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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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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해자는 날아다니는데 기어다니는 수사기관

성폭력 사건 증거 조작하고 거짓 증인 내세우는 전략…
검·경은 피해자에게 입증책임 떠넘기기도
등록 2022-03-17 16:46 수정 2022-03-18 02:43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검 로비에 있는 ‘검사 선서’ 액자 앞을 검찰 직원이 지나가고 있다. 연합뉴스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검 로비에 있는 ‘검사 선서’ 액자 앞을 검찰 직원이 지나가고 있다. 연합뉴스

“피고인은 A를 가짜 대리기사로 내세우고 증거도 조작했다. (중략) 피고인은 대리기사뿐 아니라 가게 장부도 B에게 부탁해 사후에 작출한(거짓으로 꾸민) 후 변호사를 통해 수사기관에 제출했다. 이러한 점을 포함하여 여러 근거를 종합하면, 피고인 진술에 도저히 신빙성을 부여할 수 없다. 그럼에도, 피고인의 진술에 신빙성이 없다고 판단받게 된 책임까지 피해자에게 전가하는 태도는 참으로 이해할 수가 없다.”

2021년 9월13일 김태훈 전 세종대 교수 성폭력 사건의 항소심 판결(서울서부지법 제1-3형사부·정계선 재판장) 일부이다. 김씨는 가짜 증인을 내세우고 사건 당일 아는 가게에 들렀다고 주장하기 위해 계산 내용이 담긴 가게의 장부를 사후에 꾸며 수사기관에 제출했다. 그럼에도 그는 1, 2심 선고 이후 재판부를 비난하고 억울하다고 고함을 지르며 법정에서 무고한 피해자 흉내를 냈다. 2021년 11월30일 최종 유죄가 확정되며 그의 연기는 막을 내렸다.

조작된 증거에 피해자가 ‘무고’ 피의자로

피의자나 피고인 신분이 된 가해자는 굳이 진실을 스스로 수사기관(경찰·검찰)에 알릴 이유가 없다. 자백이 오히려 유죄의 증거가 되기도 하므로 불리한 진술은 하지 않아도 된다. 그런데 거기서 멈추지 않고 가해자 쪽이 증거를 조작하거나 허위로 증인을 내세우는 일이 종종 발생한다. 특히 피해자 진술이 직접증거로 중요한 의미를 갖는 성폭력 사건에서 피해자 진술의 신빙성을 무너뜨리기 위해 가해자 쪽이 이런 시도를 하는데, 문제는 수사기관이 이를 제대로 검증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부실수사로 혐의를 입증하는 데 실패해 불송치 혹은 불기소처분을 내리기도 하지만, 가해자가 조작한 증거를 토대로 오히려 피해자를 무고의 피의자로 인지해 재판에 넘기는 사례도 있다.

김태훈 사례처럼 가해자가 제출 자료에 손대는 경우는 흔하다. 사후에 본인의 진술에 부합하는 허위 내용을 문서에 기재하거나, 날짜 등 일부 정보를 바꾸기도 한다. 사실확인서 등 본인에게 유리한 자료를 모아 제출하는 과정에서 사실을 호도하는 내용을 담거나 변호사 등 전문가의 손을 거쳐 내용을 수정하는 일도 잦다. 영상이나 사진을 조작하는 경우도 있다. 불리한 부분을 삭제하거나 위변조까지 시도한다. 디지털 자료를 변형하는 프로그램은 일반인도 쉽게 접할 수 있기에 제출 자료를 꼼꼼하게 확인하지 않으면 가해자가 빠져나갈 수 있다. 녹음·녹화 자료는 본인에게 유리한 부분을 편집해 제출하면서 기기 결함 등 여러 요인을 대며 원본 확보에 실패했다고 둘러대기도 한다.

왜 피해자가 수사까지 해야 하나

증인을 허위로 내세우기도 한다. 물론 위증, 모해위증 등 법정에서 허위 증언을 한 자에 대한 처벌 규정이 있지만 실제 처벌로 이어지는 경우는 많지 않다. 증언 내용이 객관적 사실에 반하더라도 증인의 기억에 반하지 않으면 위증죄 적용이 어렵기 때문이다. 그래서 수사 단계부터 본인에게 유리한 진술을 해줄 사람을 내세워 피해자 진술의 신빙성을 무너뜨려 불송치결정, 불기소처분을 끌어내려는 가해자가 있다.

