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 14조2448억원 규모로 5월11일부터 지급한 ‘긴급재난지원금’은 현금성 복지를 전 국민에게 확대한 최초의 사례다. 이런 전례 없는 정책이 나온 배경은 코로나19가 야기한 경제위기의 독특한 특징 때문이다. 1997년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 위기나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때 전세계 정부는 주로 금융사와 기업을 지원했다. 기업의 연쇄도산, 금융시스템 붕괴를 막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자영업을 비롯해 사람들이 대면 접촉하는 업종부터 생산과 영업이 어려워지기 시작한 ‘감염병 위기’를 이전 방식으로는 대응할 수 없었다. 이전에 주요 지원 대상이던 대기업과 금융사는 상대적으로 상황이 낫기도 했다.
갑작스러운 전 국민 대상 첫 ‘소득 지원’
한국에선 다른 국가보다 비교적 이른 시기인 2월 말부터 이전과는 다른 위기 대응 방식인 ‘현금 지원’을 논의했으나, 지급 범위가 보편적이든 선별적이든 간에 현금 지원 자체의 효과가 작다는 비판에 직면했다. 정부의 재정지출 가운데 가계에 현금을 지원하는 것은 투자(도로나 교량 공사처럼 사회간접자본 투자), 소비(인력 채용이나 재화 구매 등), 기업 지원에 비해 경제를 활성화하는 ‘승수효과’가 적다는 이유였다.
그러나 미국·일본 등 각국 정부와 외국 석학들이 나서서 현금 지원 필요성을 언급하자, 국내에서 현금 지원 논의가 급물살을 탔다. 그때부터 주로 지급 범위를 두고 ‘선별이냐 보편이냐’가 불붙었다. 비용효과성, 재정건전성, 경제효과 등을 고려하면 선별지급이 우월하다는 주장과 지원하기까지 시간이 지체되고 과거 소득자료를 기반으로 한 지원이 현재 소득 상황을 반영하지 못한다는 반론이 맞섰다. 여기에 선거까지 결부된 정치 상황은 ‘전 국민 지원’으로 귀결됐다. 모든 국민을 대상으로 한 소득지원은 물론이거니와, 전 국민의 70%를 대상으로 한 현금성 복지도 한국 사회가 처음 겪는 경험이다.
재난지원금을 어떻게 평가하고, 이 논의와 정책에서 어떤 시사점을 얻을 수 있을까. 전례 없는 정책이니만큼 엄정한 평가는 필수지만, 아쉽게도 아직 제대로 평가하기엔 이른 시점이다. 재난지원금을 지급한 5월의 주요 소비·고용·경제 통계가 아직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재난지원금 전후로 시행된 고용유지지원금, 고용안정지원금, 소상공인 대출지원, 소비 세제 혜택 등 다양한 정책이 있어 정책 하나만 떼어내 그 영향을 분석하기도 쉽지 않다. 그럼에도 주목할 만한 두 가지 시사점이 나타났다.
하나는 ‘구매력의 재발견’이다. 재난지원금에 유효기간과 소비 가능 지역, 사용처 등을 제한했지만, 여러 언론 인터뷰에서 드러나듯 사람들은 위기 때 정부가 어렵게 마련한 자원이니만큼 그 목적에 맞게 사용해야 한다는 인식과 실천을 드러냈다. 전통 자본주의에서 개별 소비자는 단순히 ‘재화의 시장가격을 받아들이는 수요자’(Price-Taker) 취급을 받아왔고, 특정 의제가 크게 제기되지 않는 한 소비자가 연대하거나 조직화하기도 쉽지 않았다. 하지만 세상이 바뀌었다. 소셜미디어의 부상으로 소비자 개인은 서로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존재가 됐다.
