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에도 고개 숙이고 눈물만 흘린 2020년은 아니었다. 우리 삶을 더 높고 밝은 곳으로 밀어올리기 위한 싸움 또한 지속됐다. 장애나 성적 지향, 정치 성향, 종교 등을 이유로 한 어떤 차별도 허용하지 말자며 ‘차별금지법’을, 노동자가 일터에서 죽지 않고 안전하게 일할 수 있게 하자며 ‘중대재해기업처벌법’을 도입하려는 시민들의 움직임이 활발했다. 여성을 무자비한 착취 대상으로 삼은 ‘텔레그램 n번방’ 사건의 범인들을 사법의 심판대에 올렸다.
고난과 희망이 교차한 2020년, <한겨레21> 독자에게 생생한 정보를 전한 취재원과 필자 19명이 ‘올해의 하루’를 일기 형식으로 보내왔다. _편집자주
오늘 인천지방법원에서 텔레그램 성착취 사건의 주범인 강아무개(‘잼까츄’)에 대한 재판을 방청했다. 재판이 끝난 뒤 법정 밖에서, 변호사를 동반한 강씨 가족이 ‘eNd’(N번방 성착취 강력처벌 촉구시위팀)를 포함한 여성 방청 연대자들을 붙들고 ‘강씨의 불우한 가정환경을 들어달라’고 말했다. 여성 연대자들이 이를 거부하자 강씨 가족은 폭언을 내뱉었다. 또 여성 연대자들이 재판 내용을 손으로 옮겨 적은 메모를 강탈해 훼손했다. 특히 나를 향해서는 ‘○○○ 없는 년’이란 욕설을 내뱉었다고 한다. 당시 나는 급히 이동하려 법원을 떠난 터라 직접 욕설을 듣지는 않았다.
내가 향한 곳은 경기도 고양시 사법연수원이었다. 젠더법연구회·사법연수원 주최로 열린 ‘젠더와 법, 그리고 법원’(법관 전문 분야 연수) 종합토론회에서 토론자 중 한 명으로 서기로 했다. 디지털성범죄 근절을 위해 활동하는 DSO(디지털성범죄 아웃)와 ReSET(리셋)의 전·현직 활동가들도 발제자와 토론자로 함께했다. 버스로 이동하면서 전문성을 갖춘 젊은 여성 활동가들이 판사들과 만나는 이 순간을 위해 노력했던 지난 6개월이 떠올랐다.
2019년 말 서울서부지방법원에서 젠더법연구회 인터뷰단의 인터뷰 요청을 받고 판사 20명 정도와 만난 적이 있다. 그 자리는 “법정 밖에서 성폭력 피해 생존자와 판사들이 만난 최초의 기록”(법원 젠더법연구회 웹진 <모진만남>)이었다. 그날 인터뷰에서 ‘디지털성범죄’를 많이 언급했기에 판사들이 언젠가 다시 디지털성범죄를 본격적으로 다룰 거라고 예상했다.
2020년 3월 인터뷰단 소속 판사에게서 다시 전자우편을 받았다. “디지털성폭력 관련 인터뷰 내지 좌담회와 관련해 혹시 추천해주실 분이 있는지요.” 나는 ‘몇 명이 필요하냐’고 묻고선 바로 DSO의 전 대표 하예나(활동명)씨에게 연락했고, 하예나씨에게 ReSET과의 연결도 부탁했다. 날이 갈수록 진화하는 디지털성범죄를 제대로 알리려면 성착취 사이트 소라넷 폐쇄를 이끈 DSO의 경험과, 2020년 ‘n번방’으로 대표되는 신종 디지털성범죄를 근절하려 싸우는 ReSET의 분석 모두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한 달여 뒤인 4월25일, DSO의 하예나·백가을, ReSET의 최서희(활동명)·재영(활동명), 이 전·현직 활동가들을 대상으로 한 판사들의 인터뷰가 온·오프라인으로 동시 진행됐다. 인터넷망·애플리케이션에 대한 설명, 디지털성범죄 역사, 수사·재판·피해자대응에서 문제점 분석, 각국의 디지털성범죄 대응 등 다양한 주제를 현장 경험을 살려 효과적으로 다뤘다. 예정된 4시간이 너무 짧게 느껴질 정도였다.
