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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익소송 ‘패소자 부담’에 이의 있습니다

승소 땐 사회 전체 이익, 패소하면 원고만 막중한 부담차별받은 장애인·국가범죄 피해자에게도 소송비용 떠넘겨
등록 2022-10-30 01:22 수정 2022-10-31 13:21
2014년 12월, 핵발전과 자신의 암 발병 연관성을 따졌다가 패소한 이진섭씨가 아들과 함께 부산 기장군 고리핵발전소 앞에 서 있다. 한겨레 자료

2014년 12월, 핵발전과 자신의 암 발병 연관성을 따졌다가 패소한 이진섭씨가 아들과 함께 부산 기장군 고리핵발전소 앞에 서 있다. 한겨레 자료

“돈 없으면 소송도 못하는 건가.”

부산시 기장군 고리핵발전소 인근에 20년 동안 살아온 이진섭씨는 2011년 대장암 진단을 받았다. 2012년 2월엔 아내 박금선씨가 갑상샘암 진단을 받았다. 이씨의 아들은 태어날 때부터 자폐성 장애가 있었다. 마을 주민 가운데 암에 걸린 사람이 많다는 사실도 알게 됐다. 이씨는 의문을 갖기 시작했다. 이런 질병과 장애가 원전과 아무런 관련이 없을까. 2012년 7월 이씨 가족 3명은 부산지방법원에 원전 운영 사업자인 한국수력원자력(한수원)을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냈다.

2014년 부산지법은 “한수원은 원고 중 박금선씨에게 1500만원의 위자료를 지급하라”며 원고 일부 승소 판결을 내렸다. 그러나 항소심 재판부의 판단은 달랐다. 2019년 부산고법은 이씨 가족의 발병 원인이라고 판단할 만한 연구 결과가 부족하다며 한수원의 배상책임은 없다고 판결했다. 이듬해 이 판결은 대법원에서 확정됐다.

원전의 질병 책임 따진 기초수급자에게 2322만원 청구

이씨에게 돌아온 건 패소, 그뿐이 아니었다. 한수원은 이씨와 아내, 아들 3명에게 각 774만원씩, 총 2322만원을 내라는 내용증명을 보내왔다. 패소자 부담주의 원칙에 따라 한수원이 소송을 위해 지급한 변호사 보수, 인지대, 송달료 등의 비용을 이씨가 내라는 요구였다.

기초생활수급자인 이씨 가족은 2322만원을 부담할 형편이 안 된다. 낼 이유도 없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시간이 흘렀고 한수원은 최근 세 번째 내용증명을 보내왔다. 이진섭씨는 말한다. “그저 원전이 암이나 장애 발병에 영향을 미쳤는지 알고 싶었다. 우리 가족뿐 아니라 원전 인근에 사는 모든 주민을 위한 것이라 믿었다. 영향이 있으면 있다, 없으면 없다고 대답해주면 그만 아닌가. 그런데 그 질문 한번 했다고 공기업인 한수원의 소송비용까지 내라고 하는 것은 부당하다. 게다가 1급 장애인인 우리 아들에게도 소송비용을 내라는데, 부당하다고 생각한다.”

전동휠체어를 이용하는 장아무개씨와 전아무개씨는 열차와 승강장 사이에 휠체어 앞바퀴가 걸리면서 몸이 튕겨 나가 다쳤다. 이들은 지하철 차량과 승강장 사이 간격이 넓어 장애인의 이용에 큰 위험을 초래한다며 2019년 7월 서울교통공사를 상대로 ‘지하철 단차 차별구제 청구소송’을 제기했다. 법원은 승강장의 높낮이 차이로 장애인이 지하철을 이용하지 못하는 것은 차별행위라고 인정했지만, 서울교통공사가 이를 시정하는 데엔 현실적인 어려움이 있다며 원고 패소 판결했다. 이후 승소가 확정된 서울교통공사는 원고 1명당 각 500만원씩 소송비용을 지급하라고 요구했다. 장씨와 전씨는 “공익소송의 예외를 인정하지 않고 변호사 비용을 패소자에게 부담하게 한 민사소송법은 위헌”이라며 헌법소원을 냈다. 민사소송법 제98조는 ‘소송비용은 패소한 당사자가 부담한다’고 규정한다. 무분별한 소송 제기를 막자는 취지다. 이씨와 정씨, 전씨가 ‘공익’을 위해 소송을 제기하고도 패소했단 이유로 상대방의 소송비용까지 물어내야 하는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다. 소송비용에는 변호사 보수와 재판 수수료인 인지대, 소송 서류 작성료, 기일에 출석하기 위한 여비·일당·숙박료 등이 포함된다. 1990년 민사소송법이 개정된 뒤 변호사 보수를 소송비용에 포함하면서, 패소자가 부담해야 할 금액이 훨씬 커졌다.

