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재난 뒤에는 늘 희생자들의 안타까운 사연이 지면을 장식한다. 지난 8월8일 대구 무궁화열차 추돌 사고로 숨진 희생자 중에는 보충수업을 위해 열차에 몸을 실은 교사도 있었다. 방학 중에도 기차로 1시간 이상 걸리는 학교까지 가기 위해 “아침밥도 제대로 챙겨먹지 못한 채” 열차에 탄 교사의 사연은 그 지극한 제자 사랑과 함께 슬픈 여운을 남긴다.
보충수업의 끈질긴 생명력
“난 실패한 것 같아요.” 김나영(홍익대 건축학과 2학년)씨는 3년 전 자신이 겪은 일을 이렇게 회상한다. 1999년 고2 때 학교에서 갑자기 보충수업을 강행하자, 김씨는 “그냥 하기 싫어서” 보충수업을 거부했다. 보충수업 때 진도를 나가지 말아달라고 선생님에게 부탁했지만 매몰찬 거절만 돌아왔다. 교사인 김씨의 아버지가 도교육청에 탄원서를 내면서 ‘전쟁’이 시작됐다. “선생님들이 아이들에게 저에 대해 안 좋은 얘기를 하고, 나중에는 저한테도 별별 욕을 다 하셨어요.” 김씨는 학교 전체로부터 ‘왕따’가 됐다. 친한 친구들까지 등을 돌리고 혼자 걸어가면 등 뒤에서 수군대고…. ‘투쟁’의 상처는 컸다. 자신의 이야기가 나온 기사만 봐도 두려움에 떨었고 꾹꾹 참았다가 집에 가서 남몰래 울어야 했다. 그는 후배들에게 이런 조언을 남겼다. “저 같은 학생들은 앞으로도 계속 나올 수밖에 없어요. 전 그런 애들에게 특목고를 가든 검정고시를 치든 자기가 원하는 환경을 빨리 찾아가라고 말하고 싶어요.”
부산의 한 사립고 교사는 지난해 자신의 홈페이지에 ‘보충수업은 보충수입이다’라는 제목의 글을 올렸다. “수학과 여교사인 한 선생님은 겨울방학 보충수업을 앞두고 집에서 교과 주임교사의 전화를 받았다고 한다. 요지는 이번 방학 보충수업에서 빠져도 괜찮지 않겠냐는 내용이었다. 그런데 개학을 하고 학교에 갔을 때… ‘여교사는 이래서 책임감이 없다’는 말이 들려왔다. 어이가 없었다.… 여자교사들이 빠져주면 수업시간을 몰아서 맡을 수 있고 보수도 좋다.… 한 여교사는 6일 동안 하루에 1시간씩만 방송수업을 하러 나오라는 시간표를 받고는 항의했더니, 담당 교사가 ‘여선생님들 보충수업 하기 싫다 하면서도 사실은 돈 버는 거 좋아들 하시네’ 하며 돌아서더란다.” 이 교사에게 올해 상황은 나아졌는가를 묻자 달라진 것은 없다는 답신이 돌아왔다.
보충수업의 끈질긴 생명력은 경탄할 만하다. 정부는 1980년 전체 학생을 대상으로 하는 보충수업을 없애고 학습부진 학생들만 받도록 했으나 1988년에 다시 부활했다. 교육인적자원부(교육부)는 1999년부터 보충수업을 폐지하고 이를 특기적성교육으로 대체한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일부 학교에서 특기적성교육의 탈을 쓴 보충수업이 강행되면서 논란이 끊이지 않았다. 결국 교육부가 2002년 특기적성교육 시행을 각급 학교의 자율에 맡기는 ‘공교육 내실화 대책’을 내놓으면서, 보충수업이 다시 기지개를 폈다. 이제는 문제집을 풀고 진도를 나가는 ‘괴상한’ 특기적성교육이 자연스럽게 실시된다. 보충수업에는 오직 자녀의 일류대 입성에만 쏠려 있는 학부모들의 욕망, 학생들의 막연한 기대감, 학교장의 불타는 경쟁심, 박봉에 수업료가 쏠쏠한 ‘시간외 수당’이 되는 교사들의 처지 등이 줄줄이 엮여 있다. 즉, 보충수업은 오늘날 우리의 교육현실을 가장 잘 보여주는 단면이다.
학원도 심야 프로그램 개발?
서울 ㅅ고 이아무개군은 학교에서 보충수업을 강제로 시키니까 수업이 알차지 않다고 불평한다. “선생님에게 돈이 없어서 못 한다 했더니 돈 걱정은 하지 말래요. 담임이랑 엄청 싸웠어요.” 서울 ㄱ고 김아무개양은 “특기정석교육이라는 이름 아래 공식적으로는 신청을 받아서 희망자만 하는 거지만, 실제로는 담임선생님들이 압력을 넣는다”고 털어놓았다. 서울 ㅎ고 박아무개군 역시 동의서는 요식 행위에 불과할 뿐, 실제로는 보충수업을 강요당한다. 국·영·수는 문제집으로 복습하고 과학은 학기 진도를 나간다. “솔직히 방학 때 나오는 게 좋겠어요? 선생님들도 대부분 귀찮아하고 아이들도 졸고 떠들어요.”
