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정원 충북지부의 여교사 프락치 공작… 간첩단 조작 기도의 진상 규명해야
지난 7월 초 충북 청주의 한 맥주집. 괴산 ㅊ초등학교 이아무개(26) 교사는 ‘오빠’를 두 번째 만났다. “너, 박응용 그 사람이 간첩인 것을 알고 있느냐?” 이씨는 깜짝 놀랐다. ‘아저씨가 간첩이라니…’ 앞자리에 앉은 ‘오빠’는 국가정보원 충북지부 직원이었다. “너를 어떻게 빼줄 수 있을까를 상사와 상의했는데 ‘새아침노동청년회’(새노청)의 강령과 결의문을 네가 가져오는 거야.” 이씨는 얼떨결에 대답했다. “버리라고 그래서 버려서 강령하고 결의문은 없어요. 그걸 낭독하고 다 태우기로 해서 나도 버렸어요.” 이 말이 실수였다. “하나 정도는 남겨뒀을 거야. 컴퓨터나 사무실 어딘가에 한장쯤은 있을테니 찾아봐. 그것을 가지고 와서 상사한테 보여줘야 네가 빠질 수 있어.”
집안 친분 이용해 3개월 동안 활동 강요
국정원 충북지부가 노동단체의 이적성 여부를 수사하면서 현직 여교사한테 지난 3개월 동안 ‘프락치’ 활동을 강요한 사실이 여교사의 폭로로 드러났다. 국가보안법 폐지 국민연대, 민주노총 등은 지난 9월28일 서울 향린교회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프락치 활동을 강요당한 이씨의 증언을 공개하며 “국정원은 청주지역 간첩단 조작사건을 즉각 중단하라”고 요구했다. 청주의 노동·사회·종교 단체들도 간첩사건 조작에 대한 국정원의 해명과 책임자 처벌을 촉구하고 있다. 이에 대해 국정원 충북지부는 “간첩사건 조작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이씨한테 자료 협조를 요청한 적은 있으나 협박이나 인권침해 사실은 전혀 없다”고 밝혔다.
지난 9월28일 밤 10시께 충북 괴산군 장연면. 한밤중에 검은 모자를 깊게 눌러 쓰고 나타난 이씨는 예상과 달리 쾌활했다. “저는 힘들어도 웃어요. 그때도 고통스럽고 힘들어서 웃었는데 오빠가 그걸 잘못 이해했나 봐요.” 그러면서 그는 지난 석달 동안 겪은 일과 심적 고통을 털어놓았다. 자신한테 프락치 활동을 강요했던 국정원 직원을 여전히 ‘오빠’라고 불렀다.
지난 6월 중순께 이씨는 큰언니한테서 전화를 받았다. “국정원에 일하는 OO오빠가 너를 보자고 한다. 너 혹시 찔리는 것 없니?” 이씨도 국정원 충북지부 직원인 박아무개(42)씨의 이름을 자주 들었다. 괴산군 장연면의 같은 마을 출신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이 차가 커 잘 아는 사이는 아니었다. 이들의 집안은 할아버지 때부터 친분이 두터웠고 이씨의 큰언니와 박씨의 부인도 친구 사이였다. 언니는 전교조에 대한 얘기를 꺼냈지만 이씨는 전교조 활동 때문에 만나자는 게 아닐 것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그 이유가 궁금해 만날 의향이 있다고 전했다. 6월 말 언니와 박씨가 이씨가 근무하는 학교로 찾아왔다. 이씨는 언니한테 잠깐 자리를 비켜달라고 부탁한 뒤 박씨와 이야기를 시작했다.
“네가 대학다닐 때 학생운동을 했다는 것을 알고 있다. 명선이(이씨의 대학 동기로 학생운동을 하다 수배를 받았음)를 자주 만나고 돈도 입금했던 사실도 알고 있다. 지금 가장 큰 문제가 되는 것은 ‘새노청’이다. 네가 부회장인 것으로 알고 있는데 너는 아닌 것 같다. 너를 구해야 되겠는 데 어떤 방법을 쓸까 고민하다, 내가 어떻게 막아줄 재간이 없어 지금 이렇게 왔다. 마음을 고쳐 먹어라.” 그리고 박씨는 “다음에 다시 만나 자세하게 얘기를 하자”고 했다고 한다.
