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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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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이 의사와 여성을 믿는다면

시선3 의사- 의료인 개개인의 신념 존중받아야 하지만
여성의 임신중단 접근을 저해하지 않는 장치도 마련해야
등록 2020-10-17 06:35 수정 2020-10-19 01:22
한 산부인과에서 임신부가 진료받고 있다. 연합뉴스

한 산부인과에서 임신부가 진료받고 있다. 연합뉴스

모성이 아닌 국민(정부는 비혼여성을 이렇게 표현하고 싶었나보다)으로서 ‘낙태죄’ 정부개정안을 처음 읽었을 때의 첫인상은 이랬다. “낙태는 죄다. 죗값을 물지 않으려면 이런 사유가 필요하니 그걸 증명해라. 죄를 짓지 않기 위해 다시 한번 생각하라. 전문가의 의견을 듣고 다시 한번 생각하라. 왜냐면 죄이기 때문이다.”

의료인으로서 다시 정부개정안을 읽었다. “낙태는 죄다. 죗값을 물지 않으려면 임신주수를 의심하고, 환자를 의심하고, 증빙서류를 꼭 챙겨라. (의료법에 환자에 대한 설명 의무가 있지만) 낙태는 죄니 특별동의서를 또 받아라. 이 모든 고민을 하기 싫으면 (의료법에 진료거부 금지 조항이 있지만) 진료거부 해라.”

말기암 수술을 형법으로 금지한다면

정부개정안은 임신주수(태아의 주수)를 기준으로 임신중단 가능 여부를 가른다. 이를 산정하는 방법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첫째, 마지막 월경 시작일로부터 280일째 되는 날에 출산한다는 가정하에 산출하는 고전적 방식이다. 하지만 월경주기가 불규칙하거나, 임신 사실을 늦게 알아 마지막 월경일을 정확히 기억하지 못할 때는 불확실할 수밖에 없다. 평균적으로 여성들의 50%만이 마지막 월경일을 정확히 인지한다. 둘째, 초음파로 계측한 태아의 크기와 무게를 보고 임신한 시점을 역행적으로 계산하는 방식이다. 임신 초기(13주+6일, 97일)까지는 태아의 성장이 비교적 일정함에도 ±5~7일의 오차가 있다. 2분기(~27주+6일, ~195일)에는 태아의 머리·배·다리 둘레를 재서 체중을 유추해 임신주수를 추측하는데, 7일 이상 오차가 생기기도 한다. 후반기로 갈수록 오차는 더 커진다.

특히 임신 인지가 늦어 마지막 월경일을 기억하지 못하는데다 초기 초음파 계측을 못해 늦게야 산부인과에 올 때가 문제다. 이런 경우는 임신을 원하지 않는 상황, 미성년자이거나, 지적장애가 있거나, 성폭력·폭력 피해자일 가능성이 크다. 열악한 환경일수록 임신주수 산정의 불확실성이 커질 수밖에 없는데, 그 하루 차이가 임신중단을 가능·불가능으로 나누거나 형사처벌 기준이 된다. 이는 명확성 원칙에 어긋난다.

그렇다고 임신주수가 의미 없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태아의 정확한 무게와 주수, 생존 가능성을 산정하기 위한 노력은 산부인과 의사의 역할이다. 임신주수를 기준으로 임신중단의 약물 용량, 수술적 방법, 위험도, 의료인의 숙련도가 달라진다. 초기 임신은 태아 생존력이 없고 그 방법도 간단해 외래에서의 시술만으로도 임신중단이 가능하다. 반면 후기 임신은 태아 생존력, 산모의 건강 상태, 수술이 가능한 시설과 장비 등 고려할 사항이 많고, 수술 건수가 적어 경험이 있는 기관과 의료인이 적다. 그래서 절차나 과정에 차등을 둘 필요가 있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의료적 필요성의 이야기다. 후기 임신중단이 여성에게도 위험해서 금지한다는 위선은 부리지 않았으면 좋겠다. 합병증률이 높다고 말기암을 수술하지 못하도록 형법이 금지했다는 건 어디에서도 들어본 적 없지 않은가.