가해자 쪽의 이런 전략은 수사기관과 법원이 제구실을 한다면 충분히 무너뜨릴 수 있다. 수사는 경찰이, 기소와 공소사실 입증은 검찰이 하면 된다. 그러나 그 역할을 제때 제대로 하는 사람을 만나기 어려웠다. 재판부 역시 직접 심리를 충실히 한다면 모를까 서면만 보고 대충 재판을 끝내는 경우가 많아 수사와 재판이 완전히 종결될 때까지 피해자에게 피해 회복과 일상 재구성은 요원해지곤 했다. 그러다보니 정작 당사자로 인정받지 못하는 피해자가 수사와 재판 절차에 필요 이상의 힘을 쏟아 피해를 인정받으려 하거나, 심지어 본인이 무고하지 않았다는 입증까지 떠안아야 한다.

성폭력 피해자와 연대할 때 관련 자료를 철저히 분석하고, 증거조사 과정을 감시하는 것도 이런 현실 때문이다. 피고인 쪽 변호인이 이른바 ‘성범죄 전문’을 내세워 가해자에게 장사하던 법무법인(로펌)이면 더 긴장하게 된다. 대개 그들은 사건과 무관한 피해자의 사생활을 거론하며 인신공격하고 증거(진위와 관계없이)를 만들어서라도 제출해 수사와 재판을 길게 끈다. 이런 전략에 적극적으로 맞설 공판검사를 만나면 다행이지만, 사건도 제대로 파악하지 않은 공판검사라면 증거조사 등 모든 과정을 맡기는 데 불안해질 수밖에 없다. 실제 판사들도 심정적으로 유죄라고 보지만 검사의 입증이 불성실하고 불충분해 무죄를 선고하는 사건이 있다고 말한다. 입증책임은 당사자인 검사에게 있지만, 그 책임을 제대로 이행하는 검사를 찾기는 아직 쉽지 않다.

가해자 쪽이 영상 속 인물이 피해자가 아니며 촬영한 사실도 부인하는 사건이 있었다. 이때 제대로 된 수사는 해당 영상을 분석해 영상 속 인물이 피해자이며, 촬영자의 위치와 영상편집 여부 등을 파악해 가해자가 해당 범죄를 저질렀다는 것을 입증하는 방향이어야 한다. 그런데 이 당연한 수사를 하지 않아 1심에서 무죄가 선고됐고, 항소심에선 시간이 촉박해 조사를 못하게 되자 피해자가 직접 영상을 분석하며 본인임을 입증하고, 증인신문을 견뎌야 했다. 사건 당시 촬영한 영상이 있었음에도 1심에서 증거조사를 하지 않고 넘겨 무죄가 선고된 건에서도, 피해자가 직접 영상을 분석하고, 해당 영상을 틀어놓은 상태에서 증인신문을 재차 감당해야 했다. 왜 피해자가 수사기관이 해야 할 증거조사까지 하면서 추가적인 고통을 감내해야 하나.

유흥업소에서 아르바이트하던 피해자는 고객이 약속한 수준의 신체접촉을 넘어서 성폭력을 저지르자 이를 바로 업소 관계자에게 알리고 고소했지만 오히려 가해자가 보복성 무고 고소를 하고, 수사기관은 가해자가 추후 고소를 취하했음에도 피해자를 무고범으로 기소해 재판에 넘겨 많은 고통을 받았다. 이때 피해자를 무고범으로 몰아간 증거는 가해자가 제출한 녹취록이었다. 녹음파일과 녹취록을 비교해보니 피해자가 명백하게 거부 의사를 표시하는 부분이 있었음에도 녹취록에서 이를 누락한 것이 재판 과정에서 드러나 무고 혐의는 최종 무죄가 확정됐다. 이런 결과도 피고인이 된 피해자가 관련 녹취록과 녹음파일을 들고 해당 녹취록을 만든 업체를 찾아가고 다른 업체에서 다시 녹취록을 만들어 비교한 끝에 나왔다.

수사기관, 전문성·인권감수성 갖추도록

2021년 검경수사권 조정, 2022년 검찰 피의자 신문조서의 증거능력 제한 등 현재 형사사법 절차는 많은 변화를 겪고 있다. 1차 수사종결권까지 갖게 된 경찰은 인권경찰을 내세우며 인권보호규칙 제정안을 입법 예고했다. 입증책임을 더 강하게 요구받은 검찰은 영상녹화, 증거보전절차, 조사자증언제도, 피고인신문 등을 적극 활용하겠다고 보도자료를 내걸었다. 그러나 진실을 가리고 범행을 은폐하려는 가해자들의 한발 앞선 전략에 비해 경찰의 수사력과 검찰의 공판 대응 능력은 아직 수준 미달이며, 당사자도 아닌 피해자에게 수사와 입증책임을 떠넘기고 있다. 전문성과 인권감수성 모두 떨어지는 현재의 경찰과 검찰 수준을 높여야 한다.

마녀 반성폭력 활동가

*n번방 재판 방청기: 마녀는 성폭력 재판이 열리는 전국 법원을 찾아가 지켜보고 기록하고 공유합니다. 격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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