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만히 생각해보면 조울병은 (바다보다) ‘사막’에 더 가깝다. 모든 것을 태워버릴 듯 지글거리는 사막의 태양. 밤이면 영하로 내려가는 극단적 추위. 다양한 생명체의 활극이 펼쳐지는 바다와 달리, 사막의 극한 환경은 생명을 품을 만한 곳이 못 된다. 별자리 읽는 법을 익히지도 못한 채 사막을 헤매는 것은 고립과 죽음을 의미한다. 정신질환으로 세상과 소통할 방도를 잃어버린 이들은 외로운 사막에 놓여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 조울병을 비롯해 다른 정신질환을 앓고 있는 이들과 세상을 연결하는 징검다리를 놓고 싶었다. 그래서 글을 썼고 출간을 결심했다.”
지난 4월 출간된 <삐삐언니는 조울의 사막을 건넜어>의 작가 이주현이 프롤로그 ‘다정한 사랑의 힘’에 적어둔 책의 취지다. 책이 세상에 나온 뒤 작가의 다정한 바람처럼, 세상으로 향하는 길에서 ‘삐삐언니’를 징검다리 삼아 용기를 내보려는 독자가 생겨났다.
7월18일 오후, 서울 서대문구 루터카페에서 정신건강 관련 비영리단체인 멘탈헬스코리아 주최로 북토크가 열렸다. 조울증·우울증 등 정신과적 아픔을 공유한 10~20대 ‘피어스페셜리스트’(동료 전문가) 15명이 삐삐언니를 초대했다. 멘탈헬스코리아는 피어스페셜리스트를 ‘고통의 경험에서 무언가를 배워 성장하고, 비슷한 고통을 겪는 다른 사람들이 더 나은 삶을 살도록 돕는 사람들’이라고 설명한다.
북토크에 참석한 피어스페셜리스트 신승연(19)씨가 포부를 밝혔다. “저는 자살 시도자로 남고 싶지 않아요. 살아남은 성공한 생존자로 언젠가 반드시 신문에 대서특필될 거예요.” 그렇다. 정신과적 증상과 아픔은 더는 숨겨야 하는 부끄러운 문제가 아니다. 적극적으로 도움을 구하고, 예방하고, 줄여나갈 수 있는 문제다. 우리 중 누구도 자살을 시도했거나 정신과 진단을 받았다고 해서, ‘자살 시도자’나 ‘정신과 환자’로 평생 기억되길 원치 않는다. 비록 아픔을 겪었지만 살아남은 성공한 생존자로 다시 일어서길 희망하며 사회에서 당당한 존재로 기억되길 원한다. 멘탈헬스코리아의 ‘아픔 전문가’들이 살아남아 성공한 생존자, 씩씩하고 용감한 ‘삐삐언니’ 이주현 작가를 만나고자 한 이유다.
자신의 병력을 공개한다는 것
<삐삐언니는 조울의 사막을 건넜어>는 신문기자인 작가가 지난 20여 년간 조울증을 겪으며 행복을 찾아가는 과정을 기록한 에세이다. 24년째 기자 생활을 하는 저자는, 가슴속 깊은 감정을 글로 써서 표현하고, 때론 길을 걷고 또 달리며 사막을 지나왔다. 그리고 국내 저서로는 드물게, 자신이 조울의 사막을 어떻게 건너왔는지 매우 사실적으로 보여준다.
북토크 당일, 이 작가는 2001년 처음 폐쇄병동에 입원했을 때 썼던 낡은 메모장을 가져왔다. 이 ‘날것’의 메모들이 모여 지금의 책이 출간됐다고 했다. 메모장은 노트도 아니었고 병원 뇌파검사지를 모아 스테이플러로 대충 찍어 만든 것이었다. 처음엔 “나는 논리적으로 생각하고 기록할 수 있다. 날 병원에 가두는 건 옳지 않다. 나는 ‘정상’이다”라는 걸 증명하기 위해 글을 쓰기 시작했다고 했다. 이후엔 조증과 울증을 번갈아 겪으며 느꼈던 적나라한 감정의 기록과 함께 사건의 의미를 풀어내고 재해석하는 글로 발전했다. 조증일 땐 ‘모든 걸 이해한다는 황홀감’에 빠지기도 했으며, 소리치고 울고 저항하기도 했다. 울증일 땐 무기력감에 쩔쩔매며 움츠러들던 모습이 적혀 있다. 그에게 글은 사막 한가운데 놓인 한 사람이 고독한 시간 속에서 자신을 위로하고, 고통을 관통하며 한발 한발 내디딜 수 있는 용기를 길러준 방법이었다.
