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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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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경없는 의사회 이효민 “슈바이처보다 그냥 의사 ”

‘국경없는의사회’에서 7년째 활동중인 마취과의사 이효민씨
등록 2019-11-01 02:13 수정 2020-05-02 19:29
정용일 기자

정용일 기자

국경없는의사회 한국 누리집 ‘활동가 이야기’에 소개된 사진 한 장이 있다. 마취통증의학과 전문의인 이효민(사진) 활동가가 윗니를 활짝 드러내 보이며 웃고, 곁에서 중앙아프리카공화국(중아공)의 한 산모가 미소짓고 있다. 엄마 품에서 잠든 아기는 카메라 셔터를 누르든 말든 쌔근쌔근 평온하다. 사진설명을 보니 이 활동가가 생명을 구해준 모자다. 태아가 자궁 안에서 옆으로 누운 ‘횡위’인데다 팔이 먼저 자궁 밖으로 빠져나와 자연분만이 불가능한 상태였다. 이 활동가는 응급 제왕절개 수술에 참여했고, 20분간 직접 심폐소생술을 한 끝에 멈췄던 아기의 숨을 돌려놨다. 사진은 건강을 되찾은 아기가 퇴원할 때 기념으로 찍었다.

이효민 활동가의 약력을 살펴보니, 요즘 대한민국에서 ‘공부 좀 한다’는 아이들이 1순위로 꼽는 서울대 의대를 졸업했다. 인턴·레지던트를 마친 뒤에는 서울아산병원과 한림대병원에서 일했다.

국경없는의사회 소속 구호활동가(의사·간호사·약사·물류 및 행정 담당 등)는 30여 개국, 4만 명이 넘지만, 2012년 개소해 7주년을 맞은 한국사무소 소속 활동가는 2018년 기준 23명에 그친다. 이 가운데 의사는 단 9명이다. 이 활동가는 심지어 국경없는의사회 활동을 위해 조교수로 재직하던 한림대병원을 사직했다.

대중이 동경하는 화려한 스펙을 접고 척박한 땅을 돌며 인도주의 활동가라는 새 삶을 살고 있는 그에게서 ‘인류애’ ‘헌신’ 같은 숭고함을 기대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그러나 10월4일 오후 사옥에서 만난 이 활동가는 ‘쿨’보다는 ‘담백’에 가까운 과장 없는 어조로 자신의 남다른 선택에 대한 과잉 해석을 경계했다. “평범한 사람이라 (대학병원 과장·교수처럼) 높은 자리에 올라가고 싶은 욕심이 없고, 능력도 없고, 일을 더 많이 하기도 싫고, 그저 흥미를 갖고 더 오래 할 수 있는 즐거운 일을 찾았을 뿐”이라는 설명이다.

국경없는의사회 이효민 활동가가 2019년 중앙아프리카공화국에서 응급 제왕절개 수술로 살린 아기, 산모와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국경없는의사회 제공

국경없는의사회 이효민 활동가가 2019년 중앙아프리카공화국에서 응급 제왕절개 수술로 살린 아기, 산모와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국경없는의사회 제공

2012년 병원 관두고 나이지리아로

국경없는의사회는 70여 국가에서 분쟁·전염병·영양실조·자연재해로 고통받는 사람을 돕는 국제 인도주의 의료 구호 단체다. 1999년 노벨평화상 수상을 계기로 단체를 알게 됐다는 이효민 활동가는 2012년 말 그 일원이 됐다.

이 활동가는 “의대생 시절 흔한 의료봉사 한 번 한 적이 없다”고 했다. 변화를 모색하던 중 ‘손 들면 할 수 있겠지’ 싶어 국경없는의사회에 지원했다. 하지만 예상외로 까다로운 서류심사와 인터뷰 절차를 거치고서야 합류할 수 있었다. 한국사무소의 경우 지원자 중 대략 절반은 탈락한다고 했다. 현장에 바로 투입할 수 있는 경력과 자격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채용되면 ‘인력풀’에 등록되고, 프로젝트 상황과 개인 일정을 조율해 미션(임무) 지역으로 파견된다.

처음부터 병원에 사표를 낼 계획으로 시작한 일은 아니었다. 국경없는의사회는 프로젝트당 짧게는 3주, 길면 석 달간 해당 지역 병원을 찾아 의료활동을 한다. 이 활동가의 첫 미션은 6주짜리였다. 한국에서 종합병원 의사가 6주간 개인 휴가를 쓰는 건 사실상 불가능에 가깝다. 무급휴가가 가능한지 병원 쪽에 타진해보기는 했지만 역시나 여의치 않았다. 유럽과 북미에선 개인 휴가를 이용해 프로젝트에 참여하는 활동가가 흔하지만, 한국에선 아직 ‘진입 장벽’이 높은 셈이다.

