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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우리당- 죽느냐, 차별화하느냐

등록 2004-01-15 15:00 수정 2020-05-02 19:23

열린우리당 젊은 지도부 탄생으로 거듭나나… 정치개혁이란 ‘차별화 전략’의 성공 여부가 관건

신장개업한 식당이 성공하려면 내놓는 음식이 맛있어야 한다. 간판을 바꾸고 외양을 화려하게 치장해 반짝 성공하더라도, 맛이 그대로라면 손님들의 발길은 다시 뜸해진다. 정치도 마찬가지다. 정당의 얼굴인 새 지도부가 들어서더라도, 국민들에게 보여주는 정책과 정치행태가 기대에 미치지 못한다면 지지를 끌어내기 어렵다.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여야를 막론하고 정치권 전체가 끝없는 불신의 나락으로 떨어진 요즘은 더욱 그렇다.

창당 이후 계속된 정체성 위기

1월11일 새 지도부 선출대회를 통해 확인된 열린우리당 당원들의 선택은 ‘젊음’과 ‘변화’였다. 이미 예견됐던 정동영 신임 의장의 독주와 함께 신기남·이미경 위원의 선전은, 이들이 주창해온 “개혁 지도부”에 당원들이 힘을 실어준 것으로 풀이된다. 50대의 젊은 지도부가 선명한 개혁 색채를 보여주지 않으면 총선 승리는 없다는 위기 의식이 짙게 깔려 있는 것이다.

사실 우리당은 정치개혁과 지역주의 극복이란 명분을 내걸고 지난해 11월 출범했지만, 뚜렷한 성과를 내지 못했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우리당 내부에서조차 “창당 이외에 한 일이 없다”고 자조할 정도다. 물론 민주당 신주류와 한나라당 탈당파, 개혁당, 정치권 밖 신당추진 세력 등 다양한 세력들을 한 데 묶어 열린우리당을 출범시키고 연착륙시키는 데까지가 쉽지 않은 과정이었지만, 창당한 지 불과 한두달 사이에 공공연히 민주당과의 재통합론이 거론되는 것은 분명 위기의 징조였다. 왜 신당을 하려 했는지 보여주는 데 열린우리당이 실패했음을 자인한 셈이기 때문이다.

‘정신적 여당’을 표방하면서도, 부안 사태나 이라크 파병 문제, 한-칠레 자유무역협정 등 굵직한 정책 현안에서 여당으로서의 면모를 제대로 보여주지 못했다. 부안 핵폐기장 논란으로 전국이 들끓었을 때 이를 밀어붙이려는 정부와 반대하는 지역주민·환경단체 사이에서 무기력한 태도를 취했고, 최근 국회 본회의에서 자유무역협정 비준동의안을 놓고 찬반토론이 격렬하게 벌어졌을 때 찬성토론을 주도하기보다는 무기명 비밀투표를 제안해 통과시키는 데 주안점을 뒀다. ‘농민당’ 의원들의 수모를 받아가며 찬성토론에 나섰던 이는, 총선 불출마 선언을 했던 오세훈 한나라당 의원이었다.

노무현 대통령의 재신임 발언 등 주요 정치적 쟁점에서도 정국 주도권을 확보하는 데 실패했다. 청와대의 입장 표명에 따라 태도가 변하는 일이 잦아지자 당 내부에서 ‘노빠당’ 경계론이 나오기도 했다. 그러다보니 분당과 창당 과정에서의 긴박감은 사라지고, “믿을 것은 나 자신밖에 없다”면서 지역구 득표 활동에만 치중하는 의원들이 늘어갔다. 정체성 위기 속에서도 진지한 반성보다는, 김원기 전 의장이나 노무현 대통령쪽에 책임을 떠넘기기도 했다.

정책 의원총회의 정례화, 사무처 당직자 공채, 중앙당 경비 공개 등 정당 운영면에서 차별화를 꾀했지만 도드라져 보이지 않았다. 그나마 지난해 연말 국회에서 정치관계법 ‘개악’에 제동을 걸면서 그 존재를 희미하게나마 확인시켰던 것이 성과라면 성과다.

이런 점에 비춰볼 때 정동영 의장 체제의 새 지도부의 출발점은, 한나라당과 민주당 등 기성 정당과의 차별화에 초점이 맞춰질 것 같다. 정 의장은 수락연설에서 “우리가 맨 먼저 할 일은 낡은 부패정치를 쓸어내는 일이며, 당장 발등에 떨어진 불은 선거관계법 개악을 저지하고 정치개혁법을 국회에서 만들어내는 일”이라며 차별화 전략을 분명히 했다.

