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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이 환영할 줄 “몰랐다”는 국회의원들에게

20대 국회에서 산업기술보호법 개정, 21대에서는 ‘삼성전자 국가핵심기술 유출 방지법’ 발의
등록 2020-11-15 20:05 수정 2020-11-19 09:43
2020년 3월5일 서울 종로구 재동 헌법재판소 앞에서 삼성전자 반도체 공장 노동자의 직업병 문제 해결을 위해 힘써온 ‘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 지킴이 반올림’ 활동가 등이 2019년 8월 국회에서 통과된 개정 ‘산업기술의 유출방지 및 보호에 관한 법률’이 국민의 알 권리와 건강권을 침해해 위헌이라는 내용의 행위극을 하고 있다. 한겨레 김정효 기자

2020년 3월5일 서울 종로구 재동 헌법재판소 앞에서 삼성전자 반도체 공장 노동자의 직업병 문제 해결을 위해 힘써온 ‘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 지킴이 반올림’ 활동가 등이 2019년 8월 국회에서 통과된 개정 ‘산업기술의 유출방지 및 보호에 관한 법률’이 국민의 알 권리와 건강권을 침해해 위헌이라는 내용의 행위극을 하고 있다. 한겨레 김정효 기자

산업기술보호법(산업기술의 유출방지 및 보호에 관한 법률)은 국가적으로 중요하다고 판단되는 산업기술을 ‘국가핵심기술’로 지정해 그 기술의 부당한 국외 유출을 방지하기 위한 각종 장치를 마련했다. 그런데 삼성은 이 법을 악용해 반도체 공장의 작업환경 문제를 은폐하려 했다. 관련 문서의 정보공개를 요구하자 ‘국가핵심기술’이 사용되는 공장에 관한 자료이므로 ‘국가핵심기술 관련 자료’라서 공개할 수 없다는 논리를 폈다.

다행히 법원은 삼성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법에 이 논리를 정당화할 규정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해서 삼성의 화학물질 관리 문제를 드러낸 고용노동부의 ‘특별감독 보고서’(2013년 작성)와 ‘안전보건진단 보고서’(2013년), ‘특별감독 보고서’(2018년) 등이 2017~2018년에 걸쳐 공개될 수 있었다.

“그런 법인 줄 전혀 몰랐지요”

그런데 2019년 10월 삼성 반도체 공장 ‘작업환경측정결과보고서’(이하 작업환경보고서) 공개 여부를 다투는 소송에서 삼성 쪽 변호사가 대뜸 이상한 주장을 했다. “이 사건 때문에 법이 바뀌었다.” “이 사건 논란은 입법적으로 해결됐다.”

무슨 말인가 싶어 찾아보니, 정말 법이 바뀌어 있었다. 산업기술보호법에 ‘국가핵심기술 관련 정보 공개 금지’(제9조의 2) 조항이 신설된 것이다. 이미 2018년 4월 산업통상자원부는 삼성 반도체 공장 작업환경보고서가 국가핵심기술을 포함하고 있다는 판정을 내린 터였다. 그리고 우리가 모르는 사이 같은 해 5월 국회의원들은 산업기술보호법 개정안을 발의하기 시작했고 급기야 2019년 8월 법을 바꿔버렸다. 삼성 반도체 공장의 작업환경 문제가 ‘국가핵심기술 관련 자료’라는 이유로 은폐될 수 있는 합법적 길을 터준 것이다.

시민사회는 서둘러 산업기술보호법 대책위원회를 만들어 이 법을 ‘삼성보호법’으로 규정하고 2020년 3월 헌법소원을 청구했다. 21대 국회에 산업기술보호법 재개정을 촉구하기도 했다.

국회의원들은 법안의 문제점을 전혀 몰랐을까? 2019년 8월 산업기술보호법 개정안이 국회 본회의에서 통과될 때 단 하나의 반대표도 나오지 않았다. 일부 의원에게 그 이유를 따져 묻자 허탈한 답이 돌아왔다. “그런 법인 줄 전혀 몰랐지요.” 대책위는 국회의원들의 공개 사과부터 끌어내고 싶었다. ‘몰라서’ 저지른 잘못이니 “몰랐다”는 말부터 해야 했다. 때로는 “몰랐다”는 말이 가장 부끄러울 수 있지만 그들은 그 부끄러움을 피하지 말고 감내해야 했다. 예상했듯 의원들은 공개 사과를 꺼렸다. 잘못을 인정하면 정말 잘못한 것이 되고 만다고 생각하는 비겁함이 엿보였다. 특히 ‘삼성 비판’에 앞장섰던 정의당과 더불어민주당 의원들 중 누가 더 비겁했는지 우리는 똑똑히 기억한다.

