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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머n] 네가 본 건 ‘야동’이 아니라 ‘범죄현장’이다

성착취·불법촬영물 유포마저 범죄 아닌 음란물 공유로 방치해온 역사
등록 2020-10-25 12:53 수정 2020-10-30 07:39
2018년 11월 서울 중구 태평로 한국프레스센터에서 여성단체 회원들이 양진호 한국미래기술 회장을 비롯한 ‘웹하드 카르텔’ 핵심 인물들의 철저한 수사를 촉구하고 있다. 한겨레 백소아 기자

2018년 11월 서울 중구 태평로 한국프레스센터에서 여성단체 회원들이 양진호 한국미래기술 회장을 비롯한 ‘웹하드 카르텔’ 핵심 인물들의 철저한 수사를 촉구하고 있다. 한겨레 백소아 기자

사회관계망서비스 페이스북 비공개 그룹A에 디지털성범죄를 저지르는 이들이 대거 출몰했다. 2020년 10월19일 기준 그룹A의 멤버는 약 7천 명으로, 9월21일(4148명)과 비교했을 때 두 배가량 늘었다. 일부는 ‘메가파일’을 이용해 수백 개의 불법촬영물, 성착취물을 공유하고 있었다. 해당 그룹을 이용하는 멤버는 대부분 중·고등학생이었다. 성별을 가리지 않고 많은 학생이 불법촬영물, 성착취물 등을 거리낌 없이 돌려봤다. 이들의 행태를 보면 본인들의 불법촬영물 유포가 ‘범죄’임을 크게 인식하지 못하는 듯했다.

비공개라지만 페이스북 검색창에서 ‘그룹A’를 치면 나온다. 그룹 게시물은 가입이 승인돼야 볼 수 있는데, ‘가입 신청’ 뒤 일정 시간만 지나면 그룹장의 승인을 받아 멤버가 될 수 있다. 이처럼 간단한 절차를 거친 뒤에는 어떤 조건도 필요 없다. 성착취물을 사고팔고 유포하는 ‘범죄현장’을 찾아 들어가는 데 반나절도 채 걸리지 않았다. 그룹A 멤버들의 최대 관심사는 ‘희귀 자료’였다. “희귀 ‘야동’ 교환이나 기부하실 분 있나요?” “사진 속 ‘야동’ 있으신 분들, 전여친 영상이랑 교환함” 등 불법촬영 영상을 구하는 글이 게시물 대부분을 차지했다. 평균 30분마다 비슷한 내용의 글이 올라왔다. 이들은 피해자의 얼굴과 신체 일부를 갈무리한 사진과 함께 사진 속 피해자가 나오는 “‘야동’을 구한다”고 글을 올렸다. 그러면 “소장하고 있다” “페이스북 메시지 보냈으니 확인해보라” “나도 보고 싶다” 등의 댓글이 달렸다.

실시간 불법촬영물 사고파는 페이스북 그룹

‘디지털성범죄 현장’ 강의를 나가면 수강생에게서 ‘야한 동영상’(야동)과 ‘불법촬영물’을 어떻게 구분하느냐는 질문을 종종 받는다. 보통 야동은 상업적으로 만들어진 성관계 영상, 불법촬영물은 ‘피해자’가 존재하는 디지털성범죄로 구분한다. 야동은 음탕하고 난잡하다는 뜻의 ‘음란물’이라고도 하는데, 그동안 언론과 재판부 등은 피해자가 존재하는 불법촬영물 역시 음란물로 봐왔다. 야동도 여성을 대상화하고 객체화한다는 점에서 비판을 피할 수 없다.

언론과 재판부마저 불법촬영물을 ‘음란물’이라 하고, 야동이란 큰 범주 안에 불법촬영물이 포함된 것인 양 보는 우리나라에서, 야동과 불법촬영물을 구분하는 게 의미가 있을까? 이미 아이들은 ‘야동(상업용 포르노)은 가짜고 불법촬영물은 진짜라서 좋다’고 말한다. 디지털성범죄 가해자들은 우리나라 사람이 등장하는 불법촬영물을 원했고, 그것을 ‘야동’이라 불렀다. n번방을 비롯해 텔레그램에 개설된 수많은 대화방, 페이스북, 유튜브, 트위터, 인스타그램에서는 피해자가 협박당해 찍은 성착취물, 성관계가 불법촬영된 영상, 술이나 약에 취한 사람을 성폭행하는 영상 또한 ‘야동’으로 여겨졌다.

불법촬영물이 ‘야동’으로 소비되는데, 아이들에게 ‘야동은 너의 성적 욕망을 실현할 수 있는 자유니까 봐도 된다’ ‘불법촬영물은 피해자가 있으므로 범죄니까 보면 안 된다’는 교육은 디지털성범죄 해결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태평양원정대’ 운영자 16살, ‘로리대장태범’ 19살, ‘일가족 성착취’ 가해자 10대 유학생 등 우리는 미성년자인 n번방 가해자들을 보았다. 아이들은 성착취 영상에 노출되면 계속 더 자극적인 영상을 찾는다. 찾지 못하면, 만든다.

