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10월, 노무현 전 대통령의 참여정부 법무부가 처음 ‘포괄적 차별금지법’을 입법예고했다. 참여정부가 국정과제로 내세운 차별금지법에 대한 논의가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당시 종교계를 비롯한 보수 진영의 반발로 ‘병력, 출신국가, 언어, 가족형태 또는 가족상황, 범죄 및 보호처분 전력, 성적 지향, 학력’ 등 7가지 차별 금지 사유가 법안에서 삭제됐다. 그렇게 어정쩡하게 첫걸음을 뗀 차별금지법은 제정에 이르지 못하고 12년째 제자리를 맴돌고 있다.
2012년 대선 때 차별금지법 제정을 국정과제에 포함했던 문재인 대통령이지만 2017년 대선에선 언급하지 않았다. 되레 대선 TV토론에서 문 대통령은 “(동성애) 합법화를 찬성하지 않는다”고 밝혀 시민사회단체의 반발을 샀다. 문 대통령은 토론회 끝 무렵에 “동성혼을 합법화할 생각은 없지만 차별에는 반대한다”고 밝혔다.
지난 9월에는 한국 사회 인권의 마지막 보루가 돼야 할 국가인권위원회에서 ‘2020년 총선’ 등 정치적 상황을 고려해 차별금지법 제정 논의를 하지 않고 있다는 내부 직원들의 증언이 보도로 외부에 알려졌다.
소외된 이들은 더욱 절망했지만 가만있을 수만은 없었다. 128개 시민사회단체로 구성된 ‘차별금지법제정연대’는 10월19일 ‘평등을 말하라’라는 주제로 포괄적 차별금지법 제정을 촉구하는 대규모 거리행진을 기획하고 있다. 지난해 10월20일 ‘우리가 간다’라는 주제로 열렸던 차별금지법 제정 촉구 행진에 이어 두 번째다.
은 장애여성공감 활동가 진경, 충남 차별금지법제정연대의 임푸른, 이집트 난민 사라, 몽골 이주여성 나랑토야, 투명가방끈 활동가 난다를 10월8일 서울 마포구 공덕동 한겨레신문사에서 만나 미리 이야기를 들어봤다. 이들은 차별금지법제정연대 일원으로 10월19일 열릴 행진에 참가할 예정이다.
진경 차별금지법 제정 촉구 행진을 앞두고 이렇게 한자리에 모여 이야기할 수 있어 기쁘다. 오늘 대화는 ‘차별잇수다’라는 프로그램 형식으로 진행하려 한다. 차별잇수다는 ‘차별에 맞서는 용기를 잇는 수다’의 줄임말이다. 안전한 공간에서 서로 존중하는 가운데 차별 경험을 이야기하는 기회를 우리 스스로 만들어보자는 의미로 차별금지법제정연대와 국가인권위원회가 협력사업으로 지난해 4월 기획했다. 전국 각지에서 차별 경험을 나누는 기회를 가졌고 500여 명이 함께했다. 차별잇수다를 진행하다보면 다양한 공간과 상황에서의 차별을 경험하게 된다. 오늘은 ‘장소’를 열쇳말로 꼽아봤다. 먼저 공공기관에서 겪은 차별 경험을 공유해주면 좋겠다.
임푸른 나는 ‘논바이너리’(남녀 이분법에 해당하지 않는 성정체성을 가진 사람)로 정의당 충남성소수자위원장을 맡고 있다. 내가 차별을 경험했던 장소는 ‘경찰서’다.
3년 전쯤 해외여행을 앞두고 국제면허를 받기 위해 경찰서에 갔다. 내 외모가 여성으로 보이는데 주민등록증 번호는 ‘1’로 시작하니까 담당 공무원이 놀라는 눈치였다. 주변 다른 민원인들이 다 들을 수 있는 큰 목소리로 “남자냐, 여자냐”라고 물어서 당황했다. 본인 확인 절차를 거쳐야 하는 건 이해할 수 있지만 다른 민원인에게까지 내 정체성이 강제로 공개되는 경험은 불쾌했다. 이처럼 성소수자들은 주민등록증을 보여주고 본인 확인 절차가 두려워서 투표를 포기하는 경우도 많다.
사라 난민은 난민 심사 과정에 출입국·외국인청을 자주 방문하게 되는데 이곳에서 많은 차별을 경험한다. 처음 난민신청서를 내기 위해 출입국·외국인청을 방문했을 때 서류를 집에서 작성해 가져갔는데, 현장에서 직원이 “다시 작성하라”고 했다. 내가 직접 썼다는 걸 믿지 못하는 듯했다. 똑같은 내용을 현장에서 다시 쓰는 걸 본 뒤 신청서를 받아줬다.