‘성공’(Success)이란 말의 어원은 ‘계속하다’(Succeed)에서 왔다. 즉 포기하지 않고 무언가를 계속해나가는 것이 성공한 생존자가 되기 위한 방도가 아닐까. 멘탈헬스코리아의 피어스페셜리스트 중엔 가정 내에서의 폭력과 학교에서의 왕따 경험, 학업 스트레스 등으로 자해를 시도한 이도 있고 자살 시도를 한 이도 있다. 그러나 이들은 허우적거리고 비틀거리면서도 정신과 의사와 상담전문가들의 도움을 받아가며 삶을 포기하지 않았다. 멘탈헬스코리아는 이처럼 정신적 어려움을 겪은 청소년들이 ‘성공한 생존자’로서 살아가도록 돕는 것이 일차적 목표다. 자신을 적절한 정신과 의료서비스를 받을 권리가 있는 ‘소비자’로 자리매김하려는 것도 이를 위해서다.
공동사회를 맡은 우가은(16)씨는 “청소년 피어스페셜리스트들도 자해나 자살 시도, 정신병원 입원 경험을 많은 사람 앞에서 용기 있게 오픈하는 활동을 하고 있다”며 멘탈헬스코리아의 활동을 소개했다. 하지만 “오픈하기 전에 항상 망설여지고 사람들 시선이 두려운 게 사실인데, <삐삐언니…>가 나왔을 때 주변 사람들 반응이 궁금하다”고 했다. 이는 따로 또 같이 에세이집을 준비하는 피어스페셜리스트들이 공통으로 묻고 싶었던 질문이다.
이 작가 역시 “출간을 앞두고 사실 좀 두려웠다”고 말했다. “이 책 제목을 보면 ‘사막을 건넜어’라고 표현돼 있잖아요. 마치 마무리가 다 지어진 느낌. 그런데 나는 아직 끝나지 않았고 여전히 스트레스를 받으면 움츠러들기도 하거든요. 많은 사람이 이제 모든 게 괜찮아졌길 기대하고 그 전제 속에 나를 볼 것 같아서 그런 점이 좀 걱정됐죠. 그러다가 막상 책이 나오고 나서는 책을 쓰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제가 실제로 용기 낸 것보다 더 많은 사람이 용기 있다고 생각해주기도 했고, 주변에 마음 아픈 사람이 이렇게나 많구나 알게 된 계기가 되기도 했어요. 자기 경험을 나누면서 또 다른 사람들 이야기를 들어줄 수 있는 것이 의미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인생은 ‘이상적’인 상태를 향해 나아가는 것
또 다른 공동사회자인 문강(18)씨는 “가정의학 전문의 웨인 조나스가 치유란 ‘잘 살고 있는 느낌’ ‘자신에게 가장 의미 있는 일을 하는 것과 관련된 느낌’이라고 표현했다”며 이 작가에게 “언제 그런 느낌을 받는지” 물었다.
이 작가는 “오늘 같은 때”라며 웃었다. “다른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기쁨을 느낄 때, 또 나를 위해서 요리하거나, 좋은 음식을 먹고 운동할 때, 나를 위해 시간을 보낼 때처럼 나 자신에게 잘해준다는 느낌을 받을 때 ‘잘 살고 있는 느낌’이 드는 것 같다”고 말했다.
우가은씨는 “외국의 대표적인 정신과 대중 서적 <프로작 네이션>이나 <한낮의 우울>처럼 한국에서도 심리 에세이가 점점 많아지는데, 지금 한국 사회에 더 필요한 책, 내용이 있다면 어떤 게 있을지” 물었다.
