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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을 앞에 놓고도 이재용은 풀지 못했다

국정농단 사건 2년6개월 실형… 재판부 제시 준법감시위 실효성 확보 실패
등록 2021-01-22 16:32 수정 2021-01-23 01:24
국정농단 사건 파기환송심 선고가 열린 2021년 1월18일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서울 서초구 서울고등법원으로 들어서고 있다. 한겨레 김혜윤 기자

국정농단 사건 파기환송심 선고가 열린 2021년 1월18일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서울 서초구 서울고등법원으로 들어서고 있다. 한겨레 김혜윤 기자

“삼성그룹 내부에서 기업 총수도 무서워할 정도의 실효적인 준법감시제도가 작동하고 있었다면.”

서울고법 형사1부(정준영 재판장)의 사법 실험은 이 가정법에서 시작됐다. 2019년 10월25일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국정농단 뇌물공여’ 사건 파기환송심 첫 재판. 재판부는 삼성그룹에 실효적인 준법감시제도가 있었다면, 삼성그룹 총수와 최고위직 임원들이 가담한 횡령·뇌물 범죄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고 했다. ‘준법감시제’도가 이 사건 법정에 처음 등장한 날이다. 당일 언론은 재판장인 정준영 부장판사의 발언을 ‘이례적 당부’ ‘이상한 조언’으로 보도했지만, 준법감시제도는 이 부회장의 양형을 결정짓는 핵심 열쇠가 된다.

재판부, 준법감시제도 요구 ‘사법 실험’

그로부터 1년3개월이 흐른 2021년 1월18일, 이재용 부회장은 2년6개월 실형을 선고받고 법정 구속됐다. 삼성 준법감시위원회(준법감시위)를 설치하긴 했는데, 기업 총수도 무서워할 정도의 실효성은 없었기 때문이다. 숙제를 내주고 정답까지 알려준 ‘오픈북 시험’에서 이 부회장은 왜 낙제점을 받았을까. 재판부의 이례적인 사법 실험은 무엇을 남겼을까. 지난 재판의 주요 국면을 톺아봤다.

2011년 4월 상법 개정으로 자산 규모가 일정 수준 이상인 상장회사는 준법통제기준을 마련하고 준법지원인을 둬야 한다. 삼성그룹도 삼성전자를 비롯한 계열사에 준법지원인을 두었지만 유명무실했다. 재판부는 이를 지적하며 기존 준법감시시스템과 결합한, 더 강화된 형태의 준법감시제도를 마련하라고 이 부회장 쪽에 요구했다. 파기환송심에서 유무죄를 다투지 않고 양형을 줄이는 데 주력하기로 한 이 부회장 입장에서는 재판부 주문을 흘려들을 수 없었다. 2020년 1월9일 준법감시위가 출범했다. 삼성전자와 삼성물산을 포함한 관계사 7곳이 협약해 만든 회사 외부의 비상설기구로, 김지형 위원장(전 대법관)을 포함한 외부위원 6명과 내부위원 1명이 참여했다. 국정농단 특별검사(특검) 쪽은 강하게 반발했다. 재판부가 언급한 준법감시제도는 1991년 제정된 미국 연방양형기준 제8장에 나오는 양형 사유로, 피고인 ‘기업’이 실효적인 준법감시제도를 통해 재범 방지에 힘썼을 때 그 책임을 감경해주는 제도다. 이 부회장 사건처럼, 총수 일가의 이익을 추구한 ‘개인’ 범죄에는 적용되지 않는다. 피고인의 형을 정하는 조건(형법 제51조 4호) 중 하나인 ‘범행 후의 정황’에 해당한다고 해석해도, 한국에 비슷한 전례가 없었다. 준법감시위를 명분으로 한 집행유예 선고가 예상됐다.

2021년 1월18일 오후 서울 서초구 서울고등법원 앞에서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법정 구속이 확정되자 유튜버와 시민들이 환호하고 있다. 한겨레 백소아 기자

2021년 1월18일 오후 서울 서초구 서울고등법원 앞에서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법정 구속이 확정되자 유튜버와 시민들이 환호하고 있다. 한겨레 백소아 기자

특검 “총수도 무서워할 정도 아니다”

특검이 낸 재판부 기피신청은 서울고법-대법원에서 잇따라 기각됐다. 재판이 재개된 2020년 10월 특검은 전략을 수정했다. 재판부가 강조했듯 준법감시위가 “총수도 무서워할 정도로 실효적”이어야 한다는 점에 초점을 맞춘 것이다. 이 부회장 쪽은 특검 주장이 2021년 2월 법원 정기 인사로 재판부가 교체될 때까지 소송을 지연하려는 술수라고 맞섰다.