정부개정안이 나온 뒤 대한산부인과학회와 대한산부인과의사회에서 나온 입장문은 낙태죄 처벌 유지를 인식한 듯 방어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의사는 임신중단 결정 과정에 참여하지 않고 시술 과정만 담당한다 △사유 제한 없는 임신중단 허용 시기를 14주가 아니라 10주로 한다 △약물낙태 도입은 신중한 검토가 필요하다 등이다. 개정안과 입장문에서 읽히는 감정은 ‘두려움’이었다. ‘무분별한 임신중단이 늘 것’이라는 정부의 두려움, ‘만삭 임신부가 임신중단을 해달라고 올 것’이라는 의료진의 두려움.

세계보건기구(WHO)가 안전성을 검증한 유산 유도약 ‘미프진’도 2020년 10월까지 도입되지 않았다. 엑셀진(Exelgyn) 누리집 갈무리

세계보건기구(WHO)가 안전성을 검증한 유산 유도약 ‘미프진’도 2020년 10월까지 도입되지 않았다. 엑셀진(Exelgyn) 누리집 갈무리


두려움은 교육과 시스템으로

두려움은 무지에서 비롯된다. 따라서 사명감 강요나 방어가 아니라 교육과 시스템으로 해소해야 한다. 경험해보지 않은 상황(게다가 그동안 죄로 낙인받아왔던)에 대한 두려움과 그에 따른 회피 본능은 누구에게나 있을 수 있다. 모든 의사가 모든 임신주수에서 임신중단을 할 수 있지도, 할 준비가 돼 있지도 않다. 오래 기다리던 아기를 24주에 조산해 신생아중환자실 대기실에서 석 달을 먹고 잤던 동료 산부인과 의사는, 미숙아였던 아이 모습이 어른거려 후기 임신중단은 못하겠지만 초기 유산유도약 처방은 할 의향이 있다고 했다. 여러 번 유산한 끝에 입양을 결정한 다른 산부인과 의사는, 외롭게 임신중단을 하려는 여성 곁에 있어주고 싶다고 말했다. 임신 14주에서의 수술은 임신부 출혈이 많아 정부 법안에 동의할 수 없지만, 유산유도 약물이 도입된다면 좀더 임신중단이 안전해지지 않을까 묻는 동료도 있었다. 일률적으로 ‘너희는 의사니까 일단 해, 근데 거부권은 줄게’ 식으로 무책임하게 법만 만들 것이 아니라, 현장의 목소리와 임신부의 두려움에 대해 듣고, 어떻게 임신중단 시행 의료진 자원자를 보호할지, 의학으로서 의료를 교육할 수 있을지, 접근성이 취약한 지역에선 어떻게 공공의료로 제공할지를 고민해야 할 때다.

의료인 개개인의 가치관과 신념도 존중받아야 한다. 하지만 이 신념이 여성의 임신중단 접근을 저해하지 않도록 하는 장치도 마련해야 한다. 정부개정안에서는 의료인이 임신중단을 거부할 경우 여성을 상담소로 다시 보내도록 했다. 이렇게 ‘핑퐁게임’을 하듯 여성을 다룰 게 아니라 시술이 가능한 기관으로 의뢰하든지, 처음부터 상담소에서 시술의료기관으로 안내하든지 개선이 필요하다. 이같은 ‘실질적 의뢰’ 장치는 의료인의 거부권을 허용하는 모든 나라가 공히 가지고 있다.

관련 법 없는데 어떻게 시스템이 돌아가나요

2018년 세계산부인과학회의 임신중단 워크숍에 참석했을 때의 일이다. 임신중단 시술에서 어려워하는 상황에 대한 참석자 설문으로 워크숍이 시작됐다. 임신중단 시술 중에 대량 출혈이 일어나는 상황, 마취 부작용이 발생한 상황에 대한 드릴(시뮬레이션)을 잇따라 진행했다. 10분간의 영상 시청과 교육, 실습, 퀴즈까지 완료하고 나니 한층 자신감이 붙었다.

오후 세션에서는 각 나라의 고위험 유산 전문가들이 발표자로 나와, 산모의 골반 기형이 있는 상황에서 임신중단, 제왕절개 뒤 태반이 유착된 상황의 후기 임신중단과 같이 까다로운 사례를 소개했다. 약물 투약 경로나 용량, 새로운 수술 기구에 대한 최신 연구를 공유하는 자리도 이어졌다. 이 발표자들은 다음날 고위험임신 세션에서도, 피임 세션에서도 만날 수 있었다. 물론 임신중단만 전문으로 하는 의료기관에 종사하는 의사도 있지만, 대부분 의사는 일상적인 산부인과 진료의 한 영역으로 임신중단을 다루고 있었다.

