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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생리대 논란...식약처, 제보만 받습니까

감독기관 식약처가 시민 제보에만 의존, 후속 조처 뒤따라야
등록 2020-05-16 07:30 수정 2020-05-20 01:33
2017년 생리대의 모든 유해 성분 규명과 역학조사를 촉구하며 여성환경연대, 참여연대 등 시민사회단체 회원들이 생리대를 몸에 붙이고 죽은 듯 바닥에 드러눕는 행위극을 벌였다. 한겨레 자료

2017년 생리대의 모든 유해 성분 규명과 역학조사를 촉구하며 여성환경연대, 참여연대 등 시민사회단체 회원들이 생리대를 몸에 붙이고 죽은 듯 바닥에 드러눕는 행위극을 벌였다. 한겨레 자료

초경에서 완경까지 평균 35년. ‘28일 주기’ 기준으로 평생 약 460회. 회당 출혈 5~8일 동안 하루 평균 최소 5개를 쓴다고 가정하면 1만1500개. 한 여성이 평생 사용하는 생리대 개수다. 생리대는 대부분 여성의 일생에서 2천 일 넘도록 생식기와 피부에 닿아 사용할 수밖에 없는, 선택이 아닌 필수품이다. 하지만 생리대에 쓰이는 화학물질의 안전성 논란이 일면서 생리대에 대한 여성들의 불신 벽이 높아졌다. 또다시 생리대가 화두에 올랐다. 2017년 있었던 이른바 ‘생리대 파동’ 이후 3년 만이다.

알 수 없던 전분 성분의 비밀

5월7일 식품의약품안전처(식약처)는 영국산 일회용 생리대 ‘나트라케어’의 국내 수입·판매 업체가 11년간 자연 성분이라고 허위 신고하고, 소비자에게도 허위 광고했다고 발표했다. 18개 제품의 품목신고 자료에 접착제로 ‘초산전분’(식물성분)을 썼다고 기재했지만, 실제로는 합성고무의 일종이자 일반 생리대에서 쓰는 화학합성 성분인 ‘스티렌 블록공중합체’를 사용했다는 것이다. 또 생리대 방수층 성분으로 바이오필름을 쓰고도 폴리에틸렌필름을 쓴 것처럼 허위 신고했다는 의혹도 받고 있다. 새로 추가된 성분인 바이오필름은 식약처의 안전성·유효성 검사를 받아야 하는 성분이다. 나트라케어 쪽이 신고 편의를 위해 기존에 쓰던 폴리에틸렌필름(위해성 차이 없음)으로 허위 신고했으리라는 게 식약처의 추정이다.

나트라케어는 2017년 생리대 파동 이후 많이 알려졌다. 2017년 3월 여성환경연대가 국내 생리대 10종에서 인체에 유해한 휘발성유기화합물(VOCs) 등 유해물질 22종이 검출됐다고 밝히면서, 생리대 속 유해물질이 인체에 흡수될 수도 있다는 불안감이 커졌다. 이전부터 특정 생리대를 사용하면 생리불순이나 가려움, 생리통 등 부작용을 호소해오던 터였다.

여성들은 면생리대와 생리컵 등 안전한 대체재를 찾아나섰다. 그중 하나로 꼽힌 것이 유기농 생리대인 나트라케어였다. 일반 생리대보다 2배가량 비싼데도 자연 성분이 강조된 나트라케어 생리대는 판매량이 급증해 당시 해외 직구 사이트에서 품절되기도 했다. 헬스앤뷰티 스토어 관계자는 “2006년을 시작으로 일부 지점에서만 팔던 나트라케어가 2017년 이후 전 지점(2020년 기준 1260곳, 현재 판매 중단)에서 팔게 됐다. 생리대 판매 순위에서 1, 2위였다”고 말했다. 이번 식약처 발표가 나온 뒤 ‘나트라케어 너마저’라는 탄식이 쏟아지는 배경이다.

나트라케어 수입·판매 업체는 즉각 입장문을 내, 식약처 주장이 사실과 다르다고 반박했다. 나트라케어 쪽은 “2006년 한국에 최초 품목신고 할 때 당시 기준으로 품목신고를 접수했고, 식약처는 승인했다”고 했다. 생리대 접착제에서 화학합성 성분이 사용됐다는 주장에 대해서도 “2016년 조사 때도 접착제 성분 검사에서 전분 성분이 검출돼 무혐의를 받았다”고 밝혔다.