재판부는 준법감시제도의 실효성과 지속가능성을 점검하기 위해 전문심리위원 제도(형사소송법 제279조의2)를 시행했다. 진통 끝에 강일원 전 헌법재판관(재판부 직권), 홍순탁 회계사(특검 추천), 김경수 변호사(피고인 변호인 추천)가 전문심리위원으로 지정됐고 점검 항목을 합의했다.

‘한 번 포탄이 떨어진 곳에는 다시 떨어지지 않는다.’ 강 전 재판관의 말처럼, 최고경영진의 경영권 승계와 관련한 위법행위를 예방하려면 위법행위를 유형별로 예상·정리해 선제적으로 정의해둬야 한다. 그리고 위법행위 가능성이 인지되면 적절한 조처를 적시에 해야 한다. 이는 세 심리위원 모두 동의한 평가 기준이다. 이 기준에 따라 18개 세부 평가 항목이 추려졌다. 심리위원들이 2020년 12월7일 법정에 출석해 밝힌 의견과 보고서 주요 내용은 이러했다.

‘(국정농단 뇌물공여 범행 방식인) 대외 후원금에 초점이 맞춰진 준법감시 활동을 확인했습니다만, 새로운 위험을 정의하고 선제적 예방 활동하는 데는 이르지 못했습니다. 준법감시위가 독자적으로 운영되고 있으나 위원의 임기가 끝나면 독자성이 약해질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습니다. 결국 독립성과 실효성은 최고경영진의 준법 의지와 여론의 감시에 달려 있습니다.’(강일원)

‘최고경영자에게 배임 혐의가 있을 때 준법지원인이 최고경영진 사무실 문을 두드리면 조사하지 말아야 할 수만 가지 이유가 떠오르기 마련입니다. 그만큼 최고경영진에 대해선 준법감시제도가 작동하기 어렵습니다. 일반 임직원과 동일한 기준을 최고경영진에게도 적용하겠다고 하지만, 검찰에 의해 기소된 삼성물산 합병 사건과 같은 현안 감시조차 이뤄지지 않았습니다.’(홍순탁)

‘실효성도, 지속가능성도 아무 문제 없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삼성바이오로직스, 삼성증권 등 주요 계열사가 준법감시위 협약에 가입돼 있지 않아 오히려 준법감시위 출범의 진정성이 느껴지는 측면도 있습니다. 현실에 맞게 위원회를 운용하고 향후 관계사와의 업무를 확대해가는 게 옳다고 판단됩니다.’(김경수)

강일원 전 재판관 의견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2(부정) 대 1(긍정), 적어도 1(유보) 대 1(부정) 대 1(긍정)로 나뉘었다. 긍정 평가가 다수라고 할 수 없었다. 그 밖의 우려도 차고 넘쳤다. 위법행위의 컨트롤타워 삼성그룹 미래전략실 후신으로 의심되는 사업지원TF(2017년 11월 신설)는 실질적으로 모니터링되지 않았고, 1심 판결이 아직 선고되지 않았다는 이유를 들어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 사건 등은 조사되지 않았다. 삼성바이오로직스·삼성증권 같은 핵심 계열사는 준법감시위 레이더망을 벗어나 있었고 참여를 강제할 방법도 없었다. 준법감시위 권고사항이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해도, 대외 공표와 위원 총사퇴 외의 다른 수단이 없었다.

총수도 무서워할 정도의 실효성을 담보해야 하지만 그 실효성이 총수의 준법 의지에 달렸다는 모순적 심리 결과에도 불구하고 이재용 부회장 면담조사는 김경수 변호사의 반대로 실시하지 못했다. 일수로는 3일, 시간으로는 10시간 이내의 현장점검만 하는 등 조사 방법과 시간의 한계로 가장 기본적인 사항만 점검했음에도, 성역 없는 준법감시시스템이 갖춰지진 못했다는 결론이다.

