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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형 일자리라는 ‘상생’의 주술

첫 완제품 ‘캐스퍼’ 사전예약 4만 대 돌파… 적정임금, 주거복지 대책 더뎌도 지금의 상생구조 가능케 하는 것은
등록 2021-10-05 03:54 수정 2021-10-06 09:02
9월27일 광주 광산구 빛그린산단 내 광주글로벌모터스(GGM) 공장에서 노동자들이 이 업체가 현대자동차의 위탁을 받아 생산 중인 캐스퍼 조립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엄지원 기자

9월27일 광주 광산구 빛그린산단 내 광주글로벌모터스(GGM) 공장에서 노동자들이 이 업체가 현대자동차의 위탁을 받아 생산 중인 캐스퍼 조립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엄지원 기자

공장 안은 온통 은백색으로 빛났다. 5개월 전 문을 연 자동차 공장엔 아직 기름때 한 점 낀 데가 없다. 도열한 백색 차체들에 내리꽂힌 백색 조명은 전방위로 반사돼 공장을 밝혔다. 빛이 나도록 새로운 건 공장과 제품만이 아니다. 1만4천여 평(4만6200㎡) 차체 조립공장을 메운 조립부 엔지니어들 대부분 마스크를 쓰고 있어도 앳된 얼굴을 감출 수 없었다. 생산직 노동자 평균 연령 28.8살. 현대차 생산직 노동자 평균 연령(2013년 기준 46살)보다 17살 젊은 완성차 공장 광주글로벌모터스(GGM·지지엠)의 얼굴이다.

노·사·정 협의 7년 지나 세워진 굴뚝

광주광역시 광산구와 전남 함평 경계에 자리잡은 광주글로벌모터스 공장은 태어나 처음 맞는 가을을 떠들썩하게 보내고 있다. 지지엠은 광주시가 지분의 21%(483억원), 현대차가 19%(437억원)를 쥔 합작법인이다. 2021년 4월 ‘광주형 상생 일자리’라는 이름 아래 공장이 세워진 뒤 9월14일 첫 완제품을 세상에 내놨다. 현대자동차의 위탁을 받아 생산한 경형 스포츠유틸리티차량(SUV) ‘캐스퍼’다. 시장 반응은 첫날부터 예상을 뛰어넘었다. ‘100% 온라인 판매’라는 초유의 마케팅에도 불구하고 사전예약을 개시한 당일에만 1만8940명이 몰렸다. 첫날 계약 건수로는 현대차의 내연기관 차 가운데 역대 최다 수준이다. 회사 쪽이 계획한 올해 생산 목표치(1만2천 대)도 크게 웃돈다. 한 해 생산 목표량이 7만 대인데 출시 보름 안에 사전예약 4만 대를 넘겼으니 일단 성공적인 첫걸음이다.

7년 전, “광주에 좋은 일자리를 만들자”며 노·사·민·정이 대화를 시작했을 때 누구도 ‘정말 광주에 새 굴뚝을 세우는 날’이 올 거라고 확신하지 못했다. 대화가 익어가던 시기, 광주의 열악한 노동시장은 특단의 대책을 기다리고 있었다. 청년들의 미래는 암담했다. 2016년 기준 광주의 청년고용률(만 15~29살)은 35.0%로 전국 최하위권이었다. 일자리가 없어 고향을 떠나는 청년들을 막을 길이 없었다. 지난해 광주·전남 지역 20~30대 가운데 1만5423명이 지역을 떠났다. 인구 유출은 지역경제 침체의 악순환으로 이어진다. 그러니 임금을 낮춰 기업을 유인하되, 정부가 주거와 교육·보육 등 복지를 제공해 노동자의 삶을 떠받치자는 광주형 일자리의 구상은 완전히 다른 길을 가보자는 제안이었다.

막상 사업이 궤도에 올라앉고 현대차가 투자자로 나서면서 노사정 각 주체의 기대와 셈법이 첨예하게 엇갈렸다. ‘노동 존중의 일자리를 만들어보자’던 최초의 약속은 투자 앞에서는 자주 잊혔다. 7년 동안 대화는 몇 번이나 뒤집히고 엎어졌다. “분위기가 오늘 다르고 내일 다르고, 냉온탕이 수없이 반복됐잖습니까. 그런 과정을 함께해온 터라 우리도 이 공장이 준공이나 될 수 있을까, 의구심이 있었죠.” 대화의 한 축으로 참여해온 한국노총 광주지역본부 윤종해 의장의 기억이다.

△적정임금 △적정노동시간 △노사책임경영 △원·하청 관계 개선이라는 4대 의제를 염두에 둔 정책의 실제 결과물도 설계자의 밑그림에선 다소 벗어났다. 적정임금의 자리를 ‘반값 연봉’이란 자극적인 프레임이 대체했고 ‘노사책임경영’의 정신을 ‘무노조 경영’이란 “순 엉터리 같은 얘기”(박병규 광주형일자리연구원 이사장)가 잠식했다.

