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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별금지법은 어떻게 사회를 바꾸는가

국가인권위 제정 권고 15년 지나도록 뒷짐… 국민동의청원에 응답해야
등록 2021-05-29 07:49 수정 2021-05-31 02:42
2021년 5월26일 오전 국회 앞에서 179개 여성시민사회단체 회원들이 ‘차별금지법 제정을 위한 10만행동 돌입’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한겨레 김명진 기자

2021년 5월26일 오전 국회 앞에서 179개 여성시민사회단체 회원들이 ‘차별금지법 제정을 위한 10만행동 돌입’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한겨레 김명진 기자

한국의 차별금지법은 2006년 국가인권위원회의 제정 권고로 그 모습을 처음 드러냈다. 이제 2021년이다. 차별이 무엇인지, 그 시정과 예방을 위해 국가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 규정하는 가장 기본적인 법률의 제정이 15년 동안 정당한 이유 없이 보류됐다.

모든 사회구성원이 존엄하고 평등하다는 대원칙이 확인되고, 차별에 대한 일반적인 판단 기준과 구제 수단이 갖춰질 때, 우리는 그것을 바탕으로 때로 대화를, 때로 싸움을 통해 구체적인 차별 사례에 대해 논쟁할 수 있다. 대화와 싸움의 과정을 거치며 사회는 차별 판단 기준을 구체적으로 검증하고 갱신하며 평등에 대한 공동의 감각을 함께 쌓아나간다.

한국은 지난 15년간 이 기회를 잃었다. 그사이 차별·역차별 개념에 대한 혼란이 가중되고, 사회적 대화는 공통 지반 없이 헛돌았으며, 누구를 존엄에서 배제할지를 셈하는 혐오의 공기만이 퍼져갔다. 차별금지법은 차별받지 않을 권리의 내용, 차별받지 않아야 할 사람, 차별이 금지되는 영역 모든 측면에서 새 표준을 제시한다. 15년 동안 대기 중인 이 내용을 이제는 구체적으로 확인해야 한다.

보편적 노동권인 ‘차별받지 않을 권리’의 새 기준

한국의 차별금지법은 △고용 △교육 △재화·용역 △행정이라는 네 가지 사회 영역에서 발생하는 차별을 예방하고 시정한다. 헌법상 평등권은 정치·경제·사회·문화 모든 영역에 걸친 기본권인데, 이 중 가장 중요한 공공성을 지닌 네 영역에서만큼은 국가가 법률로 차별을 시정하고 평등을 실현해나가겠다고 약속하는 것이다. 이 영역에서 차별금지법이 가장 많이 적용될 분야는 단연 고용이다. 외국 사례를 봐도 차별금지법이 제정되면 고용 차별(그중에서도 고용 성차별) 문제를 가장 적극적으로 다룬다.

고용 영역에서 차별금지법은 ‘차별 없이 노동할 권리’를 통합적으로 정의하고 ‘차별로부터 보호받을 노동자’ 범위를 일의 세계 전반으로 확대한다. 이를 통해 차별금지법은 ‘일터에서 차별받지 않을 권리’에 대한 새 표준을 세운다.

먼저 차별금지법은 합리적 이유 없이 불리하게 대우하는 행위인 직접차별뿐만 아니라 간접차별, 괴롭힘, 성희롱까지 포함하는 개념으로 정의한다. 차별의 한 유형으로서 ‘괴롭힘’은 우리 법에 새롭게 도입되는 개념이다. 일터에서 청소, 커피 타기, 행사 분위기 띄우기 같은 성별 고정관념에 따른 역할을 강요하는 일, 외모 지적이나 ‘언제 결혼할 거냐’ 같은 이야기를 반복하는 일, 출신민족·출신지역·학력 등의 사유로 누군가를 비하하는 일은 모두 차별금지법상 괴롭힘에 해당한다. 일터에서 벌어지는 차별적 괴롭힘은 다양하고 그 피해가 심각하지만 그동안 이를 명시적으로 다루는 법률이 없어 문제였다. 근로기준법상 직장 내 괴롭힘 규정이 도입됐지만, 차별적 괴롭힘의 원인이 되는 구조를 알고 괴롭힘을 근본적으로 시정하고 예방하려면 차별 판단 기준과 구제 수단에 관한 내용을 갖춘 차별금지법으로 이를 보완하는 것이 필요하다.