식약처는 2016년에도 나트라케어가 접착제와 방수층 성분을 허위 신고를 했다는 제보를 받고 조사했는데, 당시 나트라케어가 관련 서류를 위·변조해서 제출해 허위 신고를 발견할 수 없었다고 밝혔다. 이번에 적발할 수 있었던 것은, 나트라케어 영국 본사에 사용 원료 확인을 요청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2016년 조사에서 생리대 접착면에서 전분 성분이 검출된 것도, 다른 부분에 있었던 것이 잘못 묻어 나왔다는 게 식약처 설명이다. 이 전분 성분의 종류는 당시 밝혀지지 않았다.

10년 넘도록 신고 내용 발견 못해

생리대는 식약처에 품목신고 뒤 허가를 받는 의약외품이다. 신고부터 유통 이후 관리·감독까지 식약처의 책임 아래 있다. 식약처 판단처럼 나트라케어의 허위 신고가 사실이라면, 관리·감독 기관에서 10년 넘도록 허위 신고 내용을 발견하지 못한 것이다.

현재 식약처에는 생리대의 유기농 마크나 천연물질 사용을 사전에 관리하는 시스템이 없다. 식약처 설명에 따르면, 독성물질은 품질검사에서 걸러지는 데 비해, 품목신고서를 제출할 때 작성하는 구성 원료 신고는 각 업체에 맡기는 구조다. 식약처 관계자는 “허위 신고를 하는 경우 제보가 없으면 발견하기 어렵다”고 했다. 이번 나트라케어의 허위 신고 조사도 제보에서 시작했다. 그러나 국민 보건 일선에서 제조·판매 업체를 관리·감독해야 할 기관이 시민들 제보에만 기대는 것은 책임을 방기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이안소영 여성환경연대 사무처장은 “결과적으로 사전 관리·점검을 제대로 못한 식약처의 잘못이다. 책임져야 하고 이참에 생리대를 전수조사해야 한다”고 말했다. 5~6년 전부터 나트라케어를 써온 오아무개(36)씨도 “배신감이 크다”고 했다. 생리대가 몸에 닿는 물건이기에 ‘안전함’을 찾아 비용을 더 내서 샀기 때문이다. 오씨는 “남은 법적 공방을 지켜봐야겠지만, 식약처 주장이 사실이라면 기업은 소비자 불안을 이용해 허위 광고로 돈을 벌었고, 그 뒤엔 정부의 방관과 묵인이 있었다는 게 화가 난다”고 말했다.

2017년 3월 ‘여성환경연대 생리대 유해물질’ 발표 이후에도 식약처는 별 대응 없이 방관하다 수개월이 지나서야 여론의 뭇매를 맞고 문제의 제품을 조사했다. 이후 식약처는 “VOCs 검출량이 우려할 정도로 위해한 수준은 아니다”라고 발표했다. 하지만 환경부가 2018년 12월 발표한 ‘일회용 생리대의 건강영향 예비조사’ 보고서를 보면 생리통, 외음부 통증, 가려움증, 생리량 변화 등이 일회용 생리대와 연관이 있을 것으로 나타났다. 여성 2만여 명에게 한 ‘생리대 건강영향조사’ 결과는 내년 초에 공개된다.

허위 기재에 방법 없어

여성들의 문제제기 뒤 약사법 개정에 따라, 식약처는 2018년 10월부터 생리대 모든 성분 표시제를 실시하고 VOCs 저감화 정책을 추진하고 있으나 여전히 미비한 점이 있다. 품목신고서에 들어간 성분에 한해 표시하기 때문에 판매·제조 업체가 허위 기재하면 소비자가 이를 확인할 방법이 없다. 이종현 EH R&C 환경보건안전연구소 소장은 “현재 시스템에선 생리대에 문제가 있는지 없는지 객관적으로 확인할 방법이 없다. 여성들의 피해 호소가 객관적으로 있는지, 기존 시스템에선 (피해 호소로 제기한 문제가) 걸러지지 않은 원인이 무엇인지 규명하고, 후속 조처가 뒤따라야 한다”고 했다.

장수경 기자 flying710@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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