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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머n] 피해자 겨눈 ‘보복성 고소’

무고·명예훼손 등으로 민·형사 소송 제기해 성폭력 피해자 괴롭혀
등록 2020-11-01 08:36 수정 2021-03-31 13:55
일러스트레이션 ‘리셋’ 임우정

일러스트레이션 ‘리셋’ 임우정

“나는 그렇게 살지 않았다. 어떤 부분은 섭섭함이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이렇게 은혜를 아프게 돌려주는 것이 너무나 안타깝다.”

가해자 지인까지 나서 허위고소

2018년 6월2일 영화감독 김기덕이 성폭력 피해를 폭로한 여성들과 MBC <피디수첩> 제작진을 무고·명예훼손 등으로 형사고소한 뒤 고소인으로 서울중앙지검에 출석하면서 한 말이다. 그해 12월 검찰은 폭로가 무고라 볼 수 없으며 방송 내용 역시 상당 부분 진실에 근거한 것으로 보인다며 불기소처분을 내렸다. 그러자 김기덕은 2019년 2월 시민단체 한국여성민우회를, 3월에는 피해자와 MBC를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제기했다. 2020년 10월28일 서울서부지법은 손해배상 청구소송에서 원고(김기덕) 패소 판결을 내렸다. 김기덕이 피해자와 연대자, 방송사 등을 상대로 한 ‘보복성 고소’의 결론이다.

보복성 고소란 ‘역고소’ ‘맞고소’ 등으로 불리는 성폭력 가해자들의 대응 전략이다. 성범죄 전문 법인에서 가해자들에게 적극적으로 추천하는 이 방식은, 피해자 입을 틀어막고 지지와 연대 기반을 무너뜨리기 위해 적극적으로 활용됐다. 통상 피해자가 고소·신고하면 무고, 명예훼손, 모욕, 업무방해, 공갈, 협박 등의 죄명으로, 피해자가 폭로만 했을 때는 무고를 뺀 나머지 죄명으로 고소한다. 게시물과 기사, 방송 내용에 대한 가처분 신청과 민사소송을 진행하기도 한다.

이렇게 되면 피해자는 피해를 입었음에도 피고소인 신분으로 수사기관에서 조사받아야 한다. 자신의 피해 사실 입증에 집중하기 어려워지며, 가해자 쪽 고소 취하·합의 종용에 끌려가게 된다. 또 피해자 주변인이나 연대자가 고소당하는 경우 피해자는 죄책감에 빠지며 연대 기반이 무너질 위험성이 생긴다. 언론이나 방송에 대한 보복성 고소로 가해자의 말만 남거나 사건 자체가 삭제되기도 한다.

피해로도 힘든데 ‘가해자 아님’ 입증까지

보복성 고소는 가해자 본인뿐만 아니라 가해자 지인들의 ‘허위신고·고소·고발’ 형태로 이어지기도 한다. 최근 무고 혐의로 벌금형을 선고받은 남성 ㄱ(27)씨는 강제추행 범죄를 저지른 회사 동료(가해자)를 돕기 위해 피해자에게 자신이 추행당했다고 허위고소했다. 전남대 로스쿨 교수는 국가인권위원회의 권고에도 피해 폭로 학생을 무고·명예훼손으로 고발하기도 했다.

이로 인한 피해자의 고통은 어떠할까. 나는 2010년 성폭력 피해 고소 뒤 수년간 가해자로부터 8가지 정도 보복성 고소를 당했다. 당시만 해도 성폭력 피해 고소 뒤 보복성 고소를 당하면 성폭력 사건 수사 중에도 피해자가 피의자로 수사기관에서 조사받아야 했다. 피해자인 내가 가해자의 왜곡·과장된 주장이 담긴 고소장을 앞에 두고 조사받아야 하는 상황 자체가 너무 모멸적이었고 고통스러웠다. 그러나 수사기관은 무성의했다. 고소당했으니 조사받아야 한다는 식이었다. 당연히 해당 고소 건은 전부 허위·과장임이 밝혀졌다. 그러나 보복성 고소에 대해 수사기관이 무고일 가능성을 염두에 두지 않기 때문에 그 고통은 고스란히 피해자인 내 몫이었다.

다수의 피해자는 보복성 고소를 당했다는 사실을 알면 큰 충격을 받는다. 피해를 떠올리는 것 자체가 고통스러운데, 수사관 앞에서 자신의 피해 사실을 언급하며 심지어 자신이 가해자가 아님을 입증해야 하는 과정은 견디기 어렵다.