이후 난민지위 인정 소송 과정에서 필요한 서류를 발급받기 위해 출입국·외국인청을 다시 방문했는데, 서류를 발급해줄 수 있는지 확인하려고 여러 차례 질문하자 직원이 고함치며 나가라고 했다. 큰 상처를 받았다. 서러워서 한참 울었다.
나랑토야 한국 남성과 결혼해 한국에서 산 지 15년 된 ‘외국인 엄마’다. 영주권 비자가 있지만 주민센터에서 전입신고 등 서류 절차를 밟을 때 남편이 꼭 동행해야 한다. 남편은 회사일로 낮에 시간을 내기 어려울 때가 많다.
관공서에서 일할 때도 차별을 당했다. 지금 일하는 서울이주여성 상담센터에 오기 전 다문화가족 상담센터에서 몽골어 통·번역 지원사로 일했는데 근무연수에 상관없이 최저임금만 받았다. 3년 동안 최저임금을 받고 일했는데 일이 계속 늘어나 이직을 결심했다.
진경 나랑토야씨의 경우를 보면 사회적 약자를 위해 일자리를 정부가 만들었다지만, 일자리 자체가 차별적으로 만들어졌다. 몇 년을 일해도 최저임금을 받을 수 밖에 없다. 장애인 노동에도 그런 고민이 있다. 장애인이 일하는 곳은 대부분 장애인보호작업장인데 최저임금이 적용되지 않는 곳이 많다.
난다 지방자치단체에서 진행하는 연구사업에 참여한 적이 있는데, 역할을 똑같이 나눠서 하고도 중졸이라는 이유로 ‘연구보조’로만 이름을 올렸다. 관공서에서 사업을 진행하고 임금을 지급할 때도 학력에 따른 기준이 있다. 아무리 오래 활동해도 학력 기준에 미달하면 동등한 대우를 받을 수 없다. 특강 강의료를 받는 것도 학력에 따라 차별받는데 이의를 제기하면 “학력 기준이 있어서 어쩔 수 없다”는 답만 돌아왔다.
진경 장소에 국한하지 말고 각자가 겪은 다른 차별 사례를 더 말해달라.
사라 집을 구하러 부동산에 가면 외국인이라는 이유로 ‘어디(국가)서 왔냐’고 묻는다. 외국인이라서 월세를 잘 안 낼 것 같다는 선입견이 있는지 거부당하는 경우가 많다. 단지 외국인이라는 이유로 집을 구하기가 힘들다. 딸아이를 유모차에 태우고 택시를 타려고 하면 빈 택시도 우리를 피해간다. 택시가 가까이 오다가 내가 외국인인 것과 유모차를 보면 그냥 지나치는 일이 많다.
난다 대중교통 이야기가 나와서 생각나는 일이 있다. 청소년은 교통카드를 찍을 때 나는 소리가 다르다. 예전에는 “청소년입니다”라는 소리가 났다. 학교를 다니지 않는 ‘학교 밖 청소년’이 평일 낮에 버스를 타면 교통카드 소리 때문에 사람들이 쳐다보는 일이 많다. ‘학교 갈 시간에 왜 나와 있지? 문제아인가?’라는 표정으로 쳐다본다. 청소년단체가 문제를 제기해 서울에선 소리가 바뀌었는데, 여전히 청소년이 교통카드를 찍을 때 확연하게 다른 소리가 나는 지역이 있다.
성소수자·이주여성·난민이라는 이유로나랑토야 가끔 지하철 같은 곳에서 급한 전화를 받다보면 모국어로 잠깐 통화하게 된다. 그러면 “한국인이 아닌가봐요”라며 말을 거는 사람이 있다. 단지 한국어가 아니라는 이유로 “전화를 끊어라” 하며 화내기도 한다. 그때 주변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되는데 표현하기 힘들 정도로 부끄럽다.
임푸른 성소수자가 여러 명이 모여 대중교통을 타면 좀 눈에 띄는 것 같다. 시선이 집중되는 것을 느낀다. 노골적으로 “남자야? 여자야?”라고 비아냥거리는 경우도 많다. 그때마다 모른 척하려고 노력한다.
진경 이야기를 들어보니 다양한 장소에서 다양한 차별을 경험하고 있다. 차별 발언을 하는 사람들은 그게 차별인지조차 인식 못하는 경우가 많다. 각자가 ‘차별금지법은 ○○○이다’로 정의 내리고 차별금지법이 필요한 이유를 설명해줬으면 좋겠다. 나는 ‘차별금지법은 마이크’라고 정의하고 싶다. 우리가 차별에 맞서 싸우는 도구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장애인차별금지법이 있지만 이 법만으로 차별에 맞서 싸우는 데 한계가 있다. 현재 장애인차별금지법에서 시정 명령은 법무부가 내릴 수 있는데, 시정 명령이 나온 사례가 몇 건 없다. 개별적으로 차별을 제한하는 방식은 효과가 크지 않다. 장애나 젠더, 인종 등은 복합적으로 작용하는 경우가 많으므로 포괄적 차별금지법이 꼭 필요하다. 사회 전체의 차별을 줄일 수 있다.
