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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머n]현실에서 열혈검사는 진정 없나

디지털성범죄에 대한 검사의 무능·태만… 가해자의 영악해진 방어전략
등록 2021-02-25 11:25 수정 2021-03-31 13:46
일러스트레이션 ‘리셋’ 임우정

일러스트레이션 ‘리셋’ 임우정

“공판검사가 판사 뒤에 숨어 있다는 발제자의 발언에 동의할 수 없습니다.”

2020년 9월 ‘성범죄 재판 함께 돌아보기’ 포럼 도중 채팅창에 올라온 글이다. 과연 그럴까? 내 경험에 비춰보면 검찰은 재판 과정과 선고 때 판사에게 책임을 넘기며 숨어 있었다. 언론과 대중은 최종적으로 가해자(피고인)가 몇 년 형을 선고받는지에만 관심을 기울이기 때문이다. 그런 결과가 나오기까지 재판 과정에서 검사가 제 역할을 했는지에 대한 평가는 제대로 이뤄진 바가 없다. ‘조두순 아동 성폭력 사건’처럼 간혹 언론이 집중적으로 다루는 특정 사건에서만 검찰의 무능력이나 태만이 공론화된다.

판사 뒤에 숨어 있진 않았나

2020년에는 전국을 돌아다니며 ‘디지털성범죄’ 재판을 집중적으로 방청하고 모니터링했다. 디지털성범죄는 성범죄 사건 중 물증 확보가 용이한 편에 속한다. 그래서 가해자들이 수사 단계부터 자백하고, 이를 토대로 수사와 재판이 진행되는 일이 많다. 수사 단계에서 자백했으니 그것만 믿고 유죄 입증을 위한 물증 확보에 소홀한 것이다. 검사들은 기소 뒤 재판으로 넘어갈 때 공소장 작성을 대충 하거나, 공판 전 관련 수사기록물 검토도 건성으로 한다. 때로는 디지털성범죄 이해도가 낮은 상태에서 법정으로 들어선다.

입증이 형식적이다보니 판결 대응도 무성의하다. 예컨대 유죄가 인정되면 형량을 두고 상소하는 데 소극적이다. 수많은 디지털성범죄자가 이 과정을 거쳐 선처받았고, 방어 전략을 공유하며 수사기관과 법원을 비웃었다. 이후 더 대담하게 성착취와 성폭력을 저질렀다. 이에 대한 책임에서 검찰은 자유로운가? 판사 뒤에 숨어 있지 않다고, 적극적으로 입증하기 위해 노력했다고 말할 수 있는가?

외부 감시가 활발해지면서 재판부의 변화는 확연하다. 특별히 신경 쓰지 않았던 증거조사 방식 등을 고민하고 의견을 구하며, 피해자 보호를 위해 노력하는 모습을 보였다. 물론 재판부마다 편차가 있고 외부 감시가 소홀할 경우 관행대로 하지만 그래도 고민하는 듯하다.

공판검사는 그렇지 않다. 공소사실이 부정확하거나 법리 적용을 제대로 하지 않고, 절차적 하자에 대한 고민도 여전히 충분하지 않다. 양형 부분에서 피해자 의사를 제대로 확인하지 않거나, 디지털 매체와 환경, 관련 범죄에 무지한 모습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런 공판검사의 정체된 모습에 비해 가해자(피고인) 쪽 방어 전략은 다양해졌다. 수사 과정에서 자백으로 수사 진행을 막거나 최소 범위로 한정한 뒤 재판 과정에서 일부 혹은 전부 부인하는 방식을 택한다. ‘위법 수집증거 배제의 법칙’을 내세워 무죄를 주장하기도 한다. 양형과 관련해서도 감형을 위한 다양한 방식을 동원한다. 현직 판사 사이에서 유죄의 심증이 있어도 입증 책임이 있는 검찰이 제 역할을 하지 않아 무죄를 선고하거나 더 중한 형의 선고가 어렵다는 불만이 나오는 이유다.