이 작가는 “다양한 연령대에서 당사자 목소리를 담은 책이 더욱 많아졌으면 좋겠고, 멘탈헬스코리아에서 준비하고 있는 것처럼 청소년이 목소리를 높이는 책도 꼭 필요하다”고 답했다. 그는 또 “당사자 목소리뿐 아니라 정신건강, 질환에 대해 다양한 관점을 종합적으로 다룬 책도 필요하다”며 “왜 이렇게 많은 사람이 정신적으로 아프고 고통받는지 구조적으로 설명한 책, 어떤 의사와 상담사가 좋은지, 치료 방법은 어떤 것이 있는지 등 많은 연구와 조사를 통해 만들어진 책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문강씨는 “책에서 ‘인생의 짜고, 달고, 쓰고, 맵고, 비린 맛까지 다 보셨고 지금은 아주 간이 잘 맞는 인생인 것 같다’고 표현하셨는데, 지금을 맛으로 표현해달라”고 요청했다.
이 작가는 “맛을 안다”는 느낌에 대해 설명했다. “사실 요리하다보면 짜기도 하고 싱겁기도 하잖아요? 물과 불과 양념을 넣으면서 맛을 조절하는 거죠. 간이 잘 맞는다는 것은 이상적인 맛이라기보다는 맛을 알아가는 과정이 아닐까요. 지금 소금을 넣어야 한다는 사실을 안다는 거? 그런 게 간이 잘 맞는다는 것 같아요.”
작가는 책에서 어떻게 고통을 통과할 수 있는지 몸소 보여준다. 또 아픔을 경험한 전문가이자 기자이기도 한 그는, 냉철함과 객관적 시각으로 고통 앞에 홀로 선 사람들이 어떻게 도움을 구하고 받아야 하는지 실질적인 방법을 들려준다. 그는 피어스페셜리스트들이 얘기하는 ‘좋은 의사를 찾는 방법’에 공감한다고 했다. 환자의 이야기를 주의 깊게 들어주고, 환자에게 적절한 약을 처방해주고, 일상을 회복할 수 있는 구체적인 방법을 알려주는 것이다.
절망 속에 선택할 수 있는 두 갈래 길, 성장과 퇴보 사이에서 성장하기로 결심한 멘탈헬스코리아 청소년 피어스페셜리스트들에게 ‘삐삐언니’와의 만남은 사막의 오아시스처럼 갈증을 해소해주는 시간으로 남았다.
성공한 생존자, 용기를 전염시키길
우울은 전염성이 강하다. 그러나 용기의 전염성은 더욱 강하다. 다시 한번 잘 살아보겠다는 삶에 대한 용기는 학교 수업을 통해 배우는 것이 아니다. 바로 죽음의 문턱에서 다시 살아 돌아온 ‘성공한 생존자’ ‘용기 낸 생존자’들 존재 자체로 전파된다. 우리는 역경을 어떻게 이겨내야 하는지 배우지 못했고 가르쳐주는 사람도 없었다. 그 고통의 터널을 지나고 나서야 비로소 조금 깨닫게 되는 것이다. 우리보다 먼저 조울의 사막을 건넌 씩씩한 삐삐언니의 이야기는 터널의 끝이 어딘지 모르고 헤매는 우리에게 손을 내밀어주었다.
사실 정신건강에 이상이 생겼다는 건 그 누구보다 삶에 대해 치열하게 고민하고 열심히 살아왔다는 증거일 수 있다. 하루하루 투쟁하며 열심히 살아가는데 정신적으로 아무 문제가 없다는 게 되레 더 이상하지 않은가? 치열하게 조울의 사막을 건넌 삐삐언니가 피어스페셜리스트들을 만나 용기와 희망의 징검다리를 만든 것처럼, 앞으로 성공한 생존자들 이야기가 더욱 많이 나와 사람들과 연결돼 우리 사회에 용기를 전염시키길 바란다.
장은하 멘탈헬스코리아(MHK) 부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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