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적장애녀’ ‘성폭행 주장녀’ ‘미투녀’ ‘몰카’ ‘음란물’.
2021년 1월 현재 성폭력 사건을 다룬 기사 제목이다. 성폭력 사건 보도 때 ‘○○녀’ 지양, ‘몰카’ 대신 ‘불법촬영’, ‘음란물’ 대신 ‘성착취물’로 표현하기는 합의된 원칙으로 생각했으나 기대가 너무 컸다. 이렇게 퇴행하는 언론 모습을 볼 때면 ‘기레기’(기자+쓰레기)라는 이름을 언론이 기꺼이 뒤집어쓰는 것이 아닌가 의심하게 된다.
‘#뉴스기사_남성성별_표기운동’이라는 해시태그로 기사 속 성별 표기 불균형에 문제제기를 했던 2015년에서 벌써 6년이 흘렀다. 성폭력·교제폭력·살인 등 여성 대상의 강력범죄를 다루는 언론 보도를 살펴보니, 제목·이미지·본문 등 기사를 구성하는 3대 요소 곳곳에서 두루 문제점이 발견됐다. 문제 기사는 이렇게 만들어졌다.
과거만 해도 한국 언론은 기사 제목에 ‘묻지마강남녀·트렁크녀·성폭행녀·대장내시경녀·박카스녀’ 등 살인, 성폭력 등 강력범죄 피해자를 ‘○○녀’로 표기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의인일 때도 여성이면 ‘심폐소생술녀’ 등 성별을 부각하는 표현이 사용됐다. 물론 시민들의 문제제기 끝에 2018년 10월 연합뉴스가 기사에 ‘여성차별적 성별 표기’를 안 하기로 결정했다는 소식이 들렸으나, 2021년 현재도 국가 기간 통신사라는 연합뉴스와 언론사들의 변화는 더디기만 하다.
기자 혹은 데스크의 왜곡된 관점이 반영된 제목으로 인해 사건은 가볍게 대중에게 전달된다. 추행이나 강간 등 명확한 범죄명을 적는 대신 ‘나쁜, 못된, 몹쓸’ 등의 수식어를 활용하거나 영화나 웹툰 제목을 활용해 장난스럽게 표현하기도 한다. 온라인상에서 통용되는 각종 ‘밈’을 쓰기도 한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도와줄까?’ 여고생에 은밀한 스킨십 매점업주 집행유예’(2018.02.11.) 이 기사는 가해자 말을 상상해 인용하면서 성별과 직업 등 피해자 정보를 부각하는 한편, 성추행 행위를 ‘은밀한 스킨십’으로 표현했다. ‘짝사랑 여성 집 앞에서 폭발물 터트린 20대… 경찰 “자해 추정”’(2020.10.19.) 인명 피해까지 예견됐던 ‘스토킹’을 ‘짝사랑’이라 표현했다.
특히 기사 제목에 인용부호를 넣어 사건을 설명하는 방식을 언론사가 많이 취하는데, 대부분 인용부호 속 내용은 가해자 발언이거나 가해자 입장을 기자가 멋대로 정리한 것이다. 가해자의 일방적 주장만 강조하면서 사건에 편견을 갖게도 하지만, 가해자에게 우호적인 여론을 형성하며 피해자에게 책임이 있다는 식으로 표현하거나, 사건의 심각성을 훼손해 가볍게 인식하게 한다. ‘“한잔 했더니 갑자기 성욕이…” 4시간 새 ‘묻지마 성폭행’ 3차례 시도한 40대 검거’(2019.10.31.) 인용부호 속 발언을 가해자가 하지 않았음에도 부각하고, 성폭력을 음주와 성욕의 문제로 돌렸다. 아울러 ‘묻지마 성폭행’이라는 부적절한 표현으로 연쇄 성폭력 범죄의 성격을 왜곡했다.
가해자 시선 드러내는 이미지와 서사 전개한국 다수 언론사는 픽사베이, 게티이미지뱅크 등에서 확보한 이미지를 그대로 사용하거나 가공해 여성 대상 폭력을 묘사해왔다. 물론 MBN처럼 아예 독자적인 일러스트를 만드는 경우도 있고, 실제 사건 자료를 모자이크 처리해 내보내기도 한다. 그런데 그 이미지가 대부분 폭력적이고 부적절하다. 범죄 장면을 관찰하는 시선으로 재현하거나, 피해자의 고통과 상처를 비극적으로 소비하면서 무력한 피해자 모습을 강조한다. 가해자는 강력한 힘을 가진 존재 혹은 악마처럼 묘사하거나 신체 일부만 드러내고, 나아가 비인간적인 모습으로 표현하기도 한다.