검사는 피해자의 대변자이기도

재판 모니터링 교육을 할 때 공판검사가 제 역할을 하는지 감시하도록 방청 연대자들에게 요구했다. △공소장 내용을 잘 전달하는가 △공소사실에는 문제가 없는가 △증인신문 등 증거 조사 때 피해자를 보호하기 위해 노력하는가 △피해자 혹은 피해자 변호사와 적극적으로 소통하며 주변적·부수적·수동적 지위에 놓인 피해자의 입장을 전하기 위해 노력하는가 △입증을 위해 적극적으로 재판에 임하는가 △피고인 쪽 ‘2차 가해’에 적절히 대응하는가 등을 살피도록 강조한다.

특히 2021년에는 검경 수사권 조정 등 변화된 사법시스템 속에 검찰과 경찰에 대한 감시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있었다. 그러다 신임검사 대상의 강연을 제안받아 수용했다. 내부에서 변화 움직임이 있을 때 외부에서 조력해야 한다. 또 다른 변화의 시작으로 만들 필요가 있었다.

강연을 준비하면서 트위터로 수사와 재판 과정을 다룬 설문조사(80문항)를 했다. 6일이라는 짧은 기간에 30명 정도가 답변했다. 권위적인 검사 모습에 대한 지적이 많았고, 공판 과정에서 피해자와 소통이 전혀 안 되는 상황에서 입증하려는 노력을 찾아보기 어렵다는 문제제기가 이어졌다. 당사자 위치에 있지 못한 피해자를 위해 노력해달라고 당부하는 말도 많았다.

1월27일 법무연수원에 도착했다. 코로나19 방역으로 인원 제한이 있어, 세 군데로 나눠 강연이 진행됐다. 신임검사가 강연 대상이라 젊은 사람이 많이 보였다. 수사와 기소의 분리를 목표로 검찰 권위를 해체하기 위한 후속 작업이 진행되는 이때, 막 검찰에 들어선 이들은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수사권의 상당 부분이 경찰에 넘어간 지금, 이들은 경찰을 제대로 견제할 수 있을까. 공판이 더 중시되는 이때, 이들이 재판에서 범죄 입증을 위해 적극적으로 노력할까. 많은 생각이 스쳐갔다. 내 강연을 요약하면 이렇다.

“‘입증 책임은 검사에게 있다’라는 명제에 부합하게 공판 과정에서 제 역할을 해주시기 바랍니다. 법관이 유죄에 대한 심증이 있다고 하더라도 이를 검찰이 제대로 입증하지 못하면 사법절차를 통한 피해자의 회복은 요원해집니다. 형사사법 절차에서 배제된 피해자의 입장을 대변할 수 있는 이도 검사임을 잊지 마십시오.”

비판과 협업을 동시에

총 3부, 3시간으로 구성된 강연을 하면서 중간 휴식 시간을 이용해 강연 제안을 했던 법무연수원 교수와 짧은 대화를 했다. 전국을 돌아다니며 내가 분석했던 수사기관의 행태, 오랜 기간 검사로 활동하면서 그가 체감했던 한계와 변화 등에 대한 말을 주고받으며 사법시스템 신뢰를 구축하기 위해 노력할 것을 우리는 다짐했다. 욕하고 비난하기는 쉽지만 그것만으로는 변화를 끌어낼 수 없다. 비판과 협업은 동시에 진행할 수 있다. 판사들을 만났을 때도, 검사들을 만났을 때도 확신하는 부분이다. 앞으로도 검찰 감시를 멈추지 않을 것이다. 동시에 변화를 위해 협력도 할 것이다. 시스템이 제 기능을 해야 피해자, 약자, 소수자를 보호할 수 있다.

마녀 반성폭력 활동가

*디지털성범죄 피해자는 디지털성범죄 피해자지원센터(02-735-8994), 여성긴급전화1366으로 연락하면 불법 영상물 삭제, 심층 심리치료, 상담·수사, 무료 법률 지원 등을 받을 수 있다.

*‘너머n’ 아카이브(https://stopn.hani.co.kr/)에서 디지털성범죄를 끝장내기 위한 더 많은 이야기를 만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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