소비자는 적정 가격의 질 높은 재화와 서비스만을 선호하는 것이 아니라, 소비활동에 환경·정의·노동 등 다양한 가치관을 부여했다. 이러한 흐름의 연장선상에서 재난지원금으로 자신의 구매력이 지닌 사회적 의미와 효과를 재발견했다. 재난지원금 지급과 사용은 개개인에게, 강준만 전북대 교수의 최근 저서 제목처럼, ‘쇼핑은 투표보다 중요하다’는 것을 실감케 한 사건이었다. 아직 전면화되진 않았지만 ‘구매력의 사회적 의미’를 각 개인이 인지하고 행동에 나서는 ‘정치적 소비자 운동’이 꿈틀거린다. 이는 사회적 가치가 반영되는 새로운 자본주의 모델의 가능성을 제시한다. 물론 한 차례 재난지원금 지급으로 이런 논의와 운동이 시작된다고 보는 건 과도한 해석이겠지만, 담론을 공론화하는 데 필요한 것도 사후 해석과 논의가 아닌가.
시민 43% “세금 제대로 쓰인다 믿게 돼”
두 번째 시사점은, 재난지원금 지급으로 세금과 복지에 대한 국민 인식이 달라졌다는 것이다. 지급 대상이 전 국민으로 확대되고, 실제 지급이 시작되기 전인 5월7일부터 이틀간 시사주간지 <시사인(IN)>과 한국방송(KBS)이 한국리서치에 의뢰해 만 18살 이상 남녀 1천 명에게 웹 조사 방식으로 설문조사한 결과, ‘세금이 제대로 쓰인다고 믿게 되었다’는 응답이 전체의 43%를 차지했다. ‘(이전과) 변화 없음’과 ‘세금이 낭비된다고 믿게 되었다’가 각각 33%와 24%였다. <시사IN>은 이 설문 결과를 두고 “세금 관련 질문에서 신뢰도가 올라갔다고 답하는 경우는 좀처럼 없는데, 그 드문 일이 일어났다”고 분석했다.
재난지원금이 세금과 복지에 대한 다른 인식을 줄 가능성이 있는 이유는 복지 수혜를 처음 경험하는 계층이 광범위하기 때문이다. 한국은 일할 수 있는 인구 가운데 복지 수혜 계층이 상당히 제한적이다. 취약계층이라고 해도 복지 혜택은 일부만 받는다. 대표적 공공부조인 기초생활보장제도는 2018년 대상자가 174만 명으로 인구의 3.3%에 그친다. 물론 중산층도 고령자가 되면 기초연금·국민연금·건강보험·장기요양보험의 혜택을 누리지만, 그 연령층이 될 때까지 복지의 효용을 체감하기 어렵다.
복지 효용에 대한 낮은 체감도는 복지 확대에 걸림돌이 된다. 흔히 복지는 꼭 필요한 이들에게 선별지급하는 것이 비용 대비 효과적이란 인식이 강고하고, 포괄적으로 혜택이 제공되면 복지에 의존하거나 악용될 거란 우려가 크다. 하지만 이 논리에 반하는 ‘재분배의 역설’이란 개념도 오랫동안 회자됐다. 스웨덴의 발테르 코르피와 요아킴 팔메 교수가 1980년대의 유럽 11개국 자료를 통해 1996년에 제시한 개념이다. 핵심 내용은 저소득층에만 복지를 집중할수록 소득재분배와 빈곤 완화 효과가 상대적으로 낮고, 보편적인 복지정책을 시행한 국가들에 오히려 재분배 효과가 크다는 것이다. 중산층이 복지 수혜자가 돼야 증세가 가능해지고, 이를 통한 복지 총량이 늘어나 결국 소득재분배 효과로 이어진다는 시사점이 도출됐다.
2000년대 유럽 데이터로는 재분배의 역설이 발생하지 않았다는 반론이 있기도 하지만, 저부담·저복지·저신뢰 사회인 한국에서는 여전히 의미 있는 개념이다. 2018년 기준 한국의 국내총생산(GDP) 대비 공공사회지출 비중은 11.1%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인 20.1%의 절반 수준에 머문다. 조세가 국내총생산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2017년 기준 18.8%로 OECD 평균인 24.9%에 견줘 6%포인트 정도 낮다. 저부담·저복지의 원동력은 저신뢰다. 복지 체감도가 낮고 세금이 잘 쓰일 것이란 신뢰가 떨어지니 증세에 대한 공감대가 형성되기 어렵다. 이로 인해 빈약하고 헐거운 안전망이 유지되는 악순환에 빠진다. 이를 선순환으로 바꾸려면 세금의 효용을 느끼는 체험이 중요하다. 재난지원금은 다수에게 이런 체험을 제공한 중요한 계기였다.
