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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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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선엽 부대가 우리 가족 학살했다”

숨겨진 전쟁 영웅의 학살 기록… 한국전쟁 때 백선엽의 1사단,
부역자 색출 명목으로 ‘민간인 학살’ 자행
등록 2020-07-18 16:35 수정 2020-07-22 13:40
학살 당시 기억을 회상하는 김석우씨. 한겨레TV <내 손안의 Q> 화면 갈무리

학살 당시 기억을 회상하는 김석우씨. 한겨레TV <내 손안의 Q> 화면 갈무리

“전부 아무 죄 없다고, 그짝도 아무 죄 없는데 고만 오던 길로 데리고 나가서 총으로 쏴서 묻어놨어.”

김석우(82)씨가 열두 살 때를 기억하며 반복해서 내뱉는 한마디가 있다. “아무 죄 없다.”

1950년 9월28일 경북 상주 일대를 점령한 인민군과 그 동조자들은 국군이 들어오자 북쪽으로, 산으로 달아났다. 하지만 김석우씨 가족은 그대로 마을에 남았다. “인민군에 가담한 사람은 다 내뺐고 우린 아무 죄 없잖아! 그래서 여기 남아 있었다고.” 죄가 없으니 괜찮을 거라는 당연한 믿음은 곧바로 부서졌다. 마을을 점령한 국군은 무작위로 마을 청년들을 색출했다. 김석우씨의 6촌 형님 김철원씨와 그의 친구 이태하씨는 그길로 잡혀가 화를 당했다. “저기 저 철로 밑에서 쏴서 바로 묻어놨어. 지나가는 개가 보고 난리를 피우는 통에 발견됐지.”

진실화해위원회에서도 증언

주검이라도 찾아서 다행이었다. 다른 날 끌려간 7촌 재당숙 김형문씨와 5촌 당숙 김형우씨는 주검도 찾지 못했다. 김석우씨가 증언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2006~2010년 조사 활동 뒤 해산한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원회)에서 한국전쟁 민간인 학살에 대해 증언했다. 하지만 그런 외침에도 국가와 가해자에게 어떠한 사과의 말도 듣지 못했다. “인민군에 가담했다고 해서 죽였잖아. 그러니 국가가 사과하겠어.” 김석우씨는 사과받지 못하는 이유를 억울한 죄에서 찾고 있다. 도대체 누가 김석우씨 가족을 죽인 걸까?

1950년 9월15일 인천상륙작전이 벌어지자 백선엽의 1사단은 서울로 진격했다. 그 과정에서 한국전쟁 최대 치적 중 하나로 불리는 ‘다부동 전투’를 시작으로 상주를 거쳐 속리산 인근 충북 괴산·보은·청주 일대에서 토벌 작전을 벌였다. 이때 백선엽 부대는 부역자를 색출한다는 명목으로 많은 민간인을 학살했다. 진실화해위원회에서 조사팀장을 맡았던 신기철 인권평화연구소장은 상주 민간인 학살 사건을 조사했고, 그 학살이 백선엽의 1사단이 저지른 것임을 밝혔다. 신 소장의 말이다. “9월24일 백선엽이 이끄는 1사단의 11·12·15연대가 상주와 괴산·보은·청주 이렇게 나눠 주둔하면서 열흘 동안 토벌 작전을 벌였다. 이 토벌 작전은 인민군에 점령된 지역에서 인민군에 가담한 부역자를 색출하는 작전이었다. 하지만 그 토벌 과정에서 무고한 민간인들이 학살됐다. 그렇게 주둔한 곳에서 백선엽 부대는 마을 사람들에게 강간과 학살을 범했다.”

<한겨레> 취재 과정에서 입수한 ‘양민피살자신고서’ 78건에는 백선엽 부대에 의해 희생된 상주 유족들의 억울한 사연이 담겨 있었다. 이 신고서들은 1960년 4·19 이후 유족들이 4대 국회에 제출한 것이다. 이 신고서에는 백선엽의 1사단 소속 15연대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는 증언이 자주 나온다.

“1950년 10월5일 상주군 청리면 수상리: 아군이 복귀한다는 소식을 듣고 기분이 좋아 음주를 하였는데 만취한 상태에서 억울함을 호소조차 못하고 총살을 당하고 말았다.”

“1950년 9월25일 상주군 공성면 장도리: 피난 못 간 탓에 인민군들에게 잡혀 약 20일간 여성동맹이라는 곳에 가입되어 형식적으로 지내오던 중 아군이 북진하자 바로 잡혀가 3~4일간 가진(갖은) 욕(윤간)을 당하고 백사장에서 총살당하였다.”