막판 재판부가 준 마지막 기회

재판부는 12월21일 이 부회장에게 석명 준비명령을 내렸다. 1983년 12월부터 전두환-노태우-김대중-이명박-박근혜 정권까지 세대를 달리하며 지속된 삼성그룹 위법행위 8건을 나열한 뒤 “이와 관련해 법적 위험의 평가와 발생 원인 분석 및 방지 수단 마련이 어떻게 이뤄졌는지” 설명하라고 요구했다. 재판부는 관련 논문과 각종 원칙을 참고로 제시했고, 주요 부분에 밑줄까지 쳐줬다. 그룹 총수의 과거 범죄를 검토하고 재발 방지 시스템을 갖춰야 하는데 전문심리위원 평가에 그런 내용이 없다보니, 이 부회장 쪽에 ‘관련 내용이 정말 없냐’고 재차 확인한 것이다. 같은 날 진행된 재판에서 주심 강상욱 부장판사는 이 부회장 쪽에 이렇게 되물었다.

“이에 대해서 (더) 낼 게 있으세요?”(강 판사)

“현재 새로운 준법감시제도하에서 이런 위험이 통제될 수 있는지 석명을 구하시는지요.”(이 부회장 쪽 변호인)

“아니요, 질문을 바꿔 대답하지 마시고요. 불법행위의 원인과 대책을 분석하고, 그에 대한 법적 위험 평가가 이뤄졌는지요. 아무리 봐도 그런 내용을 찾을 수 없어서요. (중략) (5분여 휴정) 변호인 의견 말해보세요.”(강 판사)

“이런 과거의 위험들을 고려하지 않았다는 취지가 아닙니다. 이런 위험을 고려해서 만든 게 지금의 제도입니다.”(이 부회장 쪽 변호인)

변호인 대답은 재판부의 궁금증을 해소하지 못했다. 재판부는 12월24일까지 관련 답변을 서면으로 제출하라고 했다. 그러나 이 부회장 쪽 변호인이 낸 의견서에 핵심은 없었다. 12월30일 결심공판 전날에야 사업지원TF와 합병 사건 등을 특별 점검하겠다는 의견서를 추가 제출했지만 제출 기한(24일)을 넘겼다는 특검 쪽 지적에 의견서는 바로 반환됐다.

특검 쪽의 발언이다. “지금의 준법감시위가 총수도 무서워할 정도의 것인가. 이 질문에 예스라고 대답할 사람은 객관적, 상식적이며 통상의 지능을 가진 사람 중에선 찾을 수 없다고 단정할 수 있습니다. 피고인 입장에서 봤을 때 제도 보완의 시간을 달라고 요청해야 하는데 그러지도 않았습니다.”(12월21일 재판)

결국 재판부는 이 부회장의 준법 경영 의지는 인정하면서도 준법감시위의 실효성이 없어 이를 양형에 반영할 수 없다고 설명하고 실형을 선고했다. 삼성그룹 총수는 집행유예로 풀려난다는 오래된 도그마(신념이나 학설)를 깨버린 것이다. 그러나 논란은 남는다.

법정형 하한선의 절반 그친 형량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상 50억원 이상 횡령 때 법정형은 최대 무기징역, 최소 5년 이상 징역이다. 양형기준을 적용한 권고형은 징역 4년~10년2개월이다. 재판부는 양형기준을 적용하지 않았다. 작량감경(법관의 재량에 따른 형의 감경)을 적용해 법정형 최고 하한선인 5년의 절반을 이 부회장에게 선고했다. 재판부는 “대통령이 뇌물을 요구하는 경우 이를 거절한다는 건 매우 어려운 측면이 있다”고 그 이유를 설명했다. 2019년 8월 “대통령의 뇌물 요구에 편승해 적극적으로 뇌물을 제공했다”고 본 대법원 국정농단 판결과 배치된다.

고법 부장판사의 자유재량이 사회 합의를 벗어났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보여줬다는 평가가 나오는 이유다. 사형, 무기 또는 10년 이상의 징역이나 금고가 선고된 사건에 한해서만 양형부당을 이유로 상고할 수 있다. 이번 사건에서 고법 재판부가 양형 판단의 최종 권한을 쥔다. 준법감시제도만 하더라도 고법 부장판사의 재량과 권한에 근거한 사법 실험이었다. 재판부의 선의와 달리 최고경영진의 위법을 기업 내부 통제로 예방하는 게 어렵다는 씁쓸한 깨달음만 남겼지만.

고한솔 기자 so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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