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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의 사회학] 1호가 될 순 없다

재난과 ‘책임 폭탄’… 책임져야 할 것을 책무로 전환하는 사회
등록 2020-10-25 22:12 수정 2020-10-29 12:44
2020년 5월 서울 용산구의 한 클럽 문에 ‘집합금지명령’ 안내문이 붙어 있다. 한겨레 김혜윤 기자

2020년 5월 서울 용산구의 한 클럽 문에 ‘집합금지명령’ 안내문이 붙어 있다. 한겨레 김혜윤 기자

2020년 5월 서울 이태원 클럽을 다녀온 뒤 역학조사 과정에서 직업과 동선을 숨겼던 인천의 학원 강사에게 징역 6개월의 실형이 선고됐다. 자신의 사생활이 사회적으로 드러나고 직업에 불이익을 당할까 두려워 역학조사에서 거짓말했다고 하지만 그 여파로 지역사회가 받은 공포와 사회적 손실이 어마어마하다는 것이다.

그가 책임을 져야 하는 것은 분명하다. 법적 책임이 아니더라도 나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동료 시민을 위험에 빠뜨리는 행위는 누구에게도 용납될 수 없다. 이는 사회가 유지되기 위해 예외 조항 없이 적용해야 하는 보편적 규칙이다.

책무와 책임

책임 문제를 다루려면 반드시 정교하게 정의해야 할 것이 있다. 책임의 범위다. 책임이란 말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하나는 책무(Accountability)라고 말하는 책임이고, 다른 하나는 보통 책임이라고 말하는 도덕적 책임(Responsibility)이다. 책무는 범위가 명확하게 규정되는 책임이다. 흔히 우리가 ‘책임을 묻는다’고 할 때 이 책무를 말한다.

원인과 결과에 뚜렷한 행위가 있고, 그 행위가 미친 한정된 범위까지만 책무를 물을 수 있다. 내가 경험한 가장 명확한 사례가 있다. 오래전 장애인인 친구와 함께 일본을 여행했다. 당시 일본은 한국보다 장애인 정책이 잘돼 있는 나라였다. 고속철 신칸센을 타면서 장애인이 여행한다고 고지하자, 바로 역 앞에까지 직원이 나와 챙겼다. 기차에 타는 것부터 내리는 것까지 체계적이었다. 내리는 역에선 우리가 탄 객차 앞에 정확하게 직원이 나와 기다리고 있었다. 직원은 휠체어에 탄 친구를 정확하게 자신이 안내해야 하는 역 앞의 현관 난관까지 배웅했다. 그 난관에서 1㎜ 오차도 없이 정확하게 멈춘 뒤 우리에게 인사하고 돌아섰다.

그때 우리를 안내한 일본문화를 전공한 선생님은 이렇게 말했다. “저기까지가 저 사람의 책임이거든요. 딱 저기까지만 ‘친절’한 것이죠. 저 선 밖은 자신의 책임이 아니기 때문에 냉정하게 돌아서는 것입니다. 우리가 볼 때는 야박해 보이지만 저런 것이 제도고 시스템이지요.” 과장해서 말해, 그 난간을 넘기 1분 전에 휠체어가 넘어지는 사고가 일어나면 철도에서 책임을 지지만, 현관에서 10㎝만 벗어나서 사고가 나도 거기에 대해서는 전적으로 개인이 책임을 져야 한다. 이것이 책무의 세계다.

도덕적 책임은 전혀 다르게 작동한다. 응답의 의무다. 역사 현관에서 10㎝ 떨어진 곳에서 휠체어가 휘청해 친구가 위험에 빠졌을 경우 책임은 그 자리에서 그 모습을 본 모두에게 적용된다. 넘어지는 순간 고통에 빠져 소리치는 그 소리에 응답하는 것, 상처를 입고 아파하는 얼굴에 응답하는 것, 그 응답이 책임이다. 그렇기에 고통의 소리를 듣고 고통에 처한 이의 얼굴을 본 사람은 모두 응답할 의무가 있다. 이것이 책임이며, 법률이 아닌 도덕의 영역에 속한다. 물론 응답을 거부하고 외면하는 것은 자유이며 대개의 경우 책무를 지지 않는다.(예외가 ‘선한 사마리아인 법’과 같은 것이다.)

2020년 10월21일 정은경 질병관리청장이 브리핑하고 있다. 연합뉴스

2020년 10월21일 정은경 질병관리청장이 브리핑하고 있다. 연합뉴스

댓글 보고 매일 자해한 학원 강사

그렇다면 이 학원 강사는 이른바 ‘n차 감염’에 이르기까지 걷잡을 수 없는 이 사건에서 어디부터 어디까지 이 연쇄고리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할까? 인권운동사랑방 활동가 미류가 자신의 페이스북에 쓴 것처럼, 이 강사의 거짓말에 대해 우리 사회에서 질타하는 목소리는 엄청나게 높았지만 그가 져야 하는 책임 범위는 놀랄 정도로 이야기된 바가 없다. 거짓말 이후 이어진 모든 고리에 대해 그가 책임을 져야 하는가? 도덕적으로는 그렇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책무 관점에서 볼 때도 모든 것을 그가 책임져야 하는가?

재난이 벌어지면 당연히 책임 논란이 생기기 마련이다. 예상되는 재난의 경우 앞선 경험에 근거해 원인과 결과, 그리고 그 결과에 대한 책임의 범위를 정교하게 설정하고 그것을 법률로 정한다. 이 과정은 과학에 근거하되 정치로 결정된다. 법률 자체가 예상할 수 있는 책임의 범위와 한계를 규정해놓은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법률이 따지는 건 책무이지 책임이 아니다. 법률이 도덕을 따지기 시작하면 골치 아파진다. 도덕적 책임은 법보다는 사회의 영역에 속한다.