성희롱은 본래 ‘성적 괴롭힘’으로서 직장 내 성차별의 하나로 제기된 개념이다. 이 행위로 피해자가 어떻게 차별적 노동환경에 놓여 노동권을 침해당했는지가 핵심이지만 한국에선 아직도 많은 사람이 성희롱을 조직 내 구조적 차별 문제가 아닌 개인 간 성적 문제로 사소하게 바라보는 경향이 있다. 차별금지법은 성희롱에서 ‘성적 굴욕감’ 등의 요건을 삭제하고 성희롱을 차별의 하나로 명확하게 정의함으로써 ‘차별이자 괴롭힘’으로서 성희롱의 본래 자리를 찾아준다. 차별 금지 사유에 따른 차별 행위, 괴롭힘과 성적 괴롭힘은 완전히 분리된 행위가 아니다. 모두 사회의 차별 구조를 반영하고 차별적 노동환경에선 차별 행위, 괴롭힘, 성적 괴롭힘이 복합적으로 발생하는 일이 많다. 차별금지법의 통합적인 차별 정의는 이런 차별이 어떻게 연계돼 일어나는지를 ‘평등권 침해’ 관점에서 통합적으로 읽어내도록 한다.

2018년 4월 전북대학교 사회과학대학 성소수자모임 ‘열린문’이 기자회견을 열어 “부당하게 동아리 등록이 취소되고 학교와 학생회로부터 인권침해를 당했다”고 주장했다. 연합뉴스

2018년 4월 전북대학교 사회과학대학 성소수자모임 ‘열린문’이 기자회견을 열어 “부당하게 동아리 등록이 취소되고 학교와 학생회로부터 인권침해를 당했다”고 주장했다. 연합뉴스

개인의 정체성만큼 차별 유형도 복합적

차별금지법은 ‘차별로부터 보호받을 노동자’ 범위를 확대한다. 차별받지 않을 권리는 본래 모든 사람에게 주어지는 기본권이다. 따라서 차별금지법은 법 적용을 받는 사용자와 노동자의 범위를 근로계약을 중심으로 좁히지 않고 일의 세계에서 실질적인 노동관계를 맺는 사람에게까지 넓힌다. 외국의 차별금지법도 같은 취지에서 차별로부터 보호되는 노동자 개념을 노동관계법보다 넓게 정의한다. 현재 많은 노동이 프리랜서·자영업자·도급 같은 외형을 띠면서 그 안에서 일어나는 직접차별, 간접차별, 괴롭힘, 성희롱이 제대로 규율되지 못하고 있다. 차별금지법으로 차별 규율의 사각지대를 줄여나가야 한다.

현재 한국 사회에서 ‘차별받지 않을 권리’는 차별적으로만 보장된다. 차별을 규율하는 법률이 일부 사유, 일부 영역에 대해서만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장애인차별금지법은 사회 전반의 장애 차별만을 규율한다. 남녀고용평등법은 고용 영역의 성차별만을 다룬다. 교육과 재화·용역 영역에서 발생하는 성차별에 대해서는 따로 법률이 없다. 인종, 출신민족, 성적지향, 성별정체성, 출신지역, 종교, 사상, 학력, 병력 등 현재 우리 사회에서 문제되는 많은 차별 사유에 대해서는 차별을 정의하고 실제적 구제 수단까지 담은 법이 없다.

개별적 차별금지법이 있는 영역에서도 한계가 존재한다. 사람은 복합적 정체성을 지닌 존재이기에 차별도 복합적으로 겪는다. 포괄적 차별금지법 없이 개별적 차별금지법만이 존재할 때, 차별 경험은 법 앞에서 조각나기 쉽다. 암투병을 마치고 직장을 다시 구하려는 여성이 겪는 채용 차별을 남녀고용평등법상 성차별만으로 충분히 설명할 수 있을까? 장애를 가진 여성 청소년이 겪는 차별은 어떤가. 유엔 여성차별철폐위원회는 2018년 한국에 여성차별을 철폐하기 위해 포괄적 차별금지법을 제정하라고 권고했다. 여성차별을 없애기 위해서는 ‘빈곤여성, 소수인종·종교그룹 및 성소수자 여성, 장애여성, 난민 및 난민신청 여성, 무국적여성, 이주여성, 농촌여성, 비혼여성, 여성청소년, 여성노인 같은 소외 계층에 영향을 미치는 교차적 차별을 금지하는’ 법률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현행법의 차별 규제 공백 메우기

차별금지법은 차별 금지 사유를 포괄할 뿐만 아니라 차별 금지 영역도 4개 주요 영역을 포괄함으로써 현행법의 공백을 메운다. 현재 교육이나 재화·용역 영역에선 장애인차별금지법을 제외하면 어떤 차별금지법도 없다. 스쿨미투로 밝혀졌듯이 학교에서의 성희롱과 성차별적 괴롭힘 문제가 심각하다. 장애, 인종, 성적지향, 성별정체성, 가족형태 등을 이유로 한 학교 괴롭힘도 계속 보고된다. 교육 영역에서 직접차별, 간접차별, 괴롭힘, 성희롱 모두 학생들이 동등하게 학습권을 누리지 못하게 하는 행위로 차별금지법상 차별이다.