새아침노동청년회는 노동운동가인 박응용(36)씨의 주도로 지난 98년 10월 만들어졌다가 99년 6월께 해산한 청주의 노동단체. 회원은 10명이었다. 박씨는 한국타이어노조 민주화투쟁 등 이 지역에서 노동운동을 하다 95년 수배됐다가 99년 7월 수배해제됐다. 모임은 노동자의 통일운동을 활성화시키자는 데 목적을 뒀다. 새노청 회원들은 모임을 만들고 이 지역의 다른 시민·사회단체에도 알렸다. 비공개 모임이 아니었다.
해산한 공개 노동단체를 간첩단으로 규정
국정원 충북지부의 박아무개씨는 이씨를 찾아간 이유를 이렇게 설명한다. “4월7일 대공상담소로 98년에 결성된 새노청이 공개활동으로 여성노조와 건설노조를 설립해 활동하고 있다는 신고가 들어왔다. 박응용씨가 새노청에서 중심 역할을 하고 대공 용의점이 많다는 내용도 있었다. 담당수사관이 되어 내사를 계속했는데 이씨의 이름이 나와 깜짝 놀랐다. 동명이인으로 알았는데 신원자료를 보니까 바로 이웃에 사는 후배였다. 고민을 하다 혐의 내용을 풀려면 만나봐야 되겠다고 판단하고, 오해의 소지를 없애기 위해 이씨의 큰언니와 함께 학교에 찾아갔다.”
박씨는 이씨를 처음 만나서 “청주에 오면 연락을 달라”고 하며 헤어졌다. 일주일 뒤에 이씨가 전화를 걸어 청주의 한 맥주집에서 2차 만남이 이뤄졌다.
박씨는 “대공상담소에 신고된 내용과 내가 내사한 내용을 말하니 이씨가 다 수긍했다. 강령이나 규약이 있었냐고 물으니 ‘낭독하고 태워버렸다’고 했고, 조직 내에 한부가 남아 있을지 모르니 협조할 수 없겠느냐고 하니 이씨가 ‘해보겠다’고 말했다”고 해명했다. 즉 이씨가 국정원의 수사에 협조하겠다는 뜻을 밝혔다는 설명이다. 그러나 이씨는 “처음부터 ‘어렵다. 못하겠다’고 말했고, ‘노력해 볼게요’라고는 했지만 ‘할게요’라고 한 적은 없다”고 말한다.
이날 만남에서부터 이씨는 프락치 활동을 요구받는다. “아저씨(박응용씨)를 간첩이라고 해 왜 간첩이라 생각하느냐고 물었죠. 그랬더니 여러 가지 이유를 댔어요. 아저씨가 전에 탄광에서 일했는데 탄광 근처의 다리가 폭파된 일이 있다면서 아저씨가 했을 것 같다고 했고, 어느 날 아저씨가 불현 듯 사라졌는데 사라진 지점이 서해쪽이라고 했어요. 그리고 또 대학생들이 어떤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데 아저씨가 방법을 알아 오겠다고 홀연히 사라졌다 나타나 다른 사람들이 미처 생각하지 못한 방법을 제시했대요. 그런데 며칠 뒤에 북한 방송에서 그 문제를 놓고 똑같은 방법과 지침을 얘기했대요.” 2남1녀인 박응용씨의 아이 이름들까지 거론했다고 한다. ‘인해’는 ‘인민해방’을 뜻하고 ‘인성’의 ‘성’자는 ‘김일성’의 ‘성’자와 같고, ‘인홍’의 ‘홍’자는 붉은 색깔 즉 공산주의를 뜻한다는 설명이었다. 국정원 수사의 타깃은 박응용씨였다.