실제 자료를 활용할 때는 피해자 정보 가 노출되는 등 피해자 보호에 신경 쓰지 않거나, 자체 일러스트를 활용할 때도 범죄 장면을 피해자 중심으로 상세히 묘사하는 방식을 택하곤 했다. 언론사들이 활용하는 이미지는 그 자체로 추가 가해행위일 뿐만 아니라, 그 전형성으로 인해 피해자와 가해자 상을 왜곡할 수 있다. 사건을 흥밋거리로 전락시킨다. 활자만큼 메시지 전달 효과가 큰 이미지를 몇몇 언론사를 제외하고는 여전히 고민 없이 활용하는 실정이다. 2015년에 봤던 이미지를 2021년 현재도 계속 보고 있다.
2020년 디지털성범죄자, 살인자 등의 신상공개가 이어지면서 가해자 서사를 중심으로 자극적인 기사를 작성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사건과 관계없는 가해자 일상을 에피소드처럼 구성하거나 가해자의 일방적인 말을 여과 없이 대중에게 던짐으로써 가해자에 대한 온정적 시각과 몰입을 유도한다. 아울러 가해자를 일반인과 분리되는 ‘악마, 소시오패스’ 등으로 표현해 일상화한 성범죄 등에 대한 총제적이고 깊이 있는 고민과 해결을 가로막기도 한다. 이는 성폭력 재판을 보도할 때도 마찬가지다. 법정 내에서 쌍방의 의견을 다 들을 수 있을 때도 가해자(피고인)의 입장만을 부각해 본문을 구성하기도 한다.
반대로 해당 사건의 책임이 피해자에게 있다는 내용은 여전히 존재한다. ‘전형적인 피해자상’(무력하며 고통에 빠져 있는 피해자)을 부각하는 차원에 머물러 있을 뿐, 피해자 목소리를 반영하지 않는다. 피해자를 보호하기 위한 적절한 조치를 하지 않아, 피해자 신상을 유추할 수 있는 정보를 그대로 내보내기도 한다.
왜 가해자 주장이 피해자 호소보다 앞서는가. 기자들은 피해자에 대한 접근이 어렵다는 핑계를 댄다. 피해자 연대활동을 하다보니 내게 피해자 연결을 요청하는 기자들이 있다. 그런데 피해자에게 접근할 때 피해자의 상태, 상황에 대한 이해가 전제된 상태에서 사전 준비를 하고 접근하는 기자가 드물다. 기자에게 피해자와 인터뷰하기 위해서는 ‘기획의도―사전 질문지―(사실관계 한정해) 수정 요청’을 요구하는데, 이조차 제대로 준비하고 지키는 기자를 찾는 게 쉽지 않다.
그렇다면 지침은 없는가? 아니다. 한국기자협회의 ‘성폭력 관련 정관’(2012년), ‘성폭력 사건 보도수첩’(2014년), ‘성폭력·성희롱 사건, 이렇게 보도해주세요!’(2018년) 등 보도 준칙과 지침은 존재한다. 그러나 언론이 지키지 않는다.
물론 2015년을 기준으로 놓고 봤을 때 변화가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일부 언론사이기는 하지만 젠더 데스크 구성, 전문기자 양성 등 내부에서 변화 움직임이 있는 곳도 있고, 과거에 비해 피해자를 취재할 때 사전 준비하는 기자들도 있다. 그러나 문제는 여전하다. 2015년 이후 언론을 대상으로 한 각종 문제제기에 ‘관행’이라며 되받아쳤던 언론사들에 여성계가 결국 사과를 받아내고 변화를 끌어왔던 것처럼, 앞으로도 외부 감시를 지속할 필요가 있다. ‘언론’이 제구실해야 피해자의 회복과 일상 재구성도 앞당겨질 수 있다.
마녀 반성폭력 활동가
*디지털성범죄 피해자는 디지털성범죄 피해자지원센터(02-735-8994), 여성긴급전화1366으로 연락하면 불법 영상물 삭제, 심층 심리치료, 상담·수사, 무료 법률 지원 등을 받을 수 있다.
*‘너머n’ 아카이브에서 디지털성범죄를 끝장내기 위한 더 많은 이야기를 만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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