페이스북에서 운영되는 비공개 그룹에선 불법촬영물을 구하는 글이 자주 올라왔다. 페이스북 그룹A 갈무리

페이스북에서 운영되는 비공개 그룹에선 불법촬영물을 구하는 글이 자주 올라왔다. 페이스북 그룹A 갈무리

‘아동 성착취물 소지’ 수사 대상 85% 처벌 안 받아

불법촬영물 유통 사이트의 시초라고 할 수 있는 ‘소라넷’은 1999년 만들어졌다. 소라넷 회원은 100만 명에 육박했고 화장실이나 길거리, 자취방 등에서 찍은 불법촬영물, 연인 사이에 찍은 성관계 영상 등이 끊임없이 유포됐다. 시민단체 ‘DSO’(디지털성범죄아웃) 활동가들이 노력한 끝에, 17년 만인 2016년 소라넷은 폐쇄됐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2018년 ‘웹하드 카르텔(담합)’을 마주했다. 불법촬영물이 유포되는 웹하드 업체와 불법촬영물을 필터링하는 업체, 그리고 피해자가 삭제 요청을 하는 디지털 장의사가 유착한 ‘성착취 산업’이었다. 여성의 성을 ‘먹잇감’ 또는 ‘놀잇감’으로 대하는 성착취 문화가 수십 년간 이어졌던 동력은 무엇일까.

2016년 ‘소라넷’이 폐지될 때 언론은 소라넷을 두고 ‘음란 사이트’라고 표현했다. 피해자들의 불법촬영물이 올라온 명백한 ‘성범죄’ 유통 사이트를 두고 ‘음란’ ‘야동’이라 이름 붙였다. 웹하드 카르텔 문제가 떠올랐을 때는, ‘여성의 성’을 착취하는 산업이 아닌 웹하드 업체 실소유주인 양진호의 직원 폭행과 기이한 만행에 주목하기에 급급했다. 의제 설정에 책임 있는 언론이 먼저 불법촬영을 ‘몰카’ ‘야동’ 등으로 부르거나, 조회수에 집착해 피해 사실을 자극적으로 노출하는 제목과 사진을 실었다.

재판부는 어땠을까. 소라넷이 17년 동안 불법촬영물을 유포하며 수백억원의 부당이득을 취한 것을 두고 “소라넷 운영에 따른 불법 수익금이라는 점이 명확히 인정·특정되지 않는다”고 했다. 2013년부터 약 3년5개월 동안 운영된 성착취물 사이트 ‘AV-SNOOP’ 운영자에게는 “잘못을 인정하고 별다른 전과가 없으며 피고인이 직접 음란물을 게시한 것은 아닌 점, 사이트 검색 기능에 금지어를 설정하는 등 아동음란물이 올라오는 것을 막고자 나름 노력한 점 등을 고려했다”며 징역 1년6개월을 선고했다. 2019년 법무부가 강창일 전 더불어민주당 의원실에 제출한 자료를 보면, 2014~2018년 아동성착취물 소지로 2146명이 검찰 수사를 받았으나 이 중 85%는 처벌받지 않았다. 처벌을 받아도 대부분 벌금형이나 집행유예에 그쳤다.

불법촬영물 속 사람은 인형이 아니다

“텔레그램 범죄는 못 잡아요.” “가해자 특정을 못해요.” n번방이 화제가 되기 전, 디지털성범죄로 경찰을 찾아간 피해자가 가장 많이 들었던 이야기다. 2018년 피해자 A씨는 ‘갓갓’ 문형욱에게 디지털성착취 피해를 입은 뒤 경찰을 찾아갔지만, 당시 수사관은 범인을 잡을 수 없다며 사건을 종결했다. 이후 n번방 사건이 이슈화되고, 추적단 불꽃의 안내를 받고 나서야 A씨는 갓갓의 피해자로 인정받을 수 있었다.

불법촬영물이 ‘야동’이 된 역사의 배경에는 언론과 재판부, 검경의 무지가 있다. 공권력이 디지털성범죄를 ‘범죄’로 생각하지 않고 단순한 ‘일탈’ 혹은 ‘놀이’로 소비하게끔 환경을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불법촬영물 피해자는 누군가의 성욕을 풀기 위한 소비 대상이 아니다. 불법촬영물에 등장하는 사람은 저 멀리 다른 세상에 사는 ‘인형’이 아니라, 실제 우리와 함께 같은 땅을 밟고 살아가는 또 한 명의 사람이다.

추적단 불꽃

*디지털성범죄 피해자는 디지털성범죄 피해자지원센터(02-735-8994), 여성긴급전화1366으로 연락하면 불법 영상물 삭제, 심층 심리치료, 상담·수사, 무료 법률 지원 등을 받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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