청와대와의 관계 정립도 시급

문제는 이 차별화 전략이 얼마나 대중적인 설득력을 얻느냐는 점이다. 50대 초반의 젊고 개혁적인 대표를 내세움으로써 당분간 최병렬(65) 한나라당 대표나 조순형(68) 민주당 대표 등과 뚜렷이 대비되어 보이겠지만, 두 당 모두 앉아서 가만히 당하고 있지만은 않을 것이 분명하다. 출혈을 감수하면서라도 대대적인 물갈이를 통해 개혁 경쟁에 따라나설 가능성이 크다. 당장 지난 연말 ‘정치개악특위’라는 비난을 받았던 국회 정치개혁특위 위원들을 대부분 갈아치우고, 범국민정치개혁협의회의 개혁안을 대폭 수용하겠다는 쪽으로 방향을 선회하고 있다. 정개특위 위원장으로 내정된 이재오 한나라당 의원은 “당리당략을 떠나 정개협의 각종 개혁안을 적극 수용하겠다”고 밝혔고, 민주당 간사인 함승희 의원도 “정개협이 제시한 모든 안을 전폭적으로 수용해 개악했다는 말이 나오지 않도록 하겠다”고 가세했다. 국회에서 체포동의안이 부결됐던 비리 의원들의 구속을 계기로 한층 높아진 국민들의 원성을 의식한 행보지만, 열린우리당의 차별화 전략에 대한 대응책 성격이 짙다.

조현우 열린우리당 전략기획실장은 “개혁 경쟁이 벌어지더라도 국민들이 5·6공 잔당이나 지역 구도에 안주하려는 퇴행적 정당에 표를 몰아주는 일은 없을 것으로 보지만 결국 우리당이 어떤 가능성을 보여주는 것이 관건”이라며 “한나라당과의 양강 구도 속에 안정감 있고 개혁적인 인물을 내세우는 것이 필승 전략”이라고 말했다.

지난 몇달 동안 불안정했던 청와대와 새로운 관계를 정립하는 것도 시급한 과제로 꼽힌다. 노무현 정부 들어 과거 대통령이 당 인사와 주요 사안을 좌지우지하던 적폐가 청산되면서 ‘당정분리’는 이뤘지만, 책임정치를 구현할 새로운 관계 정립에까지 이르지는 못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이에 열린우리당은 노 대통령의 입당 문제가 기정사실로 받아들여지는 만큼, 입당 전이라도 당·청간 비공식 협의채널 개설을 요구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와 함께 정 의장이 최근까지 외부인사 영입추진위원장을 맡으면서 문재인 청와대 민정수석과 강금실 법무장관 등 총선 경쟁력이 있는 청와대 참모와 정부 각료의 총선 출마를 공개적으로 종용해왔다는 점에서, 이것이 현실화될지도 지켜볼 대목이다.

열린우리당 당내 문제로 좁혀보면, 새 지도부의 ‘연착륙’ 여부가 관건이 될 전망이다. 김원기 전 의장을 포함해 임채정·이호웅 의원 등 신당 창당 과정과 창당 이후 당 운영에서 정 의장 등 새 지도부 인사들과 긴장관계를 유지했던 재야 입당파 의원들은, 정 의장의 독주를 막기 위해 김근태 원내대표가 불출마를 선언했음에도 막판까지 ‘대리등록’을 시도했었다. 급격한 세대교체와 정 의장의 리더십에 대한 우려 때문이었다.

새 지도부 ‘연착륙’할까

그러나 후유증은 그리 오래가지 않을 것 같다. 한 중진 의원은 “견해차가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정치개혁을 하겠다고 기득권을 버리고 온 사람들인 만큼 다른 정당의 밥그릇 싸움과는 격을 달리한다”며 정 의장 체제에 힘을 실어줄 뜻을 분명히 했다. 정 의장 등 새 지도부는, 당내 여러 세력의 적극적인 지원을 요청하면서도 거기에 매달리기보다는 한나라당과 선명한 대립각을 세우는 등 외부와의 투쟁을 가속화하면서 구심력을 높여가는 방향으로 가닥을 잡은 것으로 알려졌다.

열린우리당은, 당 의장·상임중앙위원 선출대회가 흥행면에서는 성공하지 못했지만, 지지층 결집과 인지도 제고를 통해 정체됐던 지지율을 끌어올릴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정동영 효과’가 4·15 총선까지 위력을 발휘할지, 아니면 ‘언 발에 오줌 누기’ 정도의 미봉책에 그칠지 두고 볼 일이다.

김보협 기자 bhki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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