“오빠는 간첩 활동을 하는 아저씨로 인해 주변 사람들이 피해를 보기 때문에 안타깝다고 했죠. 그 중 하나가 바로 저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새노청에 강령과 결의문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면서 저한테 찾아오라고 했습니다. 그것을 보면 아저씨의 사상이 드러난다고. 이런 얘기도 했어요. ‘이렇게 만난 것을 상사와 나, 너 3명의 비밀로 하자. 무덤까지 비밀로 가져가자’고.”
98년 10월 새노청 회원들이 발족식을 마치고 태운 문건이 있었다. 당시 회원들은 그게 ‘회칙’과 ‘결의문’이었다고 말한다. 박응용씨는 “당시 모임을 마치면서 한 사람씩 돌아가면서 자기 소망을 적어 낭독했다”며 “‘무시당하는 사람이 없으면 좋겠다’거나 ‘노조가 없는 곳에 노조가 생기면 좋겠다’는 등의 내용이 쓰여 있었다”고 말했다. 회칙에는 회비나 회원자격, 회장 선출 방법 등을 담고 있었다. 당시 범민족대회에 참석했다는 이유로 3명이 해고된 상태여서 “괜히 쓸데없이 빌미를 만들지 말자”며 태웠다는 설명이다. 강령이나 규약은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씨는 “강령이나 결의문이 없다는 뜻을 전달하기 위해 낭독하고 태워버렸다고 말했다”고 전했다. 그는 당시 늦게 도착해 다른 사람이 읽은 것을 그냥 쓰레기통에 버렸다고 한다.
“양심을 지키기 위해 죽음까지도 생각했다”
여름방학이 끝난 8월 어느 날 이씨는 다시 박씨를 만났다. 박씨는 여전히 강령과 결의문을 찾아오라고 요구했다. 그날 밤, 이씨는 박씨의 집을 직접 찾아갔다. “양심이 허락하지 않고 아저씨가 강령과 결의문을 저한테 준다고 하더라도 오빠한테 가져다 주지 못할 것 같다고 했어요. 못하겠다고 하니 오빠가 ‘마음을 돌려 먹으라’고 말했죠. 그래서 제가 다시는 이런 일을 하지 않겠다고 서약서나 진술서를 쓰면 안 되겠냐고 물으니 오빠가 ‘안 된다’고 했습니다.” 이씨는 거의 절망 상태였다. “제가 사라져도 가족들이 피해를 보냐고 오빠한테 물었죠. 처음에는 ‘사라진다’는 말의 의미를 못 알아 듣더라고요. 그런데 제 조카 얘기를 하면서 ‘조카도 나중에 커서 대학에도 가고 취직도 할 것이다. 하고 싶은 일도 있을 것이고. 그러면 시험도 보게 될 텐데 그때 자신도 모르는 이유로 떨어진다’고 하더군요. 제가 죽어도, 저희 가족 심지어 조카한테까지 피해가 간다고 생각하니 모든 희망이 사라졌어요.” 그러나 그 순간부터 이씨는 자신에 대해 질문했다. ‘나는 왜 이렇게 끌려다녀야 하는가? 내가 진 죄가 그렇게 크나?’
그는 대학 때의 친구와 선배를 찾아갔다. “아저씨에 대해 확인하고 싶었어요. 정말 간첩일까? 그런 생각으로 얘기를 꺼냈는데 선배 언니가 “‘너, 그거 이용당하는 거야’라고 했어요.” 그때까지도 이씨는 자신이 ‘프락치’ 활동을 강요받고 있다는 것을 의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동네 오빠가 자신을 도와주고 있다는 생각뿐이었다. 대학 선배는 새노청 회원들한테 알리거나 인권단체에 신고하는 방법을 권했다.