결국 2012년 11월 병원에 사표를 내고 한 달 뒤 나이지리아행 비행기에 올랐다. 그 후로 7년째 국경없는의사회 활동가와 국내 파트타임 의사를 오가며 살고 있다. 그는 “병원을 그만둔 거지 의사를 그만둔 게 아니다. 시설 좋은 병원에서 일하느냐 시설이 좀 안 좋은 곳에 가서 일하느냐 차이일 뿐 본질적으로 하는 일은 같다”고 말했다. 이어 “종합병원에서 일할 때 재미가 없어서 뭔가 다른 일을 해보고 싶었는데, 배운 게 ‘의사질’이라 달리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었다”며 “내가 가진 의사 면허와 기술로 뭘 할 수 있을까 고민하다가 선택한 것이 엔지오(NGO·비정부기구) 활동이었을 뿐”이라고 덧붙였다.

남수단 유엔 기지 밖에선 총성과 폭발음

이 활동가는 첫 미션 지역인 나이지리아에서 임신·출산 등 모성보건에 초점을 맞춘 프로젝트에 참여했다. 조혼·성폭행이 만연한데다 피임조차 제대로 하지 않아 13~15살에 출산하는 여성이 많았다. 한번은 30대 중반 여성이 사산으로 병원을 찾아왔다. ‘웬일인가’ 싶어 의료기록을 살펴봤더니 17번째 임신이었다. 이 여성은 그중 6명을 낳고 나머지는 사산했다. 태어난 6명 중에도 살아남은 아이는 단 2명뿐이었다. 이 활동가는 “여성의 건강권이 전혀 존중받지 못하는 ‘여성 건강 위기’를 직접 목격하고 큰 충격을 받았다”고 했다.

영화 로 알려진 고 이태석 신부가 섬겼던 남수단도 다녀왔다. 분쟁지역 한가운데 놓인 유엔 군사기지 안에서 실향 난민과 이송 환자를 치료했다. 이 활동가가 남수단에 머문 한 달 내내 유엔 기지 밖에서 총성과 폭발음이 요란했다. 기지로 실려온 환자 99%가 총상이었다. 한국 병원에서는 ‘평생 볼 일이 없는’ 총상 환자를 남수단에서 다 봤다.

중아공은 아직 한국과 수교도 맺지 않았지만, 이 활동가는 2015년·2017년·2018년·2019년 벌써 네 차례나 다녀왔다. 이 활동가가 참여한 11번의 프로젝트 중 3분의 1이 넘는다. 다시 한번 ‘숭고’를 기대하며 특별한 계기를 묻자, 아니나 다를까 대수롭지 않다는 듯 군더더기 없는 답변이 나왔다. 이 활동가는 “국경없는의사회가 구호활동을 하는 국가 중 영어로 일할 수 있는 곳 대부분은 한국 정부가 지정한 여행금지국가(이라크·시리아·아프가니스탄·예멘·리비아·소말리아 등)”라고 했다. 영어가 익숙한 한국 활동가에게는 큰 제약이다. 국경없는의사회는 프랑스에서 시작된 단체고, 프로젝트 지역 중에 프랑스어 사용국도 많다. 이 활동가는 ‘차라리 내가 프랑스어를 배우는 게 빠르겠다’고 생각했다. 2015년 말 프랑스어를 배우기 시작해 지금도 꾸준히 공부하고 있다. 그가 “버벅버벅 프랑스어를 할 수 있게” 되자 프로젝트 참여 요청이 쇄도했다. 한국뿐 아니라 국경없는의사회 전체를 통틀어 프랑스어로 일할 수 있는 마취과 의사가 많지 않아서다. 벨기에(프랑스어·네덜란드어·독일어 공용) 식민지였던 중아공도 이 활동가와 프랑스어로 인연을 맺은 나라다.

치안 안 좋아 숙소 밖 외출 쉽지 않아

임지에 도착하면 병원과 숙소를 오가는 일상이 시작된다. 아침에 병원으로 출근하면 현지 보건부 직원에게 야간 상황을 인계받는다. 외과 병동 입원 환자 회진을 돌며 약 처방이나 향후 치료 계획 등을 상의한다. 입원이 필요한 신규 환자가 있으면 진료를 보고, 다시 그날 예정된 수술을 한다. 중아공 밤바리 프로젝트에 참여했을 땐 하루 4~5건 수술에 참여했다. 수술을 마치면 간단한 창상 치료나 부목, 견인 등 외래 시술을 했다. 그사이 새로 찾아온 환자가 있으면 진료하고 응급수술이 필요한 경우 또 수술했다.

