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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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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해자보다 가해자의 마음을 읽는 자들

수사·재판에서 엄벌 대신 선처에 기울어져…
피해자들 상담소 찾기까지 10년 이상 걸려 ‘공소시효 폐지’ 목소리
등록 2022-02-16 17:54 수정 2022-02-17 02:26
일러스트레이션 임우정

일러스트레이션 임우정

2022년 2월4일 인간면역결핍바이러스(HIV)에 감염된 상태로 13살 미만 아이를 성폭행한 친아버지 A(39)의 첫 재판이 대구지법에서 열렸다. 피해 아동과 상담한 교사의 신고로 세상에 드러난 이 사건과 관련해, 검찰은 A의 친권 상실을 청구했다. 그런데 피해 아동의 친권자로 남게 될 친어머니가 자신의 남편을 위해 선처를 탄원 중이라고 한다. 경제적 이유든, ‘정상가족’에 대한 집착이든, 성차별과 혐오에 기반한 것이든, 친족성폭력 사건의 수사·재판 과정에서 자주 보는 광경이다.

가해자 특성상 ‘암수범죄’ 많아

2021년, 2022년에도 친족성폭력 피해자들의 사망 소식이 연달아 들려왔다. 생계를 책임지는 가장의 외피를 둘러쓴 ‘아버지’(친부·계부)에 의한 범죄가 많았다. 친족성폭력 범죄는 더 이상 병리적인, 특정 가정만의 ‘집안일’이 아니다. 지금도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지만 외면당하는 현재진행형 사건이다. 언론과 대중은 친족성폭력을 일부 ‘악마’가 저지르는, 특수하고 자극적인 사건으로만 소비할 뿐 원인 분석과 문제 해결에는 미온적이다. 그사이 주변의 지지를 받지 못한 피해자들은 죽음에 이를 정도로 고통받는다.

경찰청 자료(2015~2020년)에 따르면 친족성폭력(강간·강제추행 한정)은 매년 평균 466건 발생했다. 전체 성폭력 사건에서 가해자와 피해자의 관계가 ‘동거친족’인 경우는 1.8%였다. 피해자가 여러 이유로 가해자를 신고·고소하기 어려운 친족성폭력의 특성이 제대로 반영된 통계라고 보기는 어렵다. 여성가족부의 ‘2020년도 성폭력 피해 상담소·보호시설 등 지원실적 보고’에 따르면 관련 시설에 상담 등 지원을 요청한 성폭력 사건 중 가해자가 친족·친인척·배우자인 경우는 14.5%로 전체 가해자 유형에서 두 번째를 차지했다. 이런 경찰청의 집계와 상담 의뢰 건수의 격차는 암수범죄(드러나지 않은 범죄)인 성폭력 범죄에 친족이라는 관계의 특수성까지 더해진 친족성폭력의 특성을 보여준다. 수사기관 통계 속 친족성폭력 범죄는 빙산의 일각일 가능성이 크다.

한국성폭력상담소는 2019년 상담통계 및 상담동향 분석에서 친족성폭력 피해자들이 상담소를 방문하기까지 걸린 시간이 ‘10년 이상’인 경우가 55.2%였고, ‘1년 미만’은 24.1%에 그쳤다고 밝혔다. 성폭력 피해의 72.3%가 피해를 인식·인지하기 어렵거나 거부 의사 표시를 하기 어려운 아동·청소년 시기에 집중됐다. 가해자 유형은 동거가족 등 밀접한 친족이 많았다. 피해 이후 법적 대응을 한 것은 19.5%에 불과했으며, 49.4%는 주변인에게 도움을 청했다. 그러나 피해를 주변에 알리더라도 주변인으로부터 지지받지 못했다는 답변이 53.7%였다.

친족성폭력 피해자들은 가해자에 대한 양가감정으로 혼란스러워하고, 고통을 겪으며, 죄책감을 갖기도 한다. 어릴 때부터 지속적으로 친족성폭력에 노출됐으나 주변의 도움을 받지 못한 경우 여러 후유증으로 고생한다. 성장 과정에서 대인관계 형성시 친밀감을 지속하고 조절하는 균형감각을 상실할 수 있고 이는 사회적 고립이나 단절로 이어지기도 한다. 또한 스트레스 등에 따른 신체장애(내과적 이상 없이 다양한 신체증상을 반복해서 호소하는 질환)나 부정적 정서(분노·배신감·공포·소외감 등)를 경험하면서 충동 조절이 어려워져 자해, 자살 등을 시도하거나 타인에게 공격성을 보이기도 한다. 성적 행위를 통한 쾌감 등에 집착하는 현상도 보고되며, 외부와의 경계선을 지나치게 낮거나 높게 설정해 추가 범죄나 착취에 취약해지거나 사회생활이 어려워지기도 한다. 이런 후유증은 피해 이후 형사사법 절차를 밟을 때도 영향을 미친다. 수사와 재판에 협조하지 않거나 진술을 번복하는 일이 발생하는 것이다.

