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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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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쇼바’는 돌고 도네 돌아가네

사내하청 노동자 손 들어준 대법원 판결 10년 흘렀지만
정부·국회 방관 속 불법파견은 그대로
등록 2020-07-18 07:40 수정 2020-07-22 00:42
2010년 7월 대법원의 불법파견 판결 뒤에도 정규직으로 돌아가지 못한 최병승(사진 오른쪽)씨가 2013년 5월 울산현대차비정규지회 천의봉 사무국장과 함께 울산 현대자동차 공장 앞 고압송전탑에 올라 고공농성을 벌이고 있다. 한겨레 김명진 기자

2010년 7월 대법원의 불법파견 판결 뒤에도 정규직으로 돌아가지 못한 최병승(사진 오른쪽)씨가 2013년 5월 울산현대차비정규지회 천의봉 사무국장과 함께 울산 현대자동차 공장 앞 고압송전탑에 올라 고공농성을 벌이고 있다. 한겨레 김명진 기자

일곱 달째 구직급여(실업급여)를 받아 생활을 꾸리는 심재영(49)씨는 자신의 삶을 두고 “사는 게 사는 게 아니다”라고 했다. 한국지엠(GM) 창원공장에서 사내하청 노동자로 일하던 심씨는 2019년 말 해고당했다. 인력 감축의 칼날은 이 공장으로 22년 동안 출퇴근하며 일한 그를 비롯한 사내하청 노동자 600여 명의 목을 노렸다. 정규직이 아닌 탓에 두 눈 뜨고 속절없이 당했다.

2010년 7월22일, 대법원이 뒤집은 판결

심씨는 1998년 창원공장 사내하청 업체인 세종물류 소속으로 일을 시작했다. 처음엔 티코와 마티즈 생산라인 컨베이어벨트에서 정규직이 조립 작업을 할 때 옆에서 부품을 보급하는 일을 했다. 이후 소속업체가 세 번, 강산이 두 번 바뀌는 동안 차량만 말리부로 변했을 뿐 심씨가 하는 일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변화는 2019년 12월 물량 감소에 맞닥뜨린 한국지엠이 공장에서 2교대로 이뤄지던 작업을 1교대로 바꾸면서 일어났다. 필요 인원이 줄어드는 상황에서 사내하청 노동자들이 희생양이 됐다. 정규직한테는 타격이 없었다. 대신 사내하청 노동자들이 하던 일을 거꾸로 정규직이 맡았다. 지금까지 진행된 외주화와는 반대 방향으로 ‘인소싱’이 된 것이다. 해고된 사내하청 노동자 600여 명 중 일부는 현재 구직급여로 생계를 잇고, 상당수는 오토바이 택배와 대리운전 등 다른 생계 전선에 뛰어들었다.

이미 법원에서 한국지엠 소속 노동자임을 인정받은 사내하청 노동자들은 해고가 부당하다고 생각한다. 2019년 8월 인천지법은 창원공장 사내하청 노동자 103명이 “우리는 파견이 금지된 제조업 직접생산 공정인 창원공장에서 불법파견 상태에서 일을 했으므로 법에 따라 한국지엠 소속 노동자임을 확인해달라”며 낸 근로자지위확인 소송에서 불법파견을 인정하고 노동자들 손을 들어줬다. 심씨도 승소자 가운데 한 명이다. 회사 쪽이 제기한 항소심 판결은 9월5일 나온다. 지난 6월5일엔 심씨 등에 앞서 같은 소송을 낸 사내하청 노동자 81명이 항소심에서 승소했다.

노동자들은 회사 쪽에 판결을 이행하라고 촉구했으나, 한국지엠은 소송 중이란 이유를 내세우며 대화에 응하지 않았다. 심씨와 동료 20여 명은 7월8일 인천에 있는 한국지엠 부평공장에 천막을 치고 농성을 시작했다. 군대 간 아들과 고2 딸을 둔 심씨는 “9월에 구직급여가 끝나면 어떻게 해야 할지 눈앞이 깜깜하고 잠도 잘 오지 않는다”고 했다. 그의 요구는 간명하다. 법원 판결에 따라 회사가 불법파견 사내하청 노동자들을 정규직으로 전환하라는 것이다.