재화·용역과 관련한 차별은 교통수단, 상업시설, 의료기관, 주거시설 등을 이용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직접차별, 간접차별, 괴롭힘, 성희롱을 말한다. 최근 택시에서 이주여성에 대한 성희롱 사건이 일어났다. 재화·용역 제공 과정에서 일어난 출신민족 괴롭힘이자 성적 괴롭힘 행위로 차별금지법상 차별에 해당한다. 이처럼 교육기관, 택시, 의료기관, 레스토랑·헬스장 같은 상업시설, 임차관계 등에서 재화·용역 차별을 당한 사람은 국가인권위원회나 법원에 차별 시정과 손해배상을 요구할 수 있다.

독일은 2006년 ‘일반동등대우법’이라는 포괄적 차별금지법을 제정했다. 2017년에는 1만8천 명을 설문조사해 ‘독일에서의 차별 경험’이라는 보고서를 펴냈다. 설문조사 결과, 차별은 일부가 아닌 다수가 폭넓게 경험하는 문제라는 점이 확인됐다. 일반동등대우법이 제정됐을 때, 많은 독일인이 이 법은 자신과 상관없는 일부 소수그룹을 위한 법률이라고 생각했던 것과 대비되는 결과다. 설문조사 응답자 3명 중 1명이 지난 2년간 한 가지 또는 그 이상의 사유로 일반동등대우법상 차별을 경험했다. 그중 절반은 특히 고용 영역에서 차별을 경험했다고 진술했다. 그리고 차별을 경험한 응답자 10명 중 6명이 차별에 대응했다고 보고했다.

“차별 경험” 응답자의 71%가 ‘무대응’ 현실

독일 일반동등대우법이 제정된 2006년, 한국에서도 국가인권위원회의 첫 번째 차별금지법 제정 권고가 있었다. 독일과 달리 법을 제정하지 못한 한국의 현재 상황은 사뭇 다르다. 2020년 차별에 대한 국민인식조사에서 차별을 경험했다는 응답은 한국도 매우 높지만, 차별 대응을 묻는 질문에는 차별을 경험한 응답자의 71.7%가 ‘아무런 대응도 하지 않았다’고 했다. 대응의 하나로 ‘도움을 요청’한 경우에도 도움을 주로 요청한 대상은 지인(1위, 71.2%)과 가족(2위, 42.3%)이었다.

법만으로 세상을 바꿀 수는 없다. 그러나 법이 존재할 때 사람들은 변화하기 시작한다. 법을 근거로 차별에 문제제기하기로 결심한다. 차별에 문제제기하는 동료를 돕기 위해 더 크게 용기를 낸다. 세상은, 그렇게 변화한 사람들이 바꾼다. 2020년 국민인식조사에서 국가기관의 실효성 있는 구제 절차가 마련될 경우 구제 요청을 하겠냐는 질문에 61%가 그럴 의향이 있다고 대답했다. 차별에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았던 많은 사람이 실은 맞설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이미 15년을 기다리게 한 국가는 이제 응답해야 한다. 평등 실현이 국가의 책무임을 확인하고 차별의 문제제기를 가능케 하는 차별금지법을 내놓아야 한다.

2021년 5월24일 동아제약 채용 성차별 당사자의 청원글로, 포괄적 차별금지법을 제정하라는 국민동의청원이 시작됐다. 30일 안에 모일 10만 명의 행동은 국회와 정치권의 긴 침묵을 깨뜨릴 것이다. 2021년에는 반드시 차별금지법을 만들어내자.

조혜인 변호사·차별금지법제정연대·공익인권변호사모임 희망을만드는법

*차별금지법 제정 국민동의청원 바로가기
https://bit.ly/equal
ity100000







*한겨레21 차별금지법 기획 기사 시리즈 바로가기
http://h21.hani.co.kr/arti/SERIES/24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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