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업계 최고’라는 이름이 부끄럽지 않은 SBS노조 추혜선 간사, 그는 어떻게 ‘이 바닥’에 들어섰나
1987년, 서울지하철공사에 처음 노동조합이 설립됐을 때 그 노조에 ‘사환’으로 취업하기로 마음먹었다가 뜻을 이루지 못한 아픈 경험이 있는 나로서는 노동조합에서 일하는 ‘간사’들을 보는 눈이 애틋할 수밖에 없다. 사람들이 입을 모아 “업계 최고의 간사”라고 치켜세우는 이가 SBS노동조합 추혜선(34)씨다. “내 인생에는 이야깃거리가 전혀 없다”며 마다하는 추씨를 송영재 위원장의 ‘응원’에 힘입어 불러앉혔다.
광주항쟁과 사촌오빠
상투적으로 어릴 적 이야기부터 물었다. “전남 완도에서 태어나 중학교 3학년 때 광주로 나왔어요.” 우리 세대는 이 대목에서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물어봐야 하는 질문이 있다. “그럼 80년 5월에는 어디에 있었나요?”
“완도에서 초등학교 5학년에 다니고 있을 때였어요. 관광버스들이 잔뜩 세워져 있는 읍사무소 앞에 고등학생 오빠들이 교련복을 입고 모였어요. 오빠들이 싸우러 간다고 차에 올라타고 부모님들은 말리고…. 그 오빠들이 떠났다가 해남 어디에서 죽었다더라는 소문도 들리고…. 전남대에서 학생회 간부를 하던 사촌오빠가 광주에서 완도까지 걸어걸어 피신을 왔어요. 밭에 싸놓은 짚더미를 파고 오빠를 숨겨주었어요. 정보과 형사들이 집에 들락거리는 와중에도 엄마가 몰래 밥을 해다 줬지요. 그 오빠가 짬 날 때마다 왜 광주항쟁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는지 얘기해줬어요. 최규하·전두환 이름도 그때 들었어요. 학교에 가서 친구들한테 그 얘기를 해주면 아이들은 내 주위에 모여 눈을 동그랗게 뜨고 듣곤 했어요. 선생님한테 들켜서 ‘다음부터 그런 얘기하면 혼난다’고 야단도 맞았지요. 그때부터 교과서를 믿지 못했고, 의심 많아지고, 감수성 예민해지고…. 한창 그럴 나이인데 서정주를 좋아할 수 없었어요. 김지하를 좋아하게 되고…. 내 삶에 영향을 미친 최초의 기억은 그거예요. 대통령이 되는 사람의 과거가 이렇게 살인도 하고 그럴 수 있는 것이로구나. 뭔가에 집착하고 매몰되는 심성은 그때 생겼을 거예요. 병원에서 치료를 받아야 할 만큼 사춘기를 유난히 심하게 앓은 것은 그 때문이었을 거예요. 80년 5월 광주에 대해서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겠어요.”
이야기를 들으면서 나는 영화 의 소녀가 생각나 눈앞이 자꾸 흐려졌다. 추씨가 세상을 바라보는 진보의 뿌리는 그렇게 깊었다. 광주에 와서 중·고등학교를 다니면서 민족문학작가회의가 주최하는 백일장에서 상도 타고 그랬다는 얘기를 하다가 추씨는 거의 짜증을 냈다. “이런 얘기 계속해야 돼요 나는 제대로 살지 못했어요. 별로 깊이 있게 살지 못했다고요. 돌아보면 아픔과 후회만 많고….” 내가 그냥 중요한 대목만 짚어달라고 했더니 “진작 말해주지 그랬어요. 나는 또 모두 자세히 얘기해야 되는 줄 알았잖아요. 어쭙잖은 대학 얘기는 빼지요”라고 말하더니 자신의 궤적을 일사천리로 짚었다.
제대로 된 노동소설을 하나 쓸 수 있겠다는 생각으로 청바지공장에서 시다 생활을 했다. 민족문학작가회의 문학교실에도 다녔다. 아이 하나를 데리고 매번 늦게 와서 추씨와 함께 뒷자리에 앉던 여인이 한 사람 있었다. 자신의 이야기를 글로 써서 사람들을 울리곤 했던 그 ‘아람이 엄마’가 바로 공선옥씨다. 공선옥씨는 창비에 소설을 발표했고, 추씨는 에 시를 발표했다.
“나는 왜 그런 전투력이 생기지 않는지…”
사회과학 출판사에도 다녔고,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 간사 일도 했다. 지금 하라면 신명나게 잘 할 수 있는 일들이었지만 그때는 어린 나이에 하기에 너무 힘든 일들이었다. “윤정모 선생님이 황새울에 사실 때였어요. 가끔 사무실에 나오시면 깔판 밑에 지폐 몇장을 넣어주시면서 따뜻한 먹을 거라도 사먹으라고 말씀해주시고, 유기농으로 재배한 콩을 한줌씩 쥐어주기도 하셨어요.”
추씨의 자취방에 모여 사람들과 함께 학습을 하면서 고민은 더욱 깊어졌다. “뭔가 열정은 가슴에 가득 차 있는데 풀리지 않았어요. 진보적인 문학활동을 하는 사람들이나 노동현장 사람들을 만나면 죽고 싶을 정도로 고민이 됐어요. 나는 왜 이렇게 길 잃은 아이처럼 서성거려야 하는가. 그 사람들의 눈은 이글이글 타오르는데 나에게는 왜 그런 전투력이 생기지 않는가. 나는 구조가 잘못된 인간이 아닌가….”