완성차 업체를 비롯한 제조업체의 불법파견 논란이 오늘도 끊이지 않는다. 기업은 경기침체를 이유로 비정규직인 사내하청 노동자를 정규직의 ‘인간 쇼바(shock absorber·충격흡수장치)’로 내세워 일방적인 구조조정을 단행한다. 전문가들과 노동계는 한국 사회가 이런 해묵은 숙제를 해소할 계기가 꼭 10년 전에 있었다고 지적한다.

대법원은 2010년 7월22일 현대자동차 울산공장에서 사내하청 노동자로 일하던 중 해고당한 최병승씨가 낸 부당해고 구제신청 사건에서 하급심 판결을 뒤집고 최씨 손을 들어줬다. 최씨가 원청인 현대차 쪽의 지휘를 받아 일하고 최씨 노무 관리도 현대차가 하는 등 민법상 도급 형태가 아니라 파견노동자라고 판단했다. 2년 이상 파견 형태로 일한 노동자는 원청의 노동자가 된 것으로 봐야 한다는 당시 파견법(파견근로자 보호 등에 관한 법률)에 따라 최씨는 이미 현대차 소속 노동자라고 했다. 제조업 직접생산공정은 파견이 금지된 직종이라서 최씨의 경우 불법파견에 해당하나, 최씨가 현대차 노동자라고 판단하는 데는 문제가 없다는 게 대법원 결론이다.

전국금속노조 에스앤티(S&T)중공업지회 조합원들이 7월15일 오전 경남 창원 회사 앞에서 사내하청 노동자 82명의 해고를 철회할 것을 요구하는 선전전을 하고 있다. 전국금속노조 제공

전국금속노조 에스앤티(S&T)중공업지회 조합원들이 7월15일 오전 경남 창원 회사 앞에서 사내하청 노동자 82명의 해고를 철회할 것을 요구하는 선전전을 하고 있다. 전국금속노조 제공


사법부는 희망의 등대 됐지만

당시 대법원 판결은 1998년 파견법 도입 12년이 지나며 파견 형태 노동이 사회적으로 만연하는 데 따른 논란이 무성한 가운데 나왔다. 재벌 대기업이자 완성차 업체인 현대·기아자동차에서 나온 첫 불법파견 판단이란 점에서도 사회적 파장이 적지 않았다. 권두섭 민주노총 법률원 대표 변호사는 “대법원이 하청 노동자에 대한 일반적인 작업 배치권을 원청이 행사한 경우 합법 도급이 아닌 파견으로 봐야 한다는 중요한 판단 지표로 제시한 점과, 사용자 쪽이 사내하청 업체 반장을 현장 대리인 명목으로 내세워 원청 간부가 하청 노동자한테 직접 지휘하는 게 아닌 것처럼 보이려는 꼼수를 간파하고 현장 대리인이 단순한 지시 전달자에 불과함을 지적했다는 점에서 이후 다른 불법파견 사건에 많은 영향을 줬다”고 평가했다.

이후 임금 등 노동조건에서 정규직과의 차별과 갑질에 시달리던 사내하청 노동자에게 사법부는 희망의 등대가 됐다. 최씨처럼 법원에 가서 정규직임을 인정받으려는 현대·기아차 사내하청 노동자들이 대거 노조에 가입하고 소송을 내기 시작했다. 10년이 지난 7월16일 현재까지도 현대·기아차에서만 1700여 명이 32건의 근로자지위확인 소송을 진행 중인 것으로 파악된다. 이 가운데 대부분 사내하청 노동자가 법원에서 현대·기아차 노동자 지위를 인정받은 상태다. 그새 현대·기아차는 사내하청 노조 쪽과 특별합의 형식을 거쳐 소송 취하 등을 조건으로 사내하청 노동자 6천여 명을 정규직으로 채용했다.

대법원 판결의 영향은 현대·기아차에서 멈추지 않았다. 한국지엠, 쌍용자동차 등 다른 완성차 업체 사내하청 노동자는 물론이고 현대위아·금호타이어·포스코·현대제철·삼성전자서비스 등 대기업 사업장을 넘어 KTX 승무원, 한국도로공사 사내하청 노동자 같은 공공부문 노동자들도 법원으로 달려가게 했다. 이 가운데 상당수 노동자의 소송이 대법원과 서울고법 등에서 현재까지 진행 중이다. 한국지엠 창원공장에서 일하다 2013년 소송을 낸 사내하청 노동자 5명도 대법원 확정판결을 거쳐 한국지엠 정규직이 됐다.