물론 2015년 이후 사회관계망서비스(SNS) 등을 통해 피해자의 피해 폭로와 신고·고소가 활발해지면서 가해자 쪽 보복성 고소와 관련해 피해자 조사 시기를 늦추거나, 그 고소를 무고로 인지하고 양형 등에 반영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사법시스템이 어느 정도 달라졌지만, 그럼에도 가해자들은 보복성 고소를 멈추지 않는다. 말 그대로 고소 목적 중 하나는 피해자를 괴롭히기 위한 ‘보복’에 있고 그 방법은 여전히 효과적이다.

수익 있어도 손해배상 나 몰라라

보복성 고소를 한 가해자들은 어떻게 됐을까? 자신의 가해를 인정하고 반성하며 피해 회복을 위해 노력하고 있을까? 아니다. 법적으로 자신들의 행위가 오히려 무고이고 피해자의 고소나 폭로가 사실임이 드러나도 가해를 인정하지도 피해 회복을 위해 노력하지도 않는다.

배우 조덕제 사례를 보자. 그는 2015년 영화 촬영 현장에서 강제추행한 뒤 피해자가 신고하자 피해자를 대상으로 무고, 명예훼손으로 민형사소송을 진행했다. 검찰은 오히려 조덕제의 고소를 무고로 판단해 강제추행치상 및 무고 혐의로 기소했고, 2018년 대법원에서 조덕제의 무고 혐의까지 모두 유죄로 확정됐다. 민사소송에서도 피해자에게 배상하라는 판결이 내려졌다.

그러나 조덕제는 유튜브 방송으로 수익을 올리면서도 그 어떤 배상도 하지 않는다. 지인 이재포 등이 자신을 도와 가짜뉴스를 만들어 게시한 혐의로 실형을 선고받고 손해배상을 해야 하는 처지임에도, 여전히 그 가짜뉴스로 수익을 얻는다.

사회운동을 했던 김아무개씨는 데이트폭력을 폭로한 피해자를 허위사실적시 명예훼손 등으로 민형사소송을 제기했다. 그러나 피해자의 ‘폭로 사실은 모두 사실이며 공공의 이익에 부합한다’는 판단이 나왔고, 민사 역시 돈 한 푼 못 받고 조정으로 끝났다. 당시 그는 피해자뿐만 아니라 연대자, 제3자들까지 무차별로 고소했는데, 내가 연대했던 모든 건은 ‘사실 적시이며 공공의 이익에 부합한다’는 이유로 검찰에서 불기소처분을 받았다. 재판으로 간 단 한 건인 ‘모욕’ 역시 표현의 자유, 학문의 자유 등을 인정받아 무죄로 끝났다. 이후 김씨와 그 주변인들은 호시탐탐 자신들의 과거 행적을 들이밀며 사회 복귀를 꾀하고 있다.

사법시스템은 냉혹하고 건조하다. 시간과 비용, 일상과 건강 모두를 갈아 넣어야 한다. 김기덕만 하더라도 2017년 폭로와 관련된 재판이 2020년에도 이어지고 있지 않은가. 보복성 고소는 이런 모든 것을 계산하고 진행하는 가해자의 악질적인 전략이다.

고소 자체를 막을 수 없다면 해당 고소 건과 관련해 피해자가 받을 추가 고통을 헤아리고, 적극적으로 무고로 인지하며, 선고시 엄벌 이유로도 더 많이 반영되기를 바란다. 아울러 현 시스템에서 보복성 고소를 원천적으로 막을 수 없는 상황임을 피해자가 이해하고 대비할 수 있게 더 많은 정보를 제공하고 전문가 조력이 있어야 한다. 사법시스템에서 가해자 전략은 늘 한발 앞서기 마련이다. 그러나 피해자에게도 충분한 정보와 조력이 뒷받침된다면 적절히 대응할 수 있다.

마녀 반성폭력 활동가

*디지털성범죄 피해자는 디지털성범죄 피해자지원센터(02-735-8994), 여성긴급전화1366으로 연락하면 불법 영상물 삭제, 심층 심리치료, 상담·수사, 무료 법률 지원 등을 받을 수 있다.
*‘너머n’ 아카이브(https://stopn.hani.co.kr/)에서 디지털성범죄를 끝장내기 위한 더 많은 이야기를 만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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