오늘 사법연수원에서의 종합토론회는 젊은 여성 활동가와 디지털성범죄에 관심 있는 판사들이 6개월 동안 함께 만들어낸 후속 작품과도 같다. 활동가 5명은 발제자·토론자로 판사 42명 앞에 섰다. 낯선 시도였다. ‘잘’ 해내야 했고, 결국 ‘잘’ 해냈다. 20분씩 이어진 두 번의 발제 중 ‘디지털네이티브 세대의 디지털성폭력’(백가을)에선 디지털 세대의 특성과 함께 여성과 아동이 이 환경에서 어떤 과정을 거쳐 디지털성범죄 피해자가 되는 취약한 위치에 있게 되는지 등을 설명했다. ‘디지털성범죄 실태보고’(재영)에서는 디지털성범죄가 일어나는 다양한 플랫폼에 대한 소개부터 범죄 유형, 수사와 재판의 한계 등까지 압축적으로 전달했다.
토론 시간이 이어졌다. 영상 삭제를 유리한 양형 이유로 삼는 것은 어떤지, 디지털성범죄 피해자들의 피해 정도가 어떤지, 몰수·폐기 명령이 유의미한지, 디지털성착취물과 저작권법위반물의 모니터링·심의·삭제·필터링 등은 어떻게 같고 다른지 등 다양한 질문과 답변이 오갔다. 그 끝에 한 판사가 마지막 질문을 던졌다. “디지털성범죄가 이미 사회화되었다면 ‘어린 가해자’들에게만 책임을 묻는 게 합당한 것일까요?”
5명 활동가 모두 서로 답변하겠다고 나섰다. ‘어린 나이’가 감형 요건임을 모두 ‘알고 하는 행동’이라고 입을 모았다. 나는 마지막으로 답했다. “현재 미성년 피고인들의 형량을 걱정할 때가 아니지 않나. 엄벌받은 피고인도 없거니와 그 전에 성인 피고인들에 대한 처벌을 법원에서 어떻게 해왔는지 돌아봐야 하는 것 아닌가.” 전문성을 갖춘 활동가들의 발제, 이들의 말을 경청하는 판사들. 그 자리가 변화의 시작이었다.
짧은 하루였지만 여운은 길었다. 현실 속 재판에서도 그날의 경험이 반영됐다. 2020년 10월 울산에서 피고인 12명이 장애인이 포함된 미성년 여성들을 대상으로 성착취·성폭력을 저질렀던 사건의 1심 선고가 있었다. 담당 재판부는 ‘자발적 성매매’를 강조하는 피고인들의 방어 논리를 배척하는 근거로, 5월19일 발제 중 하나였던 ‘디지털네이티브 세대의 디지털성폭력’을 거론했다. 이 재판부가 쓴 판결문은 ‘민주화를 위한 변호사모임’에서 뽑은 디딤돌 판결로도 선정됐다. 이렇게 판사들과 활동가들의 만남은 현실 속 시스템을 변화시켰다. 법은 느려도 판사는 느리면 안 된다. 그 노력을 활동가들이 감시하며 뒷받침할 것이다.
잼까츄 재판에서 피고인 가족의 대응을 듣고 난 뒤, eNd의 공식적인 대응에 협조하는 것에서 나아갈 방안을 모색했다. 10~30대 여성으로 구성된 연대자들을 보호하고, 원활한 재판 진행을 도와 공개재판의 의의를 실현하기 위한 방법을 구상했다. 전국 법원에서 진행한 재판 모니터링 교육 프로그램 ‘찾아가는 연대, 재판 모니터링 교육(TMT)’이 그것이다. 그렇게 eNd를 비롯한 방청 연대자들은 전국 법원에서 감시·기록·목격자로서 지켜보고 있다.
2020년을 시작하며 나는 ‘연결어미’로서 다른 활동가들을 뒷받침하는 역할을 하겠다고 다짐하며 활동명을 ‘마녀’에서 ‘연대자 D’로 바꾸었다. 그 다짐을 실천하기 위해 일반인 대상의 재판 모니터링 교육을 공개·확대하고 활동가와 판사를 이어주는 역할도 충실히 했다.
당신에게 말한다. 2021년에는 함께해보자. 외부에서 비난만 할 것이 아니라 내부의 변화 움직임을 응원하고 지지할 것이다. 희생을 당연시하는 연대와 활동은 지양할 것이다. ‘사이다’는 현실에 없다. ‘저절로, 알아서, 당연히’ 오는 변화는 없다. 그래도 바뀐다. 바꿀 수 있다. 그러니 함께 바꾸자.
마녀 반성폭력 활동가
*‘너머n’ 아카이브(https://stopn.hani.co.kr/)에서 디지털성범죄를 끝장내기 위한 더 많은 이야기를 만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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