문제는 법원에서 사내하청 노동자 손을 들어주는 판결이 잇따르는 상황에서 이를 제도적으로 해결하려는 국가권력의 작동이 멈췄다는 데 있다. 우선 국회는 민법의 도급 조항을 이용해 노동현장에 퍼져 불법 시비를 빚는 사내하청 제도를 노동법으로 규율하는 데 실패했다. 윤애림 서울대 고용복지법센터 연구위원은 “10년이 지나는 동안 노동자들은 (개별 법적) 투쟁으로 구제되고 있으나 비정규직 남용 자체는 전혀 개선되지 않았다”며 “사내하청 등 간접고용은 사용사유 제한도 없고 설령 불법파견으로 판정받더라도 오직 기업이 개인에 대한 채무만 지면 되는 탓에 기업으로선 계속할 편익이 큰데도 간접고용 남발에 대한 노동법 규제를 만들지 못했다”고 지적했다.

정부와 국회는 나 몰라라

고용노동부가 법원 판결의 일반적 효력을 확장하기 위해 원청에 시정명령 등 적극적인 행정지도에 나서야 했으나, 지난 10년 동안 나 몰라라 하는 바람에 노동현장이 그대로라는 지적도 이어진다. 권두섭 변호사는 “대법원 판결이 계속 나는데도 수많은 불법파견 재판이 아직도 진행 중이라는 게 말이 되느냐. 고용부가 이들을 고용하라는 시정 조처를 적극적으로 하지 않은 탓이다. 이 문제에서 행정부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비판했다. 고용노동부는 2019년 9월 현대·기아차 6개 공장 가운데 기아차 화성공장 일부 사내하청 노동자만을 대상으로 회사 쪽에 직접고용 시정명령을 해 노동계의 거센 비판을 샀다.

파견법 위반을 적용하는 검찰의 불기소 남용은 불법파견을 구조적으로 존속시키는 주범으로 지목된다. 법원에서 현대·기아차 생산공장의 직접생산공정은 물론이고 국외 수출을 위한 완성차의 부둣가 선적 이동 사내하청 노동자, 남양연구소 사내하청 노동자에 이르기까지 대다수 간접공정도 불법파견이라는 판결이 잇따르는데도 검찰은 2019년 7월 박한우 기아차 사장을 직접생산공정의 불법파견만 혐의 사실로 삼아 기소했다. 파견법은 불법으로 파견노동자를 받아 쓴 사용자를 3년 이하 징역, 5천만원 이하 벌금에 처하도록 규정한다. ‘현대·기아차 6개 공장 비정규직지회 공동투쟁위원회’는 7월22일 대법원 선고 10년을 앞두고 7월13일, 서울 중구 서울지방고용노동청 앞에 천막을 치고 농성에 들어갔다. 이들은 “대법원 판결 뒤 10년이 흘렀으나 현대·기아차의 불법파견 범죄는 계속되고, 정부와 사법부는 이들을 처벌하지 않고 있다”고 비판한다.

10년의 허송세월이 전반적인 침체로 경기를 이끄는 코로나19 감염병 사태를 만난 결과는 예상대로다. 노동시장에서 약자인 사내하청 노동자들이 구조조정 맨 앞자리로 내몰리고 있다. 자동차부품과 공작기계 등을 만드는 경남 창원의 에스앤티(S&T)중공업은 코로나19로 인한 경영 악화에 따른 우선적 조처로, 6월 말 7개 사내하청 업체 노동자 82명을 계약 해지했다. 이 회사는 정규직 760명에게 희망퇴직 신청을 받아, 110명이 8월1일자로 퇴직할 예정이다. 대부분 정년퇴임을 1년 안팎 앞둔 이들이다.

코로나 시대, 내몰리는 노동자들

정규직 275명, 사내하청 노동자 250명이 일하던 전기로 박판열연공장 가동을 6월부터 중단한 현대제철 당진공장의 경우 하청 노동자들이 고스란히 해고당할 상황에서 비정규직 노조 쪽이 회사 쪽에 고용 보장을 요구해 현재 협력사협의회 쪽과 협의하고 있다. 7월15일 3차 협의를 끝낸 이강근 금속노조 현대제철당진비정규직지회장은 “사내하청 노동자들을 해고하는 대신 일시 휴업을 한 뒤 다른 업무 분야로 옮기는 문제를 업체 쪽과 협의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 공장의 전체 사내하청 노동자 6500여 명 가운데 2500여 명이 현재 회사를 상대로 불법파견 소송을 하고 있다.

전종휘 기자 symbi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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