2019년 2월 광주 광산구 ‘빛그린산업단지’의 터잡기 공사가 한창이다. 한겨레 신소영 기자

2019년 2월 광주 광산구 ‘빛그린산업단지’의 터잡기 공사가 한창이다. 한겨레 신소영 기자

“노사가 한마음 한뜻으로”

지지엠이 첫걸음을 성공적으로 내디딘 데 안도하면서도 이를 바라보는 설계자 박병규 이사장의 마음은 여전히 살얼음판이다. 기아차 광주공장 노조지회장 출신인 그는 2014년 지방선거 당시 윤장현 광주시장의 광주형 일자리 공약을 설계했고 고비마다 각 파트너를 조율하며 협의를 끌어왔다. “처음에 고민하고 기획한 것과 지금 광주글로벌모터스의 모습이 상당한 차이를 보이는 게 사실입니다. 계속해서 철학과 가치를 담는 데 경주하는 게 맞을지, 비즈니스 모델을 고려해 기업 투자를 이끌어내는 게 좋을지 고민했고 (우리가) 어느 정도 타협했다고 생각해요.”

그래서일까. 9월27일 찾은 지지엠 공장 곳곳엔 잊지 말자는 듯 ‘상생’의 표어가 강박적으로 노출돼 있었다. 공장 입구에 자리잡은 표지석엔 ‘상생의 일터’를 새겨 넣었고, 본관 입구에선 자동차 공장보단 역사기념관에 어울릴 법한 선언이 손님을 맞았다. “일백오십만 광주시민의 염원을 담아 첫 삽을 뜬 지 사백아흔 날의 낮과 밤 (중략) 광주글로벌모터스여! 광주의 아들딸들이여! 노사가 한마음 한뜻으로 상생과 화합의 노래를 부를지어다.” 신차 생산을 앞두고 각 부서 사원들의 마음을 모아 공장에 붙여둔 펼침막에도 상생의 다짐이 가득하다. “상생! 안전!” “안전 없는 상생은 살생!” 이쯤 되면 구호를 넘어 주술에 가깝다. 이곳을 찾는 이라면 누구도 비켜갈 수 없고, 비켜가선 안 되는 주문이다.

전남 목포의 화학공장을 그만두고 지지엠 조립부에 입사한 주용훈(32)씨도, 순천대를 졸업한 뒤 고향인 경남 마산으로 돌아가지 않고 지지엠 도장부에 입사해 정착한 황수빈(24)씨도 상생의 구호가 귀에 익은 신입사원이다. 지지엠은 광주·전남에 1년 이상 주소를 뒀거나 이 지역의 고교 또는 대학교를 졸업한 이들을 ‘지역인재’로 우대한다. 지역의 청년들에게 미약하나마 희망이 될 만하다. 3월 채용한 1차 기술직 공채 신입사원 186명 가운데 97%는 광주·전남 지역 출신이다. 올해 네 차례에 걸쳐 진행 중인 신입사원 공채에서 68 대 1에 이를 정도로 치열한 경쟁률은 이 회사에 대한 지역 청년들의 높은 관심을 방증한다.

게다가 완성차 공장에서 정규직 사원으로 근무할 기회, 그것만으로도 지지엠은 매력적인 직장이다. 주용훈씨는 지지엠에서 자동차 조립을 처음 배우고 있다. 연봉은 3천만원 수준. 직전 회사에서 이직하면서 1천만원 넘게 연봉이 깎여나갔다. 호봉제가 적용되지 않아 시간에 따라 연봉이 오를 일도 없다. 그저 회사가 잘돼 성과급을 받을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그러니 캐스퍼의 성공에 거는 기대가 크다. “모험이었거든요. 입사하고도 무척 고민이 많았어요. 그런데 차가 막상 출시되고 반향을 얻는 걸 보고 있으니까, ‘내가 모험한 게 아니고 잘 들어왔구나’ 하는 확신이 들어요.”

올해 신입사원 공채 경쟁률 68 대 1

지지엠 노동자의 평균 연봉은 현대차 생산직 평균 연봉(8800만원)의 절반에 못 미치는 3500만원(주 44시간 근무)가량이다. 국내에 23년 만에 세워진 완성차 공장이라지만 ‘위탁 전문’인 지지엠엔 독자적인 기술력이 없다. 거의 ‘반제품’ 상태로 현대차로부터 뼈대와 협력업체 부품 일체를 받아 조립·도장 작업을 하기 때문에 개발·판매 비용이 들지 않는다. 주용훈씨처럼 사원 다수는 자동차 관련 직무 경험이 없으나 촉탁직으로 고용된 베테랑 퇴직자(서포터)에게 몇 개월씩 훈련받는다. 추후 직무급을 도입하고 경영 실적에 따라 성과급을 준다지만 아직은 이른 얘기다.