2019년 임신중단법을 돌아보기 위해 캐나다의 BC여성병원을 방문했다. BC여성병원은 인구가 450만 명인 브리티시컬럼비아주의 유일한 공공여성아동병원이다. 관련 법이 없는데 어떻게 시스템이 돌아가는지를 이해하지 못한 우리에게, 그들은 임신중단이 의료서비스라는 것을 몇 차례나 강조했다. 출산을 어디서 어떻게 하는지 형법에는 나와 있지 않지만, 의료인의 지식과 기술 숙련도, 병원의 규모와 역량, 안전과 질병 관리를 맡는 병원평가제도에 따라 의료시스템이 작동한다.

의사는 자신과 의료기관의 역량을 판단해 본인이 할 수 없으면 상급기관에 의뢰한다. 자연스럽게 모든 병원에서 산전검사를 할 수 있고, 대부분 병원에서 산전관리와 출산을 맡고, 일부 병원에서 고위험임신과 신생아중환자실을 운영하는 의뢰시스템이 만들어진다. 가능하면 계획임신을 하도록 검진과 생활습관 교정을 장려하는 것은 정부의 몫이다. 취약계층에 대한 의료나 응급환자 이송 체계같이 민간 혼자서는 못하는 영역을 공공부문에서 제공한다. 이런 기준은 똑같이 임신에도, 임신중단에도 적용할 수 있다.

캐나다 전역에서 1분기(14주 이내) 임신중단은 가정의에 의해 수술 또는 약물 방법으로 행해진다. 가정의가 하기 어려운 건이나 높은 임신주수의 건은 산부인과 전문의에게 의뢰한다. 복합기형이 있거나 여성의 건강이 위험할 때는 추가 트레이닝을 받은 산과 세부 전문의, 대학병원이나 공공병원에 의뢰하고, 20주 이상일 때는 병원 내에서 자체 위원회를 열어 사회적으로 어떤 의학적 고려를 할지 논의한다.

BC여성병원에서 훈련받아 20주 임신중단까지 가능한 의사가 14주까지밖에 임신중단을 안 하던 지역의 병원에 입사해, 동료 의료진을 교육하고 이사회 논의를 거쳐 시행 가능 주수를 늘려나간 사례도 있다. 이 모든 내용이 형법과 관계없이 의학계의 합의와 의료교육제도, 병원의 자율 규제로 이뤄지고 있다. 누리집 CAPS(Canadian Abortion Providers Support)를 통해 임신중단 가능 시설과 약국 목록, 의학 기준과 주별 보험 정보를 공유하고 임상자료를 축적하는 네트워크 시스템도 운영한다.

그럼에도 20주, 30주가 넘는 임신중단에 대한 법이 없다고요? 재차 묻는 우리에게 그들은 답했다. “우리 병원에서 1년에 분만만 1만 건을 하는데, 20주 이후 임신중단 위원회가 열린 건 3~4건밖에 없었어요. 이것도 모체의 건강이 위험한 경우, 태아가 복잡기형일 때였어요. 임신중단이 합법인 나라인데 20주 이후 임신중단을 결정하는 경우는, 생각해봐요, 정말 절박한 상황이 아니었을까요?” 이런 신뢰는 한순간에 얻어진 것은 아니겠지만 법과 국민이 의료시스템을, 여성을 믿는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엿볼 수 있었다.

캐나다, 30주 넘는 임신중단에 대한 법이 없다?

정부는 여성과 의사를 잠재적 범죄자로 취급해온 과거를 사과해야 한다. 낙태죄 폐지론자와 찬성론자가 저마다의 의견과 근거를 내세워 대중을 혼란스럽게 하는 동안 정부는 방관자 역할만 했다. 이제라도 머리를 맞대야 한다. 신뢰를 회복하기 위해 공청회든 숙의민주주의든 모여서 해법을 찾아보자. 상상력이 부족하다면 선례라도 모방할 수 있지 않은가. 여성정책연구원에서 영국과 아일랜드, 캐나다의 임신중단 정책을 살펴보고 작성한 보고서를 반드시 읽어보기 추천한다. 국회로 공이 넘어갔다고 안도할 일이 아니다. 지금까지도 앞으로도 모든 것은 정부의 책임이다.

윤정원 산부인과 전문의·성적권리와 재생산정의를 위한 센터 셰어(SHARE) 기획위원

*표지이야기-임신중단 정부안 반대, 4개의 시선
http://h21.hani.co.kr/arti/SERIES/2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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