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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7일] “밥이나 먹자”던 만남에서 시작된 ‘너머n’ 기획

너머n, 불안했고 뭉클했고 깨달았다
등록 2020-12-21 18:03 수정 2021-03-31 13:54
7개월 동안 디지털성범죄를 취재한 결과를 담은 <한겨레21> 통권호(제1340호)를 들고 있는 방준호·장수경·고한솔 기자(왼쪽부터). 한국기자협회보 제공

7개월 동안 디지털성범죄를 취재한 결과를 담은 <한겨레21> 통권호(제1340호)를 들고 있는 방준호·장수경·고한솔 기자(왼쪽부터). 한국기자협회보 제공

사람 눈에는 보이지도 않는 작은 바이러스가 온 세상을 쥐고 흔든 2020년이 지나간다. 코로나19로 누구는 생명을 잃고 누구는 직장을 잃었다. ‘비대면’이 시대정신이 돼버린 세상을 거리두기, 모임 금지, 폐쇄와 봉쇄 같은 흉흉한 언어가 지배한다. 끝은커녕 진정될 기미조차 보이지 않는 이 ‘전 지구적 유행’(팬데믹)이 사그라지더라도 우리는 코로나 이전 일상으로 돌아가지 못할 것이다.
그럼에도 고개 숙이고 눈물만 흘린 2020년은 아니었다. 우리 삶을 더 높고 밝은 곳으로 밀어올리기 위한 싸움 또한 지속됐다. 장애나 성적 지향, 정치 성향, 종교 등을 이유로 한 어떤 차별도 허용하지 말자며 ‘차별금지법’을, 노동자가 일터에서 죽지 않고 안전하게 일할 수 있게 하자며 ‘중대재해기업처벌법’을 도입하려는 시민들의 움직임이 활발했다. 여성을 무자비한 착취 대상으로 삼은 ‘텔레그램 n번방’ 사건의 범인들을 사법의 심판대에 올렸다.
고난과 희망이 교차한 2020년, <한겨레21> 독자에게 생생한 정보를 전한 취재원과 필자 19명이 ‘올해의 하루’를 일기 형식으로 보내왔다. _편집자주
6월7일 일요일

“가족이나 주변에 도움 요청을 할 수 있었나요?” “가해자들을 어떻게 만나게 됐….” 5월29일 그와 연락이 된 뒤 몇 번이나 질문을 쓰다가 지우기를 반복했다. 그는 유사 n번방 피해자이며 청소년이다. 그런 그에게 무슨 질문을 할 것인가. 어떻게 질문할 것인가. 내 질문이 가까스로 아물어가는 그의 상처를 다시 헤집는 것은 아닐까. 인터뷰를 준비하며 질문 한 문장을 쓰는 게 이토록 버거울 때가 없었다. 며칠 고민한 끝에 내린 결론은 만나서 그냥 편하게 ‘밥이나 먹자’였다. 그렇게 6월7일 오후 1시, 서울 마포구 상수동의 한 카페 앞에서 그를 만났다.

‘코로나가 구원자’라던 지오

그가 뱉은 첫마디는 “마스크를 쓰고 다닐 수 있어 다행이다”였다. 그는 자신을 알아보는 사람이 있을까봐 늘 걱정했다. 코로나19가 그에겐 익명성을 보장한 구원자였다. 먹고 싶은 것 있냐는 물음에 “아무거나”를 반복하던 그는 먹고 싶은 것도, 하고 싶은 것도, 재미있는 일도 모두 “없다”고 했다. 함께 간 식당에서 그는 음식의 3분의 2 정도를 남겼다. 무기력한 듯한 그가 잠깐씩 웃어 보일 때는 집에서 기르는 반려견과 그를 돕는 사람들을 언급할 때뿐이었다. 제1317호에서 다 하지 못한 강지오의 이야기다.

지오는 가족을 제외한 사람들과 트위터 다이렉트메시지(DM·쪽지)로 연락한다. 지오가 디지털성폭력을 당했다는 사실을 안 부모가 그의 휴대전화를 감시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지오의 휴대전화에 앱을 깔아 누구와 통화하고 문자메시지를 주고받는지 확인한다는 것이었다. 가족 안에서 보호받기보다 통제당하는 지오의 상황을 보며, 범죄의 책임을 피해자에게 지우는 사회와 닮았다고 생각했다. 트위터라는 익명의 공간에서 디지털성폭력 피해를 입었던 그가, 사람을 만나기 위해선 또다시 트위터에 접속해야 하는 상황이 아이러니했다.

2020년 초 텔레그램 성범죄 이슈가 한국 사회를 휩쓸고 간 뒤, 언론이나 사회의 관심이 시들해졌을 즈음 <한겨레21>은 ‘디지털성범죄 끝장 프로젝트 너머n’ 기획을 시작했다. 텔레그램에서 ‘박사방’을 만든 조주빈(닉네임 박사)이 잡힌 지(3월) 한 달가량 지난 4월이었다. ‘디지털성범죄’라는 단일 주제로 잡지 한 권(통권호)을 만들고, 디지털성범죄에 대한 관심의 불이 꺼지지 않게 하기 위해 관련 기록을 꾸준히 업데이트하는 아카이브(기록보관소)를 만드는 것이 목표였다. 지오가 온라인 그루밍(상대방과 유대관계를 형성한 뒤 저지르는 성범죄)으로 디지털성착취를 당한 이야기는 <한겨레21>이 기획을 시작한 뒤 처음 문제 제기한 기사였다.