대신 정부가 노동자에게 복지 혜택(사회임금)을 줘 부족한 실질소득을 높이는 게 광주형 일자리의 동력이다. 광주시내에 사는 황수빈씨는 연 197만원을 임대료 명목으로 지원받는다. 17평 주택을 기준 삼은 보증금의 이자 수준이다. 의료비와 통근 버스비도 일부 지원받는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전체 60만㎡ 크기의 지지엠 부지엔 녹지가 잘 조성돼 있다. “다른 자동차공장들과는 다르다”며 “사원 복지를 고려한 것”이라고 지지엠 사쪽 관계자는 강조했다. 국비 50억원에 시비 50억원을 보태 산단 안에 2022년 7월을 목표로 수영장과 다목적 체육 시설을 갖춘 개방형 체육관도 짓고 있다.

다만 가장 핵심적인 주거복지 대책은 사업 속도를 따라잡지 못하고 있다. 광주시는 지지엠 직원을 위해 행복주택을 확보했지만 입주 자격(19∼39살·신혼부부·대학생 등)을 충족한 68명만 입주한 상태다. 아내, 초·중학생인 두 아이와 목포에 거주 중인 주씨는 광주시로부터 받을 수 있는 주거 지원이 없다. 광주 시내에 살지 않으면 임대료를 지원받을 수 없다. 광주형 일자리를 위한 특별공급 공공주택은 2029년에나 완공될 전망이다. 현실적인 한계는 이해하지만 광주시의 더딘 행정이 사업 취지에 맞지 않는다는 말이 나올 수밖에 없다. 윤종해 의장은 “지금 사원들의 임금을 적정임금이라고 말하긴 어렵다. 사회임금이 따라오지 않으면 광주형 일자리의 이상은 구현될 수 없고, 사원들이 가정을 꾸리는 일정을 고려하면 늦어도 4~5년 안엔 주거 문제가 해결돼야 한다”고 말했다.

단순한 공생, 노동자 기생에 그치지 않으려면

기업 내 노조가 없는 지지엠에선 노사 대화도 ‘상생협의회’라는 이름 아래 진행된다. 노사 6명씩 동수로 구성된 상생협의회에 애로사항이나 요구사항을 전하면 안건에 따라 진행 경과를 피드백해주는 방식이다. 근로자 대표 6명은 직접선거로 뽑는다. 황수빈씨는 “여성 사원들이 시설과 관련해 상생협의회에 어려움을 전한 적이 있는데 이튿날 바로 해결됐다”며 신뢰를 나타냈다. 경영진 역시 현재로선 노동자를 배려하고 이익을 공유하는 데 적극 나서겠단 입장이다. “우리 공장은 여러 라인을 동시에 생산하는 ‘혼류생산’이 가능한 만큼 현대차를 넘어서 다른 생산 차종도 유치할 수 있다. 성과가 많이 나면 성과급으로 직원들에게 잘 돌아가도록 노력하려고 한다. 인원은 확정되지 않았지만 내년 초까진 300여 명 더 채용할 것이다.” 오순철 지지엠 경영지원본부장의 약속이다.

캐스퍼가 흥행에 성공하면서 최근 광주시 등에는 “우리도 투자하고 싶다”며 의향을 물어오는 기업이 많다고 한다. ‘제2, 제3의 모델이 나오는 것은 어렵지 않다’는 뜻이다. 다만 어떤 경우에도 노동이 존중받지 못한다면 지금의 상생구조는 단순한 ‘공생’ 또는 노동자의 희생을 강요하는 기생 상태에 그칠 가능성이 크다. 지지엠 사원들이 기꺼이 현 수준의 ‘적정임금’을 받아들이며 상생하는 것은 “회사가 잘되면 성과급으로 공정히 돌려받을 수 있을 것”이란 기대가 크기 때문이다.

현대차와 광주시가 협의한 ‘35만 대 생산(5년)까지 임단협 유보’ 조항 등은 법적 근거가 없지만, 노동을 바라보는 지지엠의 시선을 간접 증명한다. 지지엠이라는 배가 침몰하지 않도록 하는 것을 넘어 순항하려면 노동 존중의 문화가 필수적이라는 게 이 사업을 이끌어온 관계자들의 공통된 의견이다.

“기존 자동차 업계의 노사관계가 가진 제한을 해소한 게 지지엠의 가장 큰 특징입니다. 혼류생산도 노사 상생을 말하는 지지엠이기 때문에 가능했던 거죠. 내연차에 엔진이 없으면 안 되듯 이 기업은 상생이 엔진입니다. 만약 기업 논리를 따라가게 될 경우 결국 노조를 등한시하고, 소외시킬 수 있습니다. 그 순간 광주형 일자리를 향한 각계의 모든 부정적인 견해가 실현되겠죠.”(박병규 이사장)

광주=엄지원 기자 umkij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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