의료 활동을 제외하면 미션 지역에서의 생활은 지루할 정도로 단조롭다. 수술이 없으면 숙소로 돌아가 ‘대기’한다. 치안 상황이 좋지 않아 대부분 나라에서 숙소 밖을 돌아다니는 것이 자유롭지 않다. 일과를 마치면 숙소에서 동료들과 담소를 나누거나 운동한다. 혼자 있을 땐 미리 내려받아 온 전자책이나 동영상을 본다. 와이파이가 연결되긴 하지만 동영상 스트리밍을 볼 정도는 아니다. 일요일에는 되도록 쉰다. 주말에는 맥주도 한잔하고, 일요일 아침에는 근처 운동장에서 조깅하기도 한다.

이 활동가는 “미션을 마칠 때쯤이면 한국으로 너무너무 돌아오고 싶지만, 한국 병원보다 다양한 경험을 하고 다양한 사람을 만나는 것이 좋다”고 했다. “국경없는의사회 일을 하지 않았다면, 가령 아이티에서 온 간호사를 만나 대화할 일은 평생 없지 않았겠느냐”는 얘기다.

2016년 팔레스타인 가자지구 프로젝트에 참여한 국경없는의사회 이효민 활동가(왼쪽 셋째)와 수술팀이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국경없는의사회 제공

2016년 팔레스타인 가자지구 프로젝트에 참여한 국경없는의사회 이효민 활동가(왼쪽 셋째)와 수술팀이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국경없는의사회 제공

희생·숭고보다… “직업인으로서 의사”

의사는 의술로 인류에 봉사하는 명예로운 직업이기도 하고, 자본주의 사회에서 직업의 최상위에 있는 고소득 전문직이기도 하다. 이 활동가는 전자에 더 비중을 두는 듯한 삶을 선택했지만, 이런 구분을 “항상 경계한다”고 했다. 인간의 생명을 다루는 의사에게 사회 평균 이상의 윤리의식이 필요한 건 부인할 수 없지만, 그 이상의 희생을 요구하는 건 오히려 부당하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또 개인적으로 봉사 정신이나 숭고한 희생 같은 걸 염두에 두고 의사가 된 것도 아니다.

어려서부터 “공부를 잘하니 의대에 가라”는 얘기를 들었고, 스스로도 ‘커서 의사가 되겠다’고 생각했다. 여성으로서, 안정적으로 일할 수 있는, 전문직이라는 점에서 “개인적인 니즈”에도 잘 맞는 직업이었다. 다만 인턴·레지던트를 거치면서 환자·보호자들과 부대끼며 생기는 스트레스가 상당하다는 걸 알았다. 그렇다고 아예 환자를 보지 않는 전공은 재미가 없을 듯싶었다. 절충적으로 선택한 전공이 마취과였다. 수술장 안에서 환자의 ‘바이탈 사인’(사람이 살아 있음을 보여주는 호흡·심장박동 등 측정치)을 쥐고 있는 사람은 마취과 의사다. 수술은 외과 의사가 하지만 수술 중에 환자를 살아 있게 하는 건 마취과 의사라는 점도 “매력적으로 다가왔다”고 했다.

인터뷰 사흘 뒤인 10월7일, 이 활동가는 두 달 반 일정으로 12번째 임지인 라이베리아 몬로비아의 아동병원으로 떠났다. 한국의 대학병원을 마다하고 분쟁·재해 지역을 누비는 이 활동가의 삶에서 사람들은 ‘슈바이처’ 같은 의사를 떠올리기 쉽다. 정작 본인은 몸에 맞지 않는 상찬을 한사코 마다하면서 한결같이 “전문 직업인으로서 의사일 뿐”임을 강조했다.

그에게 미래의 의사들을 위해 ‘좋은 의사가 되는 길’을 소개해달라고 부탁했다. “다른 직업과 별반 다르지 않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논리적 사고를 위해 기본적인 수학·과학이 필요하지만, 현행 입시제도에서 의대 진학에 요구되는 ‘과도한 성적’은 임상 의사에게 별 필요가 없다고 본다. 수학보다는 차라리 국어가 중요하지 않겠느냐는 생각이다. 환자, 보호자, 동료 의료진과 의사소통을 잘하는 게 중요한 직업이기 때문이다. 그가 강조한 의사의 첫 번째 덕목은 성실함이었다. “번뜩이는 창의성이 필요한 몇몇 직업을 제외하고는 의사든 사무직이든 기자든 어떤 직업이든 하루하루의 성실함, 그것이 쌓여서 만들어지는 전문성이 중요하다”는 생각에서다.

국경없는의사회 후원 문의 02-3703-3555, 문자 기부(3천원) #1971, 후원계좌 신한은행 140-009-508856
전정윤 기자 ggu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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