국무총리실의 민간인 불법사찰 피해자인 김종익씨가 2010년 7월 검찰 조사를 받기 위해 서울중앙지검에 들어가고 있다. 한겨레 자료

국무총리실의 민간인 불법사찰 피해자인 김종익씨가 2010년 7월 검찰 조사를 받기 위해 서울중앙지검에 들어가고 있다. 한겨레 자료

변호사 보수, 인지대, 재판 출석 비용까지

특히 공익소송에서 패소하면 소송비용을 무는 상황이 이어지면서 공익소송이 위축되리라는 우려가 나온다. 민사소송법에 패소자 부담주의의 예외 규정을 신설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커지고 있다. 공익소송의 경우엔, 패소하더라도 소송비용을 면제 또는 감면할 수 있도록 하자는 것이다.

참여연대는 2022년 10월26일 ‘공익소송 서명 캠페인’ 누리집(00sosong.kr)을 개설하고 대국민 서명운동을 시작했다. “국회 법제사법위원회는 공익소송 패소자 부담주의 제도 개선 법안을 즉각 논의하고 통과시켜야 한다”는 내용이다.

박호균 변호사(대한변호사협회 공익소송 패소자 부담 제도개선TF 위원)는 “패소자 부담주의는 공익소송의 제기 자체를 주저하게 하는 큰 요인으로 작용한다고 봐야 한다”며 “공익소송은 승패와 무관하게 문제 제기 자체로 잘못된 악습이나 제도에 개선 기회를 제공한다는 측면에서 우리 사회에 긍정적 기능을 함에도, 패소했다고 일률적으로 경제적 제재를 가하는 소송비용 제도는 시급히 개선될 필요성이 있다”고 말했다.

실제로 패소했을 때 소송비용을 떠안아야 하는 문제를 걱정해 항소를 포기한 사례도 있다. 2015년 전남 신안군 염전에서 임금 체납과 감금으로 혹사당한 지체장애인 8명은 국가와 신안군, 완도군에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제기했다. 1심 법원은 피해자 8명 중 1명에게만 일부 승소 판결을 내렸다. 그러자 신안군은 패소자 7명에게 소송비용 700만원을 청구했다. 결국 패소한 7명 가운데 4명은 항소를 포기했다. 상급심으로 갈수록 패소했을 때 떠안아야 할 소송비용이 더 커지기 때문이다. 다행히 항소를 제기한 피해자 3명은 승소했다. 소송비용 때문에 항소를 포기하지 않았더라면 나머지 4명의 1심 결과도 뒤집힐 수 있었던 셈이다.

참여연대는 2022년 10월26일 ‘공익소송 서명 캠페인’ 누리집(00sosong.kr)을 개설하고 대국민 서명운동을 시작했다. 누리집 갈무리

참여연대는 2022년 10월26일 ‘공익소송 서명 캠페인’ 누리집(00sosong.kr)을 개설하고 대국민 서명운동을 시작했다. 누리집 갈무리

강제집행·가압류·지연이자… “매일 두렵다”

패소자 부담주의는 국가범죄의 피해자에게도 소송비용을 전가한다. 김종익씨는 2010년 6월 드러난 ‘총리실 민간인 사찰 사건’의 피해자다. 김씨는 2008년 미국산 쇠고기 수입 반대 촛불시위 당시 자신의 블로그에 이명박(MB) 정부를 풍자한 동영상을 올렸다가 국무총리실 공직윤리지원관실에 사찰당해 재직하던 직장의 대표직을 강제로 내려놓아야 했다. 김씨는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냈고 2016년 대법원에서 김씨가 청구한 금액 중 20%의 배상금 1억여원이 확정됐다.