그는 다시 이야기를 멈췄다. “이렇게 시시콜콜 다 들어야 해요 아유, 진짜 얘기하기 싫어 죽겠네.” 내가 “언론노조에 오기까지 들으려면 아직 멀었냐?”고 했더니 “아직 멀었다”고 했다. 아, 추혜선씨의 삶에 비하면 나의 삶은 얼마나 단조로운가.
어느 날 버스 안에서 급성 위궤양으로 쓰러져 광주 집으로 내려갔다. 사무전문직 노동운동에 대해 고민하는 사람들, 진보정당운동을 하는 사람들과 어울리다가 광주 KBS노동조합에 간사로 들어갔다. 노보를 처음 만들고, 지부장 대회활동을 돕고, 서울에 출장 가 있는 날이 많은 지부장을 대신해 광주전남언론사노조협의회에 참석하기도 했다.
결혼을 하고 큰 아이를 낳았지만 결국 남편과 헤어졌다. “이혼한 얘기 기사에 써도 될까요?” “쓰세요. 아픈 만큼 성숙해진다잖아요.” 물어본 사람이 참 바보 같다.
강원도 속초에서 지역신문사 기자로 일하기도 했다. 특종을 하는 짜릿함도 몇번 느껴봤다. 지역 유지들로부터 “속초에서 살지 못하게 하겠다. 어디서 개뼈다귀 같은 게 굴러들어와서 말썽이냐?”고 협박을 받고 “지금 계속해보겠다는 거예요?”라고 맞받아치며 싸우기도 했다. 퇴근 뒤에는 공립도서관에 가서 그때 신설된 지방행정고시 준비를 했는데 도서관에서 좋은 자리를 놓고 쟁탈전을 벌이던 남자가 지금의 남편이다.
SBS노조에 사람이 급히 필요하다면서 언론노조연맹 최문순 위원장을 비롯한 몇 사람이 등을 떠밀었다. 본인은 얼떨결에 왔다지만 추씨야말로 ‘준비된 간사’였다. 당시 SBS노조는 오기현 위원장이 황무지에 깃발을 꽂고 “나를 따르라” 하던 분위기였는데, 위원장과 함께 ‘발에 걸리는 일’들을 정말 신나게 했다. 평소 말이 없던 ‘점잖고 깐깐한’ PD 오기현 위원장은 퇴임식에서 “추 간사가 없었으면 힘들었을 것입니다”라고 지나가는 말처럼 한마디 했다. ‘아, 저 사람이 나를 그렇게 생각했었구나.’ 추씨는 감격했다.
이야기 도중에 김혜리 전 부위원장이 전화를 했다. “추 간사에 대해 기탄 없이 말해보세요”라고 졸랐다. “몸을 돌보지 않고 너무 많이 일해서 주변 사람들이 걱정하고 있어요. 너무 정열적인 여성이에요”라고 칭찬하던 김씨는 “인터뷰해서 신문에 났다가 혹시 다른 곳으로 스카우트되는 거는 아니지요?”라고 걱정한다.
위원장보다 간사를 더 많이 찾는다
SBS노조는 언론사 최초로 여성 부위원장 제도를 도입했다. 아직도 여러 가지로 불리한 지위에 있는 여성들을 조직할 수 있었던 일을 생각하면 추씨는 가슴이 뿌듯해진다. 언론사 노조 간사들의 모임을 적극적으로 꾸리는 사람도 그다.
“우리 노조 위원장님과 사무국장님은 ‘언론사 간사노조 만들어서 추 간사가 위원장 해라’ 그래요. 우리 노조 분위기가 그래요. 건강한 노조라고 자부해요. 아직 언론 산별노조에 들어가지 못했지만 그것이 윤리성의 잣대가 될 수는 없다고 봐요. 조금 덜 정치적일 뿐이지 원칙을 저버리고 손가락질당할 만한 일을 한 적은 없어요. 간사가 며칠 힘들게 일하면 ‘제발 좀 쉬라’고 얘기해주는 이런 노조 없어요. 당연히 SBS 노동조합사에 부끄럽지 않는 사람으로 남을 수 있도록 노력해야지요”라고 말하는 추씨의 눈가가 촉촉이 젖는다.
SBS노조 송영재 위원장에게 “간사가 너무 일을 많이 하니까 위원장으로서 불편한 점은 없느냐?”고 짐짓 물었다. 송 위원장은 펄쩍 뛴다.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SBS노조 출발했을 때부터 거의 모든 일을 함께 해온 사람이에요. 여성 조합원들이 위원장한테는 하지 않는 이야기를 추 간사한테는 와서 다 말합니다. 그런데 요즘은 젊은 남자 조합원들까지 나보다 추 간사를 더 찾는 거 같아요. 하하.”
추씨는 “노동운동도 사람 살아가는 현장에서 하는 것이기 때문에 따뜻한 마음씨를 지녀야 성공할 수 있다는 아마추어 같은 생각을 버리지 않고 싶다”고 했다. 요즘도 다른 노조 위원장들을 만나면 “간사 건강검진 해주고 있나요?”라고 따져 묻는 추씨는 마음이 따뜻한 진짜 노동자다.
하종강 | 한울노동문제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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