기본소득 논쟁 뛰어든 김종인·이재명·박원순
재난지원금을 전 국민에게 지급하기 시작한 이후 정치권에선 본격적으로 기본소득 논쟁이 벌어졌다. 김종인 미래통합당 비상대책위원장이 6월4일 “기본소득 문제를 근본적으로 검토할 시기”라고 말하며 공론화를 시작했다. 이재명 경기도지사는 전 국민에게 20만원씩 2차 재난지원금을 지급하자고 건의하면서 “기본소득은 복지 정책이 아닌 경제정책”이라고 강조했다. 여기에 박원순 서울시장은 6월7일 “전 국민 기본소득보다 훨씬 더 정의로운 전 국민 고용보험제가 전면적으로 실시돼야 한다”며 기본소득보다 사회안전망 강화가 우선이라고 했다. 여러 복지 전문가들이 가세해 같은 재원이라면 기본소득보다 사회안전망 강화에 사용하는 게 비용 대비 효과가 크고 더 정의롭다는 주장을 한다.
하지만 이 논쟁에서 놓친 핵심 질문이 상당하다. 일단 논쟁의 포문을 연 김종인 위원장은 ‘무엇을 위한 기본소득인지’를 밝히지 않고 있다. 기본소득은 어디서 재원을 확보하느냐에 따라 진보와 보수의 극단을 오갈 수 있는 동상이몽의 의제다. 김 위원장이 2012년 내세운 ‘경제민주화’처럼 집권을 위한 정치적 화제몰이에 그치지 않으려면 어떤 기본소득을 지향하는지 구체적으로 제시해야 한다.
기본소득에는 여러 가치관을 반영한 다양한 모델이 있다. 복지를 대폭 축소하는 우파적 기본소득, 근로와 소득의 연계성을 단절시키는 탈상품화 수단으로서 기본소득, 적정 소득과 소비를 유도하는 생태적 기본소득 등이 있다. 재원을 어디에서 확보하느냐에 따라서도 재정중립적 기본소득(증세 없이 기존 재정으로만 재원 확보), 공유부 기반 기본소득(데이터·토지·환경 등에서 세목 만들어 재원 확보), 증세형 기본소득 등이 있다. 대개 기본소득을 진지하게 검토하는 연구자와 정치인은 사회와 정합성이 있는 기본소득 모델을 제시하려 하지만, 기본소득에 지나친 낙관 또는 비관을 나타내는 이들은 극단적인 일면에 과몰입하는 경향이 있다.
박원순 시장의 ‘24조원을 실업급여에 쓰면 월 100만원씩 지급할 수 있지만, 기본소득에 사용하면 월 5만원에 불과하다’는 주장이 대표적이다. 고용보험 확대는 그 자체로 의미 있지만, 기본소득을 비판하는 것으로 24조원의 신규 재원은 확보되지 않는다. 기본소득의 재분배 효과가 떨어진다는 비판도 마찬가지다. 기본소득은 그냥 나눠주는 제도가 아니라, 어디선가 재원을 확보해 모두에게 지급해야 하는 정책이다. 재분배 효과를 따지려면 ‘거두고 나누는 체계’ 전반을 따져봐야 한다.
돈을 어떻게 만들어낼까
이재명 지사의 ‘기본소득은 복지정책이 아니라 경제정책’이란 주장도 일면을 강조한 사례다. 기본소득은 기본적으로 재분배 제도로 안전망을 강화하는 복지정책이면서 수요와 공급을 조절하는 경제 정책이다. 모델에 따라 양쪽의 어떤 측면이 강조될 순 있으나, 한쪽만을 특징이라 내세울 수는 없다. 물론 자신이 선호하는 특정 면모에 가깝다고 주장할 순 있다.
두 지자체장의 기본소득과 복지 논쟁에서 덜 논의되는 물음은 ‘어떻게 증세할 것인가’다. 안전망을 기존보다 강화하려면 그 수단이 전 국민 고용보험제든 기본소득이든, 아니면 다른 복지의 확대든 새로운 재원이 필요하다. 그렇다면 이제 그 재원을 어떻게 확보할 것인지, 복지와 세금의 선순환을 시작하는 방안이 무엇인지 이야기할 때다.
윤형중 정책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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