그러나 예상치 못한 재난일 경우 사회에 대혼란이 벌어지고 정치적으로 쟁투가 일어난다. 책무의 범위와 한계 그리고 주체에 대해 사람들 의견은 당연히 갈릴 수밖에 없고 쟁투가 벌어지며 정치적으로 결론 난다. 이 중에서 가장 위험한 것은 책무와 책임의 경계를 무너뜨리고 도덕적으로 책임져야 할 것을 책무의 문제로 전환하는 것이다. 도덕적이기에 범위가 확정될 수 없는 책임이 한계가 명확한 책무로 전환될 때 책무는 무제한적인 것으로 돌변한다. 책무가 된 책임의 세계에서 그는 ‘모든 것’에 책임을 져야 한다. ‘무한책임’이다.

이 강사뿐만 아니라 확진 판정을 받았던 다수의 코로나19 감염인이 보인 특징이 있다. 그들은 감염 이후 자신들의 사건에 대한 보도에 달린 댓글들을 보며 경악하고 극심한 두려움과 우울에 빠진다. 자기들의 동선 하나, 말 한마디에 대해 “이 시국에”라는 말로 시작하는 온갖 비난이 쏟아진다. 그로 인해 촉발된 ‘모든 것’에 책임지라는 요구가 빗발친다.

자신이 져야 할 책임에 극심한 두려움을 느끼고 극단적인 생각을 자꾸 떠올리게 된다. 학원 강사 역시 “죽어라”라는 댓글을 보고 자해했고, 교도소에서도 매일같이 자해할 정도로 힘들다고 고백했다. 그 특성상 무제한일 수밖에 없는 도덕적 책임을 지려는 순간 감당할 수 없는 무한책임에서 벗어날 선택은 하나밖에 없는 것이다.

책무를 모면해야 한다는 ‘면피 시스템’

한 사람에게 ‘모든’ 책임을 지우는 순간부터 역설적으로 다른 이들과 사회는 책임과 책무로부터 한꺼번에 벗어난다. 권력의 역할은 이 책임을 질 사람을 찾아 대중 앞에 내보이는 것이 된다. 누가 이 덫에 걸릴지는 알 수 없고 여러 구성원은 이를 필사적으로 피해야 한다. 특히 자기가 속한 사회에서 첫 번째가 되는 일만큼 무서운 것이 없다. 한 예능 프로그램의 제목처럼 사회를 지배하는 분위기는 ‘내가 1호가 될 순 없어’가 된다.

현상적으로 많은 시민이 자신과 동료 시민을 보호하기 위해 높은 수준의 도덕성을 발휘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 이 상황에서 사람들과 사회를 지배하는 건 공포다. 재난이 벌어지고 피해가 발생했을 때, 한편으로 책무가 명확하게 규정되지 않고 다른 한편에선 공동으로 책임지려 하지 않는 상황이 펼쳐진다. 아무도 나누지 않고 묻기만 할 때 책임이 공포가 되고 폭탄이 된다. ‘무한책임’이란 폭탄이 돈다.

책임에 대한 공포가 사회를 통치하면 구성원 사이에서 책임을 둘러싼 전쟁이 벌어진다. 특히 책임 폭탄을 피하기 위해 극도로 자기를 절제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분노가 걷잡을 수 없이 높아진다. 나는 이렇게 내 생활을 희생하고 포기하고 살아가는데 저 바깥의 다른 사람들은 ‘무책임’ 그 자체로 보인다. 무책임한 자들에 대한 분노가 폭발한다.

이들의 분노는 책임 폭탄이 돌수록 아예 ‘배 째라’는 무책임한 사람이 대거 양산되는 것을 보며 더욱 폭발적이 된다. 사실 도덕적 책임을 책무화한 사회일수록, 역설적으로 이 ‘무책임한 사람들’이 체계적으로 양산된다. 무한책임은 개인이 감당할 수 없는 것이기에 “걸릴 놈은 걸리고 안 걸릴 놈은 안 걸린다”며 “이 모든 것은 팔자”라고 책임의 모라토리엄(지급연기)을 선언하는 사람들이 생겨난다.

책임은 없고 책무만 강조하는 사회에서는 능동적이고 자율적인 절제가 아니라 책무를 모면해야 한다는 ‘면피 시스템’이 작동한다. 책무를 지지 않기 위해 모두가 무책임해지는 역설이 벌어진다. 반면 책무의 한계가 설정되지 않고 모든 것이 도덕적 비난의 대상이 된 사회에서 모두는 무한책임의 공포 속에 위축돼 살아갈 수밖에 없다. 무한책임과 무책임은 뫼비우스의 띠처럼 서로 꼬리를 물며 꼬여 있다.

누군가 무한책임을 지면 끝인가

악순환의 고리를 끊으려면 책무의 한계가 명확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행위에 대한 책무의 범위와 한계가 분명해야 한다. 그래야 책무와 상관없이 선의를 가지고 고통에 대해 응답하는 사람이 늘어날 수 있다. 무엇보다 사고가 일어날 때마다 누군가에게 무한책임을 묻는 것‘만’이 권력이 책임지는 방식이어서는 곤란하다.

이렇게 되면 책임을 추궁당하지 않기 위해 무한책임에 시달리는 사람과 무책임으로 일관하는 사람으로 사회는 양분되고 시민들 사이에 내전이 벌어진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권력의 역할은 내전을 정치로 전환하는 것이다. 시민들이 스스로 질 책임을 설정하는 데 참여하고 논쟁함으로써 책임을 공유하는 주체가 될 수 있다. 이처럼 권력의 책임은 언제나 내전을 정치로 전환하기 위해 사회를 억압하는 것이 아니라 활성화하는 데 있다.

엄기호 사회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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