으로 방송에 복귀했다. 꼭 3년 만이었다. 그는 “사실 2년이면 방송에 지장이 없을 줄 알았다”며 “대마초를 해도 다들 2년이면 방송 복귀하고, 음주운전은 3개월이면 되던데…”라며 씁쓸해했다. 3년은 길고 가혹한 시간이었다.
그는 출연을 완전한 복귀로 여기지 않는다. 작가 김수현씨니까 출연할 수 었었다고 생각한다. 그에 대한 ‘보이지 않는’ 징계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이 끝난 올 3월, 한 방송사의 프로듀서가 전화를 했다. 그 프로듀서는 “새로 시작하는 어린이 드라마에 홍석천씨를 꼭 캐스팅하고 싶다”며 그의 의사를 물었다. 물론 오케이. 진행자를 하다 퇴출당했기 때문에 어린이 프로그램 출연은 간절한 바람이었다. 그러나 불안했다. 그가 먼저 프로듀서에게 “윗선과 먼저 상의해봐라”고 충고했다. 그 뒤로 그 프로듀서는 연락이 없다.
기다리다 지쳐서, 이제는 기대를 하지 않는다. 차라리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한다. 그가 이태원에 만든 카페 ‘아우어 플레이스’(our place)에 나와 손님들을 맞는다. 올해는 동성애자와 이성애자가 서로를 이해해가는 과정을 그린 연극을 무대에 올릴 계획이다. 1960~70년대 복고풍 음악을 담은 앨범 발표도 고려 중이다. 지인과 함께 수입 의류 브랜드를 런칭할 예정이다. 하루 네다섯 시간밖에 못 자는 바쁜 생활이지만, 마음의 공허함은 어쩔 수 없다. 연기에 대한 ‘허기’를 채우지 못하기 때문이다.
방송에서 ‘왕따’를 당해도 삶에서 ‘후회’는 없다. 그는 “커밍아웃을 하지 않았으면, 인간적으로 훨씬 나빠졌을 것”이라고 돌이켰다. 커밍아웃을 통해 사회운동에도 눈 뜨게 됐다. 호주제 폐지운동에 힘을 보탰고, 반전운동에도 함께했다. 그는 “커밍아웃을 하지 않았다면 답답해서 못 살았을 것 같다”며 웃었다. 홍석천씨 다음에 커밍아웃한 유명인은 아직 없다. 아쉽지 않냐고 물었다. 그는 “내가 당하는 걸 보고 누가 커밍아웃을 하겠느냐”고 되묻는다. 친한 연예인의 이름을 말하려다가도 “그만두자”고 말을 끊는다. 자칫 그 이름이 동성애자로 오해받을 수도 있어 조심스럽기 때문이다. 아직 우리 사회는 그렇다.