그러던 참인 지난 9월3일 다시 박씨한테 학교로 전화가 왔다. 다른 국정원 직원과 함께 박씨가 교문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제가 못하겠다고 하니 ‘그러면 아버지를 내가 만날까? 내 말에 설득이 안 되면 너를 설득할 사람은 아버지밖에 없다’고 그래요. 옆에 있던 사람은 공직에 있는 외삼촌과 이모부를 거론하면서 ‘그 사람들한테 얘기를 해야겠다’고 하고 ‘5년 정도 살고 나오면 후회하겠지’라고 말했습니다. 아빠한테 얘기한다고 하니 기가 막히고, 걱정도 되고, 힘들어하실 것 생각하니 기운이 빠지고 헛웃음이 막 나왔어요.” 아버지한테 알리겠다는 말이 이씨한테는 가장 큰 충격이었다고 한다. 그의 외삼촌과 이모부는 각각 청와대와 국정원에 근무했다. 이에 대해 국정원 박아무개씨는 “가족관계를 보더라도 더욱 협조를 해야 되지 않겠느냐는 뜻에서 말했다”고 해명한다.
학교에서 헤어지고 난 다음 박씨는 다시 전화를 걸어 “일주일 시간을 줄테니 다시 한번 생각해 보라”고 했다. 그러나 이씨는 9월9일 옛 새노청 회원 5명한테 그동안 겪은 일을 털어놓았다. 또 9월14일 박씨와의 마지막 전화 통화를 직접 녹음했다. 이날 녹음된 박씨의 말 가운데는 “어떻게 해서든지 설득하라고 그렇게 지시가 떨어졌어. 집안의 외삼촌부터 여러 가지 가족관계를 봐서도”라는 대목, 이씨가 박응용씨가 간첩이 아닌 것 같다고 하자 “내 말을 믿어봐 한번 긴지 아닌지.” 등이 포함돼 있다.
국정원은 이씨한테 프락치 활동을 강요하면서 정말 간첩사건을 터뜨릴 준비를 하고 있었을까. 이씨는 “오빠가 ‘추석 이후에 사건을 터뜨릴 생각이다. 지금 모든 사건들이 다 정리되어 있다. 결제만 받으면 된다’고 말했다”고 전했다. 물론 국정원은 이를 부인한다. 국정원 충북지부의 한 직원은 “새노청이 급진적이지만 대공 용의점은 없는 것으로 보여 본격적인 수사를 하지 않은 상태였다”며 “이씨가 협조해 준다고 해 담당 수사관이 혼자 오버한 것 같다”고 말했다. 일반적으로 수사를 할 때 어느 정도 증거가 확보되면 팀을 구성해 본격적인 수사를 벌이지만 이번 사건은 개인적인 내사단계였다는 설명이다.
“개인적인 내사단계 활동이었을 뿐이다”
담당 수사관이던 박씨는 “동네 후배이고 집안간에 잘 알아서 믿고 여러 가지 말을 했는데 그게 오히려 문제가 됐다”며 “본인은 아니겠지만 내 입장에서는 후배한테 배신을 당한 것 같다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고 덧붙였다. 국정원 충북지부도 “이씨를 협박하거나 인권을 침해한 사실은 전혀 없었다”고 했다. 그러나 이는 설득력이 없다. 이씨는 프락치 활동을 강요받으며 죽음까지도 생각할 정도로 정신적인 고통을 겪었다.
“너무 가까운 사이여서 더 힘들어요. 피가 섞이지 않았을 뿐 그렇게 가까운 사이인데 어떻게 저를 괴롭힐 수 있었을까? 제가 그렇게 힘들어 했었는데….” 취재진을 만나는 동안에도 이씨의 휴대폰이 자주 울렸다. 가족한테 온 전화였다. 그의 표정은 곧 심각해졌다.
박응용씨는 “나를 간첩으로 몰아 잡아가려면 나를 직접 잡아가 조사를 하지 왜 다른 사람한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주느냐”며 “국정원의 프락치 공작과 간첩 조작 기도에 대한 철저한 진상규명이 이뤄져야 한다”고 말했다.
황상철 기자rosebu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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