1960년 4대 국회에 제출된 뒤 국회에 전산화돼 보관된 ‘양민피살자신고서’. 한겨레TV <내 손안의 Q> 화면 갈무리

1960년 4대 국회에 제출된 뒤 국회에 전산화돼 보관된 ‘양민피살자신고서’. 한겨레TV <내 손안의 Q> 화면 갈무리


백선엽 “이 안에 있는 것은 다 적이다”

신기철 소장은 “민간인 학살 피해자들이 4·19 혁명 때야 비로소 진실규명을 촉구할 수 있었다. 이에 따라 4대 국회에서 특별조사위원회가 만들어졌고, 지금 남아 있는 자료는 그때 피해자 유족들이 신청한 기록이다. 하지만 5·16 쿠데타가 일어나는 바람에 진상규명은 좌절됐다”고 설명했다.

백선엽은 전쟁 영웅으로 추앙받지만 그가 저지른 학살의 기록은 외면받아왔다. 그러나 기록보다 선명한 기억은 당시 죽음을 잊지 못한다. “많이 죽었지. 어느 동네 할 거 없이 몇 명씩은 다 죽었어.”(김선우씨) 그 기억에서 다 설명되지 못하는 더 많은 억울한 죽음을 짐작할 뿐이다.

상주 학살 1년3개월 만인 1951년 12월, 백선엽 부대는 사단에서 군단으로 규모가 커졌다. 그만큼 학살 규모도 커졌다. 12월부터 두 달 동안 백선엽이 이끄는 ‘백선엽 야전 사령부’, 일명 ‘백야사’의 2개 사단은 지리산 일대에서 빨치산 토벌 작전을 실시했다. 지리산을 포위해 점점 포위망을 좁히는 작전을 벌였는데, 이 과정에서 많은 민간인이 희생됐다. <한겨레>에서 2011년 입수한 백야사의 작전 참모(공국진 전 준장)의 증언록을 보면 당시 이들이 주민을 바라본 인식이 드러난다. “지리산이 4개 도 9개 군이다. 9개 군 주민이 20만이다. 이 양반(백선엽)은 이 안에 있는 것은 다 적이다. (중략) 그래서 공격을 개시하고 아이들 부녀자들을 다 적으로 만들고 포로로 오는데….” 백선엽은 민간인 사살 가능성을 스스로도 인정했다. 그는 자신의 회고록에서 “백야사의 전과가 (사살 5800명, 포로 5700명) 당초 예상했던 빨치산 숫자 4천 명의 무려 3배가 넘었다. 공비들에 포섭된 비무장 입산자도 많았다”고 밝혔다.(<군과 나>)

이때 경남 산청의 조재현(79·당시 8살)씨는 할아버지와 숙모 그리고 젖먹이 사촌동생을 잃었다. “우리 숙모와 젖먹이 사촌동생도 총살당했어요. 그렇게 잘생긴 애가 없는데… 참 아깝죠.” 조씨는 지리산 인근에 묻혀 있던 할아버지와 숙모 그리고 사촌동생의 유해를 수습해 고향 마을 뒷산에 묻었다. 그리고 평생을 민간인 학살 피해 유족으로서 배상받기 위해 싸웠다. 2016년 마침내 국가가 배상해야 한다는 대법원 판결도 받아냈다. 하지만 국가 배상도 조재현씨의 억울한 마음을 풀지는 못했다. “국가에서 배상을 받았지요. 일평생을 부역자의 유족이라는 오명을 쓰고 살아왔는데 성인 1명당 4천만원….”

일평생을 부역자 오명 썼는데

주민들을 적으로 바라보는 토벌 방식은 한국전쟁에서 낯선 군사전략이 아니다. 신기철 소장은 “백야사는 1951년 말~1952년에 활동했지만 이전에 이미 수많은 토벌 작전이 같은 방식으로 이뤄졌다“며 “이런 일을 (백선엽) 사령관이 몰랐다고 얘기할 수 없고, 오히려 적극적으로 지휘했다고 봐야 한다”고 했다.

“인민군에 가담도 안 했는데 이리 죽은 기라. 그러니까 억울한 거지.”(김석우씨) 민간인 학살의 책임자로 지목된 ‘전쟁 영웅’ 백선엽은 사망했지만, 피해자 유족들은 여전히 풀리지 않는 한을 가슴 깊이 품은 채 살아가고 있다.

조성욱 <한겨레> PD chopd@hani.co.kr


*이 기사는 유튜브 채널, 한겨레TV에서 방영한 <내 손안의 Q: 백선엽 부대가 우리 가족을 죽였다>를 요약 정리한 것입니다. 관련 동영상은 하단의 링크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http://www.hani.co.kr/arti/hanitv/hanitv_general/950778.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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