음지의 인생에 해뜰날 왔다

북파 공작원 김정식씨

김수병 기자 hellios@hani.co.kr

조국을 위해 음지에서 싸웠던 김정식(56)씨는 팔과 옆구리에 관통상을 입었지만 기적처럼 살아남아 1968년 10월에 ‘제대’했다. 계급장도 없이 지독한 훈련을 받고 북한군 복장으로 8차례나 남북을 넘나들었던 그였지만, 자신이 육군 정보사령부 소속의 군인이었다는 것은 전역식에서 충무무공훈장을 받고서야 알았다. 세상은 나라를 위해 헌신하다 부상을 입은 ‘국가 유공자’인 그를 대접하기는커녕 강력사건만 터지면 용의자로 몰기 일쑤였다.
사선을 넘나든 대가로 30여년의 세월을 ‘어둠의 자식’처럼 보냈다. ‘과거’를 악몽처럼 기억하는 그와 동료들이 본격적으로 ‘양지’에서 다시 만나게 된 것은 이 제269호(1999년 8월5일치)에서 표지이야기로 “북파간첩 7726명이 사라졌다”고 밝히면서부터다. 당시 군 정보사령부 고위관계자가 “실종 공작원마다 관련 파일이 있으며 이를 보관하고 있다”고 밝혀 해방 뒤 꾸준히 진행된 ‘북파공작’의 실체가 일부나마 드러났던 것이다. 이를 계기로 대북 특수임무를 수행했던 사람들이 하나둘 모이기 시작했다.
당시 은 북파공작원들의 실체를 드러냈지만 생존자들을 만나지는 못했다. 워낙 피해의식이 컸던 생존자들은 공개적으로 자신들의 활동을 말하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생존자들의 활동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부상을 입은 전우들 상당수가 보훈병원에서 만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만난 사람들 일부가 군 당국에 자신들을 예우할 것을 강력하게 호소했다. 그래서였을까. 1997년 군 당국은 몇몇 사람에게 500만원씩을 위로금으로 주기도 했다.
김씨는 우연히 서울 용산 전쟁기념관에 들렀다가 ‘대침투전 전사자 명단’에서 ‘목장’(훈련소 입구의 대한축산연구소라는 푯말에서 유래)이라 불리던 훈련소 동기생과 후배들의 이름을 발견했다. 이를 계기로 전우들을 본격적으로 찾아나섰다. 그렇게 만난 사람들이 지난해 6월 ‘대한민국 첩보요원 총연합회’(현재는 대한민국 특수임무수행자 홍회)를 결성했고 김씨가 회장을 맡았다. 지난 1월8일은 이들에게 특별한 날이다. 김성호 의원(열린우리당)이 발의한 ‘특수임무수행자 보상·지원에 관한 법률’이 제정돼 비로소 과거를 ‘인정’받게 됐기 때문이다. “4403명이 해당되는데 지금까지 3980여명이 신청했습니다. 나머지 400여명은 연락 두절입니다. 그 중 상당수는 자살했거나 폐인이 됐습니다. 우리의 전우들이 그렇게 죽어갔습니다.”


전쟁의 참화보다 지독한 나날들

베트남전 참전 고백한 예비역 대령 김기태씨

고경태 기자 k21@hani.co.kr

“머리가 아파요. 생각하기도 싫습니다.” 305호(2000년 4월27일치)의 표지 주인공으로 등장했던 예비역 해병 대령 김기태(69)씨. 그는 과거를 떠올리고 싶지 않다. 베트남전 참전 고백이 실린 이 발간되면서, 몇달간 베트남전 당시에 버금가는 ‘참화’에 휩싸였기 때문이다. 하루 종일 끊이지 않고 울리는 전화…. “야 이 XX야, 니가 뭔데 우리들 명예를 짓밟고 더럽혀?” 일방적 욕설이 끝나면 전화가 툭 끊겼고, 몇분 되지도 않아 또다시 전화기가 울었다. “선배님 이러시면 되겠습니까?” 집 밖을 나가면 휴대전화가 비명을 질렀다. 어떻게 번호를 알았는지 신기할 정도였다.
당시 취재 과정에 참여했던 기자는 한달 뒤 그를 언론중재위원회에서 불편한 얼굴로 만나야 했다. 그리고 베트남전과 관련된 그의 이야기는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다. 문화방송 등 다른 매체에 등장한 뒤 나오는 말도 에 실린 증언과 상반된 경우가 많았다. 마치 에 노근리 학살을 증언했던 미군들의 증언이 계속 바뀐 것처럼….
그와 4년 만에 전화로 통화했다. 목소리엔 활기가 있었다. 국가연금으로만 생활하던 당시와는 달리, 요즘은 매일 김포에 있는 직장에 나간다고 했다. 기계를 만드는 공장에서 엔지니어로 일하며 설계 일을 봐주고 있다. “아침 8시부터 저녁 6시까지 일하지요. 늙어도 일해야 건강합니다.” 근처 공장엔 베트남에서 온 노동자들이 많다. 그들과 대화할 때 묘한 향수를 느낀다고 한다.
이 1999년부터 집중 보도한 베트남 기사의 파괴력은 해외 언론들을 움직였다는 데 있다. 베트남 국립문서보관소 문서발굴, 베트남 중부 5개성 현장르포, 한국군 참전군인 인터뷰, 미국 국립문서보관소 문서발굴로 2년 넘게 숨가쁘게 이어진 주요 보도를 베트남의 거의 모든 신문과 방송이 받아서 보도했다. 그리고 등 세계적 통신사들이 이를 전 세계에 타전했다. 당시 김기태씨는 참전군인들의 항의전화를 받는 와중에 런던의 본사로부터 인터뷰 제의를 받기도 했다고 회상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사이 외교통상부에서 전화가 왔다. 베트남전 당시 한국군이 참전했던 중부 5개성의 언론사 편집장 10명이 ‘외교부 초청’으로 3월 말 한국에 온다는 것이었다. 을 방문하고 싶다고 한다. 의 보도 전까지 잊혀진 존재였던 베트남 중부 5개성. 이렇게 세상은 조금씩 바뀌고 있다.