피해자가 밝히길 원치 않는 피해 내용을 구체적으로 묻지 않을 것. 기획을 시작하며 동료(고한솔·방준호 기자)들과 정한 대원칙이었다. 기획 초점은 ‘n번방 이후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인가’였다. 범죄 수법을 상세히 다룬 자극적인 내용의 기사가 많이 나온 터라, 범죄 양상에 주목하지 않는 대신 사회구조와 제도를 중심으로 풀어가기로 했다.

피해자들을 지원하는 한국성폭력상담소와 한국사이버성폭력대응센터, 십대여성인권센터를 시작으로 경찰, 변호사, 교수, 연구원, 교사 등을 만나고 토론회를 다니면서 잡지와 아카이브에 담을 내용을 구체화해나갔다.

법원이 선고하거나 검찰이 구형하는 재판만 봐서는 사건을 총체적으로 파악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경북 안동, 강원도 춘천, 인천, 경기도 수원, 서울 등으로 가능하면 가해자들의 모든 재판을 방청하려고 했다. 주간지의 특성상 매일 기사를 쓰지 않는 덕이었다. 법원에 가면 재판을 방청하러 온 여성이 없던 적이 없었다. 시간과 비용을 들여 법정에 오는 그들의 연대에 가슴이 뭉클했다.

가평 지날 때 울린 랜덤채팅앱 “가평?”

반대로 “이 와중에 아직도”라는 말이 나온 경험도 있다. 5월 춘천에서 ‘프로젝트N’ 운영자 로리대장태범의 재판을 방청한 뒤, 기차를 타고 서울로 돌아오던 길이었다. 경기도 가평을 막 지나던 때, 취재를 위해 깔아뒀던 랜덤채팅앱에서 알림이 울렸다. “가평?” 위치를 기반으로 인근에 있는 가입자를 연결하는 앱이기에 한 남성이 물었다. 자신을 30살이라고 소개한 그는 내가 16살이라는데도 “보고 싶다” “밥 사줄게”라며 만나자고 했다. “만나기 싫다”는 말에 “너를 찾으면 오늘 나랑 가는 거임?”이라는 답이 왔다. 그가 나를 찾을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설마’ 하는 불안감이 들었다. 피해자들이 이렇게 낚일 수 있겠다 싶었다.

전국을 다니며 재판을 방청하고 박주민 더불어민주당 의원실 덕에 구한 문형욱(갓갓), 강훈(부따), ‘프로젝트N’ 로리대장태범 등의 공소장을 통해 범죄의 특성을 이해할 수 있었다. 공소장에 적힌 범죄는 그동안 기사에서 본 것보다 훨씬 더 잔혹했지만, 피해자들에게 피해를 상기시킬 만한 내용을 기사에 담을 수는 없었다. 대신 텔레그램 성범죄 조직도를 그리며 조직적으로 이뤄진 범죄를 드러내려 노력했다. 그리고 기획을 시작한 지 약 7개월 만인 2020년 11월23일 <한겨레21>은 디지털성범죄 아카이브(stopn.hani.co.kr)를 열고, 12월7일 디지털성범죄 통권호 제1340호를 발행했다.

잡지와 아카이브 모두 시작은 ‘여성의 연대’다. 잡지는 연대자들의 릴레이 인터뷰로, 아카이브는 거미줄로 촘촘히 얽힌 ‘가해의 n’을 여성들이 끊어내는 인트로로 문을 열었다. 의미는 간명하다. 법의 개정을 이끌고, 수사기관을 압박하고, 피해자의 손을 잡으며 지금까지 사회를 바꿔온 건 여성들이었다는 의미다. n번방 사건이 이슈화한 뒤에도 계속되는 디지털성범죄를 보고, ‘세상은 변하지 않는다’고 말하며 지치는 것을 경계하자는 뜻이기도 했다.

<한겨레21>의 너머n 기획을 함께한 eNd(N번방 성착취 강력처벌 촉구시위팀)는 “긴 시간 동안 끊임없이 사건을 알리고 저희의 목소리를 담아주셔서 저희도 포기하지 않고 계속 싸울 수 있었다. 앞으로도 저희는 쉬지 않고 디지털성범죄와 싸울 것이다”라며 전자우편을 보내왔다. 너머n 아카이브에서 너머n 취재를 후원한 이들도 연대 메시지를 남겼다. “1은 작지만 1들이 모여 ‘연대의 n’을 이룰 수 있도록 그 걸음에 함께하겠습니다.” “깊게 박힌 그들의 생각이 분명히 잘못된 것임을 인지시키고 대물림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함께합니다. 고맙습니다.” “계속해서 주목하고, 변화를 위해 함께하겠습니다.”

잡지 한 권이 나오기까지

“범단죄(범죄단체조직죄) 인정됐고 조주빈 40년형 선고.” 11월26일 오전 10시40분, 서울중앙지법에서 조주빈의 1심 선고공판을 방청하던 고한솔 기자가 단체대화방에 글을 올렸다. 검찰의 무기징역보다 낮은 형량이 구형됐지만, 불과 1년5개월 세계 최대 아동성착취물 아카이브를 운영한 손정우가 징역 1년6개월형이 확정된 것과 비교하면 세상은 많이 달라졌다. 변화는 연대를 통해 일어난다. 지난 7개월 동안 취재하면서 새삼 깨달았다. <한겨레21>은 기록하는 것으로 끝까지 연대한다. 너머n 아카이브에는 지속해서 관련 기사와 정보가 업데이트된다. <한겨레21>의 ‘디지털성범죄 끝장 프로젝트 너머n’ 취재 후원은 아카이브(stopn.hani.co.kr/news)에서 할 수 있다.

장수경 기자 flying710@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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