보충수업 신청을 받아 자율적으로 시행하는 학교는 그래도 학생들의 거부감이 덜했다. “사교육 열기를 식힐 순 없지만, 그래도 필요하다고 봐요. 아쉬운 건 학원에서 더 하면 되고.”(서울 ㄷ고 2학년) 서울 오신고는 교사들의 회의를 거쳐 올해부터 희망자에 한해서만 과목을 선택해 보충수업을 받을 수 있도록 했다. 이 학교 한만주 교사는 “주변 학교들처럼 강제적 보충수업을 하는 학교는 갈수록 출석률이 떨어지고 수업의 질도 나쁜데, 우리 학교는 출석률도 좋고 학생들의 집중력도 높은 편이다”라고 말했다. 서울지역은 사립보다는 공립에서 자율적으로 보충수업을 실시하는 학교가 많아 상황이 좋은 편이다. 경쟁력 있는 학원이 즐비한 일부 강남지역에서는 아예 보충수업을 실시하지 않는 학교도 있다. 그러나 지방으로 내려가면 문제는 훨씬 심각해진다.
경북 ㅂ고 김아무개 교사의 증언은 지방의 실태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이 학교도 동의서를 받는 것은 지극히 형식적이고, 학생들이 일괄적으로 수업을 받도록 강제한다. 이 지역 학교들은 학기 중에는 보충수업과 자율학습으로 밤 10시까지 전교생을 학교에 잡아둔다. 10시가 되면, 학원 미니버스들이 교문 앞에 도열한다. 학교가 밤 10시가 돼야 끝나니, 학원들도 살 길을 찾아 ‘심야 프로그램’을 개발한 것이다. 학생들은 학원을 마치고 새벽 1시가 돼야 집으로 돌아올 수 있다. 김 교사도 학생들에게 선택권을 주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선생님들이 귀찮아해요. 문제집 하나만 선택하면 교재회사에서 교사용으로 따로 문제집을 주죠. 풀이가 너무 상세히 나와 있어서 안 보고 들어가도 수업을 진행할 수 있어요. 자율로 바뀌면 준비를 많이 해야 하니까.”그는 몇몇 선생님들은 수당을 받기 위해 정규수업을 줄이고 보충수업을 더 받기도 한다고 말했다.
대구 ㅅ고 정아무개 교사의 증언도 비슷했다. 이 학교는 밤늦게까지 학생들을 잡아두려면 감독 교사가 필요하기 때문에 금지돼 있는 자율학습비도 걷는다. 정 교사는 보충수업을 하면서도 “아이들에게 별 도움이 안 된다”고 솔직히 인정했다. “상위권이나 하위권 애들은 보충수업이 필요없어요. 그렇다면 중위권 학생들을 가르쳐야 하는데 편차가 심한 아이들을 다 모아놓으니 수업 효과가 떨어지죠.”정 교사는 보충수업에서 아이들을 관리해야 하는 교사의 고충도 털어놓았다. 휴식과 재충전을 해야 할 시기에 매일 담임 교사가 나와 학생들을 채근해야 하니 피로가 쌓인다는 것이다.
청소년 인권은 어디로 갔는가
지방 학교 대다수가 학생들에게 보충수업을 강요하고 있었다. 경기도의 한 고등학교는 한 학기당 250시간이나 보충수업을 강행하기도 했다. 지방 학교 선생님들은 보충수업이 사교육비를 절감시킨다는 생각에는 대부분 부정적 반응을 보였다. 교육부가 각 학교에 재량권을 넘기면서 경쟁적으로 보충수업 시간을 늘리는 문제도 지적됐다. 그러나 교육부 학교정책과 신호근 연구관은 “시수(시간 정도)를 국가에서 얘기한다는 것 자체가 문제다. 각 학교에서 문제를 보완해나가야 되는데, 예전으로 완전히 돌아가는 것처럼 알고 있다”고 말했다.
보충수업은 그동안 ‘열려라 참깨’ 같은 주문으로 여겨졌다. 일단 이 주문만 외우면 알리바바의 동굴처럼 온갖 보물로 가득 찬 일류대학의 문이 열릴 것으로 생각한다. 일부 학부모들은 자녀의 학교가 보충수업을 하지 않으면 불안에 떤다. 사교육 과열을 식힐 수 있다, 학원이 변변치 않은 지방 학생들을 위해선 어쩔 수 없다, 보충수업을 안 하면 학생들의 학업성취도가 떨어진다 등등 보충수업을 둘러싼 온갖 담론에는, 우리 교육에서 가장 중요한 한 가지 키워드가 빠져 있다. 청소년 인권. 왜 이 단어는 청소년헌장에만 외롭게 묶여 있는가.
<table><tr><td bgcolor="F6f6f6"><font size="2">
이슬아(중경고 2학년) 보라(‘하자’작업장 학교) 최정원(독산고 2학년) 김민지(독산고 2학년) 오정민(독산고 2학년) 곽호창(광문고 2학년) 겸(탈학교생) 박지형(면목고 1학년) 이한솔(미래산업 과학고 2학년) 마그마(‘하자’작업장 학교)
<font color="blue">▷청소년 기획위원은 주제 선정과 취재 전 과정에 참여합니다.
</font></font></td></tr></table>
유현산 기자 bretol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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