그 뒤 4년이 지난 2020년 7월, 국무총리실이 김씨 앞으로 공문을 보내왔다. 총리실은 김씨에게 ‘소송비용액 확정 결정에 따라 소송비용의 상환을 요청한다’며 총 2521만921원을 납부하라고 했다. 대법원 판결에서 인정된 20%의 배상금을 제외한 80%의 청구 금액에 대한 소송비용을 원고인 김씨가 부담하라는 취지였다.

김씨는 아직 국가의 사과도 받지 못했다. 그는 “국가권력 사찰 피해자에게 소송비용을 부담하게 하는 것이 옳은지 의문”이라고 말했다. “이후 총리실에서 별다른 연락은 없는데 어느 날 갑자기 강제집행·가압류를 하거나 지연이자를 붙이는 것은 아닌지 매일 두렵다.”

공익소송의 경우 원고와 피고 간 소송비용에 차이가 있다는 점을 지적하는 목소리도 나온다. 정제형 재단법인 동천 변호사는 “공익소송의 경우에는 의뢰인의 사회·경제적 어려움을 고려해 변호인이 보수 없이 무료변론 형태로 사건을 수임하거나 통상 보수보다 적은 금액으로 수임하는 경우가 많다”며 “원고가 승소하는 경우라도 상대방에게 청구할 변호사 보수 비용이 없거나 적다는 점에서 공평의 관점에 따른 특별한 배려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앞서 양정숙 무소속 의원(2020년 7월)과 박주민 더불어민주당 의원(2022년 6월)은 공익소송의 경우 패소하더라도 소송비용을 전부 또는 일부 면제해주는 내용을 담은 민사소송법, ‘국가를 당사자로 하는 소송에 관한 법률’ 개정안을 대표 발의하기도 했다.

양 의원이 발의한 개정안은 ‘사건의 공익성, 소송의 경위와 패소 사유, 패소한 당사자의 사정 등 대법원 규칙으로 정하는 사유가 있는 경우’엔 패소자가 소송비용을 부담하지 않게 하는 단서조항을 신설했다. 박 의원이 발의한 개정안은 공익성에 대해 ‘인권, 국민의 건강과 안전, 환경, 소비자의 이익, 공정한 경쟁 및 이에 준하는 공공의 이익을 침해하는 행위에 관한 사건’이라고 구체적인 공익소송 기준을 신설했다. 다만 ‘해당 사건에 대한 소의 제기가 소권의 남용에 해당하는 것이 명백하다고 인정되는 경우에는 그러하지 아니하다’고 단서를 달았다.

민소법 개정안 발의… 외국은 보호 장치 갖춰

이에 대해 참여연대 이지은 간사는 “국가를 당사자로 하는 소송에서 공익성이 인정되는 경우 소송비용을 면제하거나 일부 감면할 수 있는 근거를 법률에 신설하는 내용의 발의안은 긍정적이지만, 면제 또는 감면 기준을 대통령령에 위임한 양정숙 의원 발의안보다는 필요성이 큰 사건의 유형을 구체적으로 나눠 기준을 제시한 박주민 의원 발의안이 더 적절해 보인다”고 말했다.

이미 외국에서는 공익소송을 제기한 당사자가 패소했을 때 소송비용을 면제받을 수 있는 제도가 마련돼 있다. 미국에서는 공익소송 원고가 승소한 경우엔 패소자에게 변호사 보수를 청구할 수 있는 반면, 원고가 패소하면 상대방의 변호사 보수를 부담하지 않도록 하는 ‘편면적 패소자 부담주의’를 택하고 있다. 단 악의적인 제소나 소송을 남용한 경우에는 패소한 원고에게도 변호사 보수를 부담시킬 수 있도록 했다. 영국은 ‘보호적 비용명령’ 제도를 채택하고 있다. 이는 법원의 재량으로 내리는 명령으로, 원고가 패소한 경우 소송비용 지급 의무를 면제하거나, 원고가 내야 하는 소송비용의 상한을 설정하는 제도다. 일본에선 재판비용은 패소자가 부담한다는 규정이 있지만 변호사 보수는 각자 부담한다.

신지민 기자 godjimi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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