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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희롱 방치 직장은 위험한 일터다

등록 2020-08-01 05:38 수정 2020-08-05 06:02
성균관대학교 재직 시절 동료 교수에게 직장 내 성희롱을 당한 남정숙 전 교수는 2019년 7월 근로복지공단에서 산업재해 승인을 받았다. 연합뉴스

성균관대학교 재직 시절 동료 교수에게 직장 내 성희롱을 당한 남정숙 전 교수는 2019년 7월 근로복지공단에서 산업재해 승인을 받았다. 연합뉴스

“출근하는 것도 힘들다.” 올해 초 회사에 복직해 일하는 ㄱ씨가 <한겨레21>과의 인터뷰에서 처음 내뱉은 말이었다. “피해를 입었던 장소에서 다시 일하고 있다. 외상후스트레스장애가 재발해 회사에 가면 숨쉬기 힘들고, 어지럽고 토할 것 같다. 집에 오면 쓰러지듯 지쳐 선잠이 든다. 그런 후 한밤중에 잠이 깨 아침까지 잠 못 들길 반복한다.” 피해를 본 이후 2년 이상 회사를 쉬었지만, ㄱ씨가 먹는 약은 매일 한 움큼이다. 우울증과 과민성 대장 증후군을 포함해 여러 가지다. 의사가 “약으로 버티는 인생”이라고 말할 정도다. ㄱ씨는 직장 내 성희롱 피해자다.

ㄱ씨는 2014년 수도권으로 유학한 전라남도, 광주 출신 대학생의 생활을 지원하는 장학재단 ‘남도학숙’에 입사한 뒤, 직속 상사 ㄴ씨에게 여러 차례 성희롱당했다. ㄱ씨는 2015년 국가인권위원회에 상사 ㄴ씨에게 성희롱을 당했다며 진정을 넣었고, 인권위는 2016년 3월 직장 내 성희롱을 인정했다. 하지만 ㄱ씨의 고통은 멈추지 않았다. 유리로 된 독방에서 혼자 근무해야 했다. ‘자작극’ ‘인생이 불량한 여자’ ‘하극상’ ‘배신자’ ‘악마’ 같은 폭언도 들었다. ㄱ씨는 직장 내 성희롱과 괴롭힘으로 우울증과 외상후스트레스장애를 겪어 근로복지공단에서 2017년 산업재해(산재) 승인을 받았다. 남도학숙은 광주시와 전라남도가 공동 운영한다.

성희롱 산재 신청은 극소수

근로복지공단은 직장 내 성희롱을 위험요인으로 보아 산재로 인정하고 있다. 하지만 직장 내 성희롱이 산재에 해당하는지 판정하는 구체적인 기준은 없다. 다만 산업재해보상보험법 시행령의 ‘업무상 질병에 대한 인정 기준’을 근거로 산재 여부를 판정한다. 시행령엔 업무와 관련해 정신적 충격을 유발할 수 있는 사건으로 발생한 △외상후스트레스장애 △우울병 에피소드 △적응장애 등을 질병으로 규정한다. 이때 산재를 인정하는 핵심 기준은 ‘질병이 성희롱으로 발생했느냐’ ‘성희롱이 업무 관련성이 있느냐’다.

ㄱ씨처럼 직장 내 성희롱으로 질병을 얻어 산재 신청을 한 경우, 승인율은 평균 91%(2014~2019년)에 이른다. 일반 노동자의 업무상 질병으로 인한 산재 승인율이 평균 50%대인 것과 비교하면 약 2배 높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신청 건수가 지나치게 적기에 높은 승인율은 ‘착시효과’라고 설명한다.

<성희롱 실태분석과 형사정책적 대응방안 연구>(한국형사정책연구원, 2016)를 보면, 직장인의 45%가 “현재 근무하는 직장에서 한 번이라도 성희롱 피해를 당한 경험이 있다”고 응답했지만, 직장 내 성희롱으로 인한 산재로 인정해달라고 근로복지공단에 신청된 것은 2014년 2건(승인 2건), 2015년 2건(승인 1건), 2016년 8건(승인 8건), 2017년 11건(승인 11건), 2018년 13건(승인 13건), 2019년 32건(승인 29건)이다. 2019년 산재 신청이 14만7천여 건인 것과 비교하면 0.021%밖에 되지 않는다. 성희롱 피해가 곧장 질병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고려하더라도 산재 신청 건수가 지나치게 적다.

직장 내 성폭력 피해로 72% 퇴사

구미영 한국여성정책연구원 연구위원은 “한국여성인권진흥원 등 지원 네트워크를 활용할 수 있는 사람들만 신청하거나 성희롱 피해가 대단히 심각한 경우에만 산재를 신청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미투(Me Too) 운동 이후 안희정 전 충남도지사, 오거돈 전 부산시장, 박원순 전 서울시장 등을 포함한 직장 내 성희롱이 불거지며 정부 차원에서 대응 대책을 마련했다. 여성가족부는 공공부문 직장 내 성희롱·성폭력 신고센터, 고용노동부는 직장 내 성희롱 익명신고 센터를 운영한다. 하지만 성희롱으로 얻은 질병이 산재로 인정받을 수 있다는 사실은 그리 알려지지 않았다. 실제 대학원장에게 성추행을 당한 뒤 육체적·정신적 상해를 입어 산재로 인정받은 남정숙 전 성균관대 교수도 “산재를 신청할 수 있다는 걸 몰랐다. 지원 기관의 도움으로 뒤늦게 알았다”고 말했다.

