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울산 울주에서 8살 여자아이가 집 안 욕조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옆구리를 맞아 양쪽 갈비뼈 16개가 골절됐고, 이렇게 부러진 뼈가 폐를 찌른 끔찍한 죽음이었다. 아이 이름은 이서현. 4년 동안 함께 산 계모는 수년간 폭력을 저질렀고, 친부는 이를 알면서도 묵인했다. 공적 아동보호 체계도 구조 신호를 감지했다. 서현이가 숨지기 2년여 전, 유치원 선생님은 ‘부모를 상담하고 교육했으나 멍 자국 등 학대 흔적이 반복해서 발생하기에 안 되겠다 싶어’ 아동보호전문기관에 학대 사실을 신고했다. 그러나 끝내 생명을 지키지 못했다. 당시 남인순 민주당 의원과 한국아동복지학회 등 민간단체는 진상조사단을 꾸려 지역사회와 유관 부처를 조사해, 국내 최초이자 유일한 아동학대 사망 보고서인 ‘이서현 보고서’를 냈다. 비극적 죽음의 원인은, 거대한 구조적 문제나 개인 한 사람의 책임이 아니라 곳곳에 구멍 난 아동보호망이었다.
그러나 공적 아동보호 체계가 피해를 인지했음에도, 학대를 반복적으로 당하다 목숨까지 잃는 참사는 2020년에도 계속된다. 6월1일 충남 천안 집에서 7시간 넘게 여행가방에 갇혀 있다 숨진 9살 남자아이의 경우도 그랬다. 5월5일 어린이날 밤, 머리가 찢어져(1㎝가량) 아버지 동거녀 ㄱ(43)씨와 함께 순천향대 천안병원을 찾은 아이의 손바닥·손등·엉덩이엔 멍 자국이 자리하고 있었다.
한 달 전 병원이 학대 신고했지만
5월7일 순천향대 천안병원은 천안 서북경찰서에 학대 피해가 의심된다고 신고한다. 치료를 마친 아이는 전날 새벽 1시께 집으로 돌아갔다. 그런데 왜 하루 늦게 신고가 이뤄진 것일까? 병원 홍보팀 관계자는 “담당 교수에 따르면, 두피가 찢어져 소아전문응급의료센터로 온 아이를 보니 여기저기 부어 있고 시간이 지난 멍 등 학대 흔적이 있었다. 아이는 자기 잘못으로 맞았다고 하고, 엄마(ㄱ씨)도 아이가 거짓말해서 때렸다고 말해 (학대인지) 긴가민가했다고 한다. (5월6일) 여러 과 교수로 구성된 학대아동보호위원회를 열어 학대가 의심된다는 결론이 나와, 다음날 위원회 간사인 의료사회복지사가 경찰에 신고했다”고 말했다.
의료인은 ‘아동학대 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아동학대처벌법)상 신고의무자로 학대 사실을 알고도 신고하지 않으면 500만원 이하의 과태료를 물도록 돼 있다. 그러나 2018년 전국 아동보호전문기관으로 접수된 아동학대 의심사례 3만3532건 가운데 의료인·의료기사가 한 신고는 325건(1%)에 그친다. 더욱이 아동학대 신고를 할 때 보호위원회 검토 등을 거치면 시간이 지체될 수밖에 없다. 의사가 직접 신고하면 될 일을 별도 기구에 넘겨 책임을 면하려는 것 아니냐는 비판이 나오는 이유다. 반면 모호한 사례를 두고 여러 전문가가 함께 검토하다보면 새로운 증거를 발견할 수 있다는 반론도 있다.
‘숫자가 많지 않은’ 의료인 신고는 다른 사례에 견줘 위중할 가능성이 크기에 경찰이나 아동보호전문기관이 아동학대 위험도를 평가할 때 특별히 다룰 필요가 있다. 황준원 강원대 의과대학 교수(정신건강의학과)는 “병원에선 학대 징후에 대한 객관적 사인이 있어야 개입하려 한다”며 “통상의 신고 사례보다 심각한 것으로 간주해 모니터링해야 한다”고 말했다.