‘친족’이라는 2차 가해의 굴레

문제는 친족성폭력 피해자들의 특성을 이해하고 신중하게 접근해야 할 수사기관과 법원이 오히려 추가 가해를 저지른다는 것이다. 충북 청주에서 발생한 의붓아버지 원아무개의 성폭행 사건도 두 명의 어린 피해자를 살릴 기회가 여러 번 있었음에도 수사기관이 제구실을 하지 않았다. 피해자에게 직접 가해자와의 분리를 원하는지 묻고, 수사 진행 과정에서 증거를 수집해오라고 요구하거나, 성폭력 피해자를 지원하는 해바라기센터에서 학대 의혹을 받던 친어머니의 동석을 허락해 피해자가 가해자의 성폭행 사실을 진술할 때 친어머니의 압박을 받기도 했다. 가해자와 분리되지 않은 상태에서 구속영장 신청마저 여러 차례 반려됐다.

재판 과정에서도 증인신문이나 피고인신문을 통해 피해자에 대한 모욕과 인신공격이 멈추지 않지만 재판부는 소극적일 때가 많다. 2021년 부부싸움에 대한 화풀이로 13살 미만 아이를 성폭행하고 학대한 34살 남성의 경우, 1심 재판부가 피해자의 탄원 내용을 피고인에게 유리한 사정으로 판결문에 적시했다. 피해자의 엄벌 의사는 제대로 반영하지 않지만 피해자의 처벌 불원, 선처 탄원은 적극적으로 반영하는 것이다.

피해 사실이 외부로 알려져 수사가 시작되는 것도 가족이 아닌 외부인들(교사, 상담사, 정신과 의사 등)의 적극적 신고 덕분인 경우가 많다. 친족성폭력 피해자들이 대응을 포기하는 등 태도를 바꾸는 데는 가해자 이외 친족들의 압박이 영향을 미친다. 친족관계이기 때문에 알기 쉬운 개인정보를 활용해 피해자에게 소 취하, 합의, 선처 탄원 등을 강요하거나 심지어 진술 번복도 요구한다. 가해자에게 유죄가 선고되면 피해자를 탓한다. 자립이 어렵거나 관계 단절이 쉽지 않은 친족의 특수성이 있기 때문에 피해자는 이런 압박에 고스란히 노출된다.

연대할 때 만났던 친족성폭력 피해자들은 가족의 이런 태도에 큰 상처를 받았다. 여전히 그들은 친족에게 애정을 기대하고 또 실망했다.

피해자의 말을 경청할 준비

“저에게 12년 동안 수십 차례의 범죄로 장애를 준 사촌오빠는 기억이 안 난다고 합니다. 저도 기억하고 싶지 않았습니다.”(친족성폭력 공소시효 폐지 정기 1인시위에 나선 B씨)

보다 못한 친족성폭력 피해자들이 직접 나서고 있다. 자신의 경험을 책으로 엮고, 피해를 인지하고 형사사법 절차를 선택하기까지 긴 시간이 걸리는 친족성폭력 사건의 특수성을 고려하지 못하는 공소시효(10년)의 폐지를 위해 1인시위도 이어나가고 있다. 현재 2심 재판이 진행 중인 B씨도 그 움직임에 동참하고 있다. 외국에 거주하는 그는 재판과 이어지는 활동을 위해 한국에 들렀다. 그는 성인이 된 뒤에야 피해 사실을 알리고 싸움을 시작했다. 성폭력과 상해의 인과관계를 인정받지 못해 1심에서 가해자에게 무죄가 선고됐다. 그는 여전히 포기하지 않고 있다. 일상 모두를 내던지고 피해를 인정받기 위해 한국에 다시 온 B씨에게 한국 사회는 어떤 답변을 해야 하는가. 그가 기억하는 피해에 대해 법원은 어떤 판단을 할 것인가.

사람들은 성폭력 피해자들에게 “말하라”고 강요한다. 경청할 준비는 하지 않은 상태에서 피해가 일어난 즉시, 물증을 확보해, 피해자답게 말해야 한다고, 그래야 가해자를 처벌할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피해자는 그 말을 외부에 들려줄 권리가 있는 것이지 그래야 할 의무가 있는 게 아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말하면서 밖으로 나섰다. 그러니 이제는 사회가 답해야 한다.

마녀 반성폭력 활동가

*n번방 재판 방청기: 마녀는 성폭력 재판이 열리는 전국 법원을 찾아가 지켜보고 기록하고 공유합니다. 격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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