이젠 탈북자의 ‘좋은 벗’으로

최초의 양심적 병역거부 선언자 오태양씨

신윤동욱 기자/ syuk@hani.co.kr

오태양(30)씨는 탈북자의 ‘좋은 벗’으로 살고 있다. 2002년 연말부터 국제 평화·인권·난민지원센터, ‘좋은 벗들’에서 통일사업 담당 활동가로 일하고 있다. 그가 1997년부터 해온 북한동포돕기운동을 이어가고 있는 것이다. 그는 “역사의 피해자인 탈북자들과 함께하는 일은 또 하나의 평화운동”이라고 말했다.
오태양씨는 ‘그날’을 잊지 못한다. 눈발이 흩날리던 2001년 12월17일, 불교신자이자 사회운동가인 오태양씨는 여호와의 증인이 아닌 사람으로는 처음으로 양심에 따른 병역 거부를 했다(2001년 12월19일치 제389호 ‘아무리 되물어도 이 길밖엔…’ 참조). 벌써 그 길에는 11명의 벗들이 생겼다. 11명의 병역 거부자 중에는 불교신자도 있고, 반전운동가도 있고, 사회주의자도 있고, 동성애자도 있고, 생태주의자 농부도 있다. 양심은 다르지만, 평화를 사랑하는 마음만은 하나다. 오태양씨는 “병역 거부자들 중에 내 사건을 보면서, 내 글을 읽고 병역 거부를 결심했다고 하는 친구들도 있어 책임감을 느낀다”고 말했다.
오태양씨는 영장이 기각돼 불구속 재판을 받고 있는 상태다. 하지만 재판은 병역 거부에 대한 위헌법률심판제청이 받아들여지면서 2002년 6월을 마지막으로 중단됐다. 그는 재판과 상관없이, 병역 대신 봉사를 하겠다는 약속을 지켜왔다. 2001년 연말부터 빈민 어린이집 ‘희망학교’에서 아이들을 돌보고, 빈곤층 노인 지원기관인 ‘자비의 집’에서 어르신들을 보살폈다. 그리고 지난 2002년 연말 또 다른 봉사현장인 ‘좋은 벗들’로 옮겨왔다. 또 병역 거부자들의 모임인 ‘전쟁 없는 세상’에서 이라크전 반대운동, 병역 거부를 알리는 활동을 해왔다. 앞으로는 3월17일 재개되는 재판을 통해 병역 거부의 정당성을 알리는 일에 힘쓸 생각이다.
최근에는 한국 정부가 ‘평화재건 부대’라는 이름으로 이라크에 파병을 하는 모습을 보면서 착잡했다. 이라크에서 총 대신 식량을 들고 봉사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기 때문이다. 물론 300만원의 월급은 필요 없다. 그저 대체복무만 인정해주면 된다. 오태양씨는 “저와 염창근씨 등 다수의 병역 거부자들이 분쟁 지역에 가려다 못 간 사람들”이라며 “병역 거부자들을 보낸다면 ‘평화재건’이라는 이름에 걸맞았을 텐데…”라고 안타까워했다. 오태양씨는 요즘 ‘8일 출가·열반 정진’에 힘을 쏟고 있다. ‘그때 그 마음으로 살고 있는가’. 여전한 그의 화두다.


한겨레 저널리즘
응원으로 지켜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