아동 특성 고려한 전문 심리검사 필요
5월7일 9살 남자아이에 대한 학대 피해를 신고받은 천안 서북경찰서도 하루가 지난 8일 충남 아동보호전문기관에 사례를 넘겼다. 그리고 닷새 뒤 5월13일에야 상담원이 집을 방문해 남자아이와 부모를 면담한다. 피해아동 조사는 그것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충남 아동보호전문기관 등에 따르면, 아이는 “내 실수로 머리를 다쳤고 엄마에게 맞은 것도 내 잘못”이라고 했다. 부모는 아이를 멍들게 한 학대 사실을 인정하고 반성했다. 가해자인 부모와 자녀를 분리할 만큼 위험한 상황이 아니라는 게 당시 상담원의 판단이었다.
학대 가해자가 부모인 경우, 어린 자녀는 부모와 분리되는 것에 두려움을 느낀다. 이런 특성을 고려해 전문 심리검사를 해서 아동의 속마음을 들여다봐야 하는데 그런 제도가 마련돼 있지 않다. 학대피해 아동과 가정 환경을 두루 세심하게 살피기 위해선 아동보호전문기관 상담원들의 업무 부담을 줄이고 전문성 강화도 뒷받침돼야 한다. 아동이 태어난 가정에서 건강하게 자랄 수 없다면, 사회가 좋은 부모가 돼줘야 하지만 인프라가 제대로 갖춰져 있지 않다. 아동을 보낼 학대피해아동 전용 쉼터나 위탁가정을 찾기가 만만치 않은 게 대표적 사례다. 이동건 전국아동보호전문기관협회장은 “쉼터가 부족한데다, 특히 장애가 있는 경우엔 돌보기가 더욱 까다로우니 시설 등에서 보호하기를 꺼린다”고 말했다.
코로나19로 ‘위기아동’ 방문조사 중단
천안 집에서 9살 남자아이가 공포에 떨고 있었을지도 모를 5월29일 저녁, 경남 창녕에선 9살 여자아이가 잠옷 차림에 성인용 슬리퍼를 신고 집에서 필사적으로 도망쳤다. 온몸엔 멍이 들고, 머리가 찢어져 피를 흘린 흔적이 뚜렷했다. 손가락은 화상을 입어 지문이 훼손된 상태였다. 아이는 경찰 조사에서 “2년 동안 계부(35)와 친모(27)로부터 학대당했다”고 했다.
이 여자아이는 지난 1월 ‘이(e)아동행복지원시스템’에서 위험 징후가 있는 위기아동으로 분류됐다. 보건복지부는 사회보장정보시스템(각 부처 복지 대상자·수급 이력 정보 관리)과 영유아 건강검진·예방접종 실시 등 아동 관련 정보를 활용해 어려운 상황에 놓인 것으로 추정되는 아동을 분기별로 추려 전국 읍·면·동 주민센터로 넘긴다. 지방정부가 위기아동이 있는 가정을 방문해 양육 환경을 조사하고 필요한 복지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서다. 그러나 코로나19 유행으로 위기아동 방문조사가 중단됐다. 창녕군 관계자는 “(9살 여자아이가 속한 가구가) 기초생활수급을 신청했다가 탈락했거나 수급 자격을 잃은 이력이 있어 위기아동으로 분류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친모는 중증 정신질환인 조현병을 앓는 것으로 알려졌다. 집에는 동생 3명이 더 있다.
경제적으로 취약한 가정이 늘어나면 아동학대 위험이 커질 수밖에 없어 예방 교육·상담이 더욱 중요해진다. 곽영호 서울대병원 교수(응급의학과)는 “아동의 전 인격을 파괴하는 학대를 예방하려면 보호자가 제대로 양육할 수 있도록 설득·지원하는 복지서비스를 강화해야 한다”고 말한다. 아동보호전문기관은 학대 가해자에게 부모 교육·상담을 권할 수 있지만 강제할 수는 없다. 반면 미국 캘리포니아주에선 지방정부가 아동 학대·방임 문제를 맡아 안정적 가족 환경 조성에 부모가 협력하지 않으면 아동보호법원에 친권 제한을 신청할 수 있다.(‘미국 캘리포니아주 아동학대에 대한 사회복지적 개입에 관한 연구’, 장영인, 사회복지법제학회, 2019)
박현정 기자 sara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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