고민정 의원 등 더 나쁜 ‘삼성보호법’ 발의

총대 메고 나서는 의원이 없어 국회의원의 공개 사과는 무산될 뻔했다. 그때 우원식 민주당 의원이 나섰다. 그는 ‘삼성보호법’ 사태를 심층 보도했던 방송사(JTBC, MBC, KBS) 인터뷰에 가장 많이 나서기도 했다. 그래서 혹자는 그를 이 사태에 가장 책임이 큰 인물로 기억할지 모르지만, 그렇지 않다. 그는 산업기술보호법 개정에 찬성한 의원 206명 중 가장 솔직하게 잘못을 인정했고 가장 무겁게 책임지는 모습을 보였다. 그리하여 2020년 2월 국회의원 15명이 ‘삼성보호법’ 사태에 공개 사과했다. “우리가 미처 파악하지 못한 문제 조항들이 숨어 있었다.” “법안 심사 과정에서 독소 조항을 걸러내지 못했다.” “이 법을 그대로 두어서는 안 된다.” “국회의원으로서 의무를 소홀히 했던 점을 반성하며 책임 있는 모습을 보이겠다.” 당시 기자회견에 참여한 의원들이 했던 말이다.

그런데 이러한 사과가 나온 지 고작 8개월 만에 민주당에서 ‘삼성보호법’을 오히려 더 악화할 수 있는 법안을 내놓았다. 고민정 의원을 포함한 더불어민주당 의원 18명은 “기관의 동의 없이 산업기술을 사용 공개하는 행위”를 예외 없이 처벌하도록 하는 법안을 발의했다. 어떤 기술의 문제점을 공익적 목적으로 폭로할 때도 회사의 동의를 받아야 한다는 것인가? 고민정 의원은 이 법안에 ‘삼성전자 국가핵심기술 유출 방지법’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삼성전자가 쌍수 들어 환영할 법인 것은 분명하다.

이제는 사과하고 책임질 시간

고 의원은 10월7일 산업부 국정감사에서 이번 법안의 필요성을 설명하며 2016년 기술 유출 혐의로 고발됐으나 법원에서 무죄판결을 받은 삼성전자 A임원 사건을 언급했다. 그가 “법률적 미비로 무죄판결 받은 것은 심각한 문제”라며 “삼성전자 국가핵심기술 유출 방지법을 발의하겠다”고 했다. 그리고 하루 뒤 같은 당 박주민 의원은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서 “고 의원이 아주 시의적절한 제안을 해주셨다”며 “저도 도움되는 일이면 뭐든 나서겠다”고 했다. 2016년 사건 당사자였던 A는 삼성과 검찰에 의해 억울한 누명을 쓴 피해자다. A에 대한 무죄판결은 고 의원의 주장처럼 “법률적 미비” 때문이 아니라, A의 자료 반출이 순수한 “업무 목적”이었음을 법원이 확인했기 때문이다. 판결문만 꼼꼼히 읽어봐도 알 수 있는 내용이다. 2018년 <뉴스타파>, <프레시안>, KBS의 공동 기획보도로 사건 진상이 비교적 소상히 밝혀지기도 했다. 심지어 박주민 의원은 2년 전 국정감사에서 이 사건을 직접 거론하며 A에 대한 검찰 수사가 잘못됐다고 질타했다. 고 의원이 이번에 언급한 “삼성전자 임원”이 그 A였음을 또 몰랐던 것인가.

누구든 모를 수 있다. 5천만 국민의 대표인 국회의원도 그럴 수 있다. 국회의원이 법안 내용도 잘 모른 채 찬성하고 사건 진상도 잘 모른 채 비판하는 일, 의외로 자주 벌어진다. 물론 어처구니없고 부끄러운 일이지만 그래도 어쩌겠는가. 일단 “몰랐다”는 말부터 하고 사과하며 책임지면 된다. 물론 정말 ‘몰라서’ 그랬겠냐는 의구심도 없지 않다. 그 의구심을 떨치려면 행동으로 보여줘야 한다. 민주당 의원들은 20대 국회에서 ‘삼성보호법’이 만들어지는 것을 도왔고, 21대 국회에서 ‘삼성전자 국가핵심기술 유출 방지법’을 제안했다. 이미 나쁘게 바뀐 법을 다시 고치고, 더 나쁘게 바꾸자는 제안을 철회하는 일도 그들이 직접 해야 한다.

임자운 변호사·‘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 지킴이’ 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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