나랑토야 내 남편이 한국 사람인 것을 알고는 “한국 남자가 좋아? 몽골 남자가 좋아?”라는 질문을 받은 적이 있다. 정말 기분이 나빴다. 기분 나쁘지 않은 척하면서 “몽골 남자와 살아본 적이 없어서 잘 모르겠네요”라고 대답하고 넘겼다. 다시 그 상황이 된다면 질문 자체가 차별이고 나는 불쾌하다고 명확하게 말해주고 싶다. 하지만 현재는 강하게 대응할 방법이 없다. 그래서 ‘차별금지법은 용기다’라고 말하고 싶다. 차별금지법이 제정되면 이런 상황이 닥쳤을 때 이주민에 대한 차별 발언은 차별금지법에 위배된다고 당당하게 말해줄 것이다.
난다 언제부터인가 학력 차별을 노동 현장에서 직접 겪는 일이 그렇게 많지 않은 것 같다는 목소리가 있었다. 가만히 들여다보니 아예 공간이 분리됐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중졸과 고졸, 대졸, 명문대 출신은 이미 시작부터 완전히 다르다. 노동하는 공간도 완전히 분리돼 있다. 고용주들은 지원서를 받을 때 ‘학력 무관’이라고 명시하지만 아무도 그 말을 믿지 않는다. 누구도 정하지 않았지만 (대학을 나오지 않은)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정해져 있다. 학력이라는 ‘자격’에 갇히지 않고, 학력이 다르다고 무시당하지 않는 사회를 위해 차별금지법은 꼭 필요하다. 우리 마음을 위로해주고, 위축되지 않을 용기를 준다는 점에서 ‘차별금지법은 커피다’라고 말하고 싶다.
임푸른 ‘차별금지법은 평등으로 가는 첫걸음이다’라고 말하고 싶다. 차별금지법 자체로는 한국 사회에 차별을 금지해야 한다는 선언적 성격이 강하다. 일부에선 차별금지법이 통과되면 성소수자에 대한 차별 발언을 처벌할 것이라고 주장하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나는 가짜뉴스나 혐오표현에 대해 처벌하는 것에 의구심을 갖고 있다. 언론이 제구실을 해서 가짜뉴스를 바로잡고 혐오표현을 비판하면서 자연스럽게 해결해야 하는 문제라고 생각한다.
차별금지법은 차별을 처벌하기 위해 필요하다기보다 한국 사회에서 차별은 헌법정신에 위배된다고 선언하는 데 더 큰 의미가 있다. 이 선언을 토대로 혼인평등제도, 군형법 개정 등 각론을 정비해야 한다는 점에서 차별금지법 제정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다.
사라 ‘차별금지법은 인권이다’. 차별금지법이 있다면 출입국·외국인청에서 난민 신청자가 차별대우를 받고도 아무 말도 할 수 없는 일이 생기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광장에 나가 한목소리로 차별금지법의 필요성을 외치고 법이 생기면 한국 사회가 바뀔 수 있다고 믿는다.
10월19일 행진에서 울려퍼질 평등의 화음진경 마지막으로 10월19일 차별금지법 제정 촉구 행진에 참가하는 각오를 듣고 싶다.
난다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라는 속담이 있다. 지난해 행진에서 다양한 색깔의 구슬들이 알록달록 꿰어진 기분을 느꼈다. 우리 모두 다른 존재지만 행진하는 순간 함께 연결됐다는 연대감이 큰 힘이 됐다. 올해도 다양한 목소리를 들을 수 있으면 좋겠다.
임푸른 성소수자 입장에서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면 행진이 너무 많다. 주기적으로 개최되는 성소수자 행진만 십수 개에 이른다. (웃음) 주말에 몇천 명씩 모여 행진하는 일은 모두에게 쉽지 않은 일이다. 힘들다. 이번 행진에 나서는 각오는, 역설적으로 꼭 입법이 돼서 행진을 안 해도 되는 날이 왔으면 좋겠다는 것이다.
진경 장애인단체들은 장애인차별철폐의 날을 비롯해서 많은 집회와 행진에 참여하지만, 지난해 차별금지법제정연대의 행진은 사뭇 다른 분위기였다. 차별에 반대하고 평등을 요구하는 다양한 목소리들이 한 공간에서 만나는 경험이 특별했다. 누가 누구를 연대 한다는 의미보다는 함께 만들었다는 의미가 컸다.올해는 주제도 ‘평등을 말하라’여서 우리 메시지를 정부와 시민사회에 잘 알리는 기회가 될 것으로 기대한다. 그때 만나자.
글 이재호 기자 ph@hani.co.kr사진 박승화 기자 eyeshoo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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