직장 내 성희롱은 산재로 인정되지만, 산업안전보건법(산안법)과 산업재해보상보험법(산재법)의 재해 유형에는 포함돼 있지 않다. 산안법은 “산업재해를 예방하고 쾌적한 작업환경을 조성함으로써 노무를 제공하는 사람의 안전 및 보건을 유지·증진”을, 산재법은 “근로자의 업무상의 재해를 신속하고 공정하게 보상”을 목적으로 한다. 산안법에서 산업재해란 건설물·설비·원재료·가스 등 이른바 ‘굴뚝재해’로 불리는 물리적인 사고나 질병에 한정하고 있다.

직장 내에서 성폭력 피해를 겪은 여성들은 수면장애, 두통, 분노, 수치심, 두려움과 불안 등으로 72%가 퇴사(서울여성노동자회, 2017)하는데도 이들의 고통을 산안법이나 산재법이 아우르지 못한다. 여성도 일터에서 안전하지 않은데 산업안전 개념은 여전히 과거 남성 중심 2차 산업에 머물러 있는 탓이다. 따라서 사무직, 돌봄노동, 감정노동 분야에서 일하는 여성이 겪는 피해를 반영하기 위해 직장 내 성희롱을 산업재해 유형으로 명시해 노동환경의 안전 개념으로 다루자는 주장이 나온다.

직장 내 성희롱을 산안법이나 산재법에 재해 유형으로 명시해 노동환경에서 위험요인이 되면, 사업주는 산안법상 예방 조치 의무에 따라 근로자의 안전을 위해 예방 조치를 하는 것처럼 성희롱 예방 노력을 강화하고, 노동자는 성희롱 피해가 발생할 때 작업을 중지하고 대피할 수 있다. 무엇보다 직장 내 성희롱 피해자들이 겪는 2차 피해를 막는 효과가 기대된다. “직장 내 성희롱을 사적인 문제로 보고 피해자를 비난하는 태도와 문화를 교정하는 데 도움 될 수 있다. 또 노동환경에서 성희롱에 대한 문제제기를 보다 쉽게 하는 데 영향을 미칠 수도 있다.”(최윤정, <산업재해로서의 직장 내 성희롱>, 2019)

국외에선 이미 산업안전 영역으로 직장 내 성희롱을 포섭하고 있다. “미국의 일부 주에선 산업안전 개념으로 직장 내 성희롱 방지 교육을 하고 있다. 우리도 직장 내 성희롱과 산업안전 교육을 따로 할 게 아니라 ‘안전’ 측면에서 함께 하는 게 필요하다.”(김양지영 한국양성평등교육진흥원 교수)

국내에서 직장 내 성희롱을 산재 유형으로 명시하려는 노력이 그동안 없었던 건 아니다. 하지만 척박한 사회 인식 속에 번번이 좌절됐다. 김양지영 교수는 “(2019년) 산안법 개정 때 직장 내 성희롱을 법에 명시하는 것을 놓고 논의했지만 잘 진행되지 않았다. 직장 내 성희롱이 여성들의 안전한 고용환경을 해친다는 인식이 없었다”고 말했다. 조배숙 전 민주평화당 의원도 20대 국회에서 직장 내 성희롱을 산재법의 업무상 재해 유형으로 명시하는 법안을 발의했지만 국회 문턱을 넘지 못했다.

다시 돌아간 안전하지 않은 일터

ㄱ씨는 여전히 노동환경에서 안전을 보호받지 못하고 있다. 2019년 “2차 피해로 정상적인 업무가 어렵기 때문에 근무지를 옮겨달라”고 광주시의회에 진정서를 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래서 결국 성희롱과 직장 내 괴롭힘을 당했던 곳으로 다시 출근하고 있다. 2020년 6월 병원에선 “피해 입은 직장에 다시 출근하게 되면서 직장 동료 및 직장 내 환경에서 스트레스 받아서 우울, 불안, 자살사고, 무기력증이 악화되고 있어 치료가 필요하다”며 ‘중증의 우울병 에피소드’ 진단을 받았다. ㄱ씨는 우울증과 공황발작으로 7월 초엔 2주 동안 회사에 나가지 못했다.

가해자뿐만 아니라 조직의 차가운 시선과도 싸워야 하는 직장 내 성희롱 피해자에게 가해자와 가해 장소를 분리하는 일은 중요하다. 전북 임실군 소속의 한 공무원은 7월 “성폭력 가해자인 간부와 함께 일하게 돼 힘들 것 같다”는 내용의 문자메시지를 남기고 극단적 선택을 하기도 했다.

ㄱ씨는 “직장 내 성희롱 문제제기는 개인과 조직 간의 문제로 확대됐고, 매일 출근해 생활해야 할 회사는 안전한 공간이 아닌 공포와 두려움의 장소였다. 그래도 직장 내에서는 더는 나와 유사한 피해로 고통받는 사람이 나타나지 않길 바라는 마음에 용기 내어 버틸 때까지 버텨볼 것이다”라고 말했다.

장수경 기자 flying710@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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