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아무개(28)씨는 2018년 7월 전자우편 한 통을 받았다. 전자우편 제목은 ‘페미니즘에 대해 알고 싶습니다’. 내용은 단 두 줄이었다. “○○고등학교 졸업생 페미니즘 모임을 모집합니다. 010-××××-××××로 전화주십시오.” 한씨는 놀랐다. 전자우편에 적힌 ○○고등학교는 한씨가 졸업한 고등학교였고, 휴대전화 번호는 한씨가 쓰는 번호였다. 익명의 누군가가 한씨의 개인정보를 이용해 한씨에게 전자우편을 보낸 것이다.
페미니즘 인터뷰하자며 접근해
한씨가 자신의 개인정보가 적힌 전자우편을 받은 건 처음이 아니었다. 20일 전쯤 새벽 2시께 한씨가 사는 집 인근에서 만나자는 전자우편을 받았다. bxxxxxxxxx@daum.net이 보낸 글은 이랬다. “저는 극동대학교 페미니즘 동아리에서 활동하는 이○○ 학생입니다. 한○○님한테 몇 가지 질문을 하려고 합니다. 오늘 밤까지 답변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저는 경기도 부천시 ○○구 ○○로 부근에 거주하고 있는데 원하시면 내일 12시쯤에 만나뵙고 싶습니다.” 전자우편에서 언급한 곳은 한씨가 사는 지역이었다. 약 30분 뒤, hxxxxxxxxxxx@gmail.com으로부터 페미니즘에 대해 알고 싶다는 내용의 전자우편을 받았다. “저는 대전대학교 페미니즘 동아리에서 활동하는 강○○ 학생입니다. 저희 조 수행평가 학습 때문에 메일 드렸습니다. 저는 경기도 부천시 ○○구 ○○로 ○○○아파트 ○동에 거주하고 있는데 원하시면 내일 12시쯤 만나뵙고 싶습니다.”
“전자우편에 적힌 주소는 우리 집에서 직선거리로 불과 10m 정도밖에 안 되는 곳이었다. 대체 우리 집 주소를 어떻게 알았는지 모르겠다. 누군가 우리 집을 알고 있다는 생각에 너무 무서웠다.” 한씨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집 주소를 언급한 전자우편을 받고 나서 한씨는 같은 해 1월 받았던 전자우편을 생각해냈다. 한 대학교 신문방송학과 페미니즘 소모임에서 한씨를 인터뷰하고 싶다는 내용이었다. 당시 한씨는 전자우편에 적힌 연락처로 인터뷰가 가능하다는 내용의 문자메시지를 보냈지만 답은 없었다. “당시엔 인터뷰하지 않기로 했거나, 사정이 있어서 연락이 없는 거라고 생각했다.”
한씨는 자신에게 인터뷰하고 싶다고 보낸 전자우편의 주소와, 자신의 집 주소 인근을 언급한 전자우편 주소가 같다는 걸 확인했다. 그리고 자신에게 인터뷰를 사칭해 전자우편 여러 개를 보낸 사람이 한 사람이고, 그가 한씨 블로그에 종종 악성 댓글을 달았다는 것도 알게 됐다. 그가 자신의 전화번호와 집 주소까지 알고 있다는 것에 불안을 느낀 한씨는, 전자우편 계정의 소유주인 ㅇ(24)씨를 지난해 6월 고소했다. 고소 이후 모르는 번호로 수차례 전화가 오고, 안티페미 카페 회원이라는 사람에게 소셜네트워크 메시지가 오기도 했다.
집 주소 언급에 불안 느껴 고소했지만…
한씨는 그동안 한 포털 사이트 블로그에 한국 사회에 존재하는 성차별에 관한 주제로 글을 써왔다. 페미니즘 독서 모임을 하고, 성폭력 상담원 교육을 수료했으며, 여성단체에도 후원해왔다. 여성 시위에서 남성 페미니스트로 활동하기도 했다.
“페미니즘에 관심 가진 지는 5년쯤 됐다. 대학에서 여성 성평등 강의를 들었다. 평소 성별에 따른 차별이 없어야 한다고 생각하던 차라 수업이 쉬울 거라고 생각했는데 내가 생각한 게 전부가 아니었다. 남녀 불문하고 성 고정관념을 가지고 상대방을 재단하거나 상처 주지 않기 위해, 타고난 성별에 의한 차별이 없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공부를 시작하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부터 블로그에 한씨를 모욕하는 댓글이 달렸다. ‘삶의 목적이 여자들 꽁무니나 쫓아다니는 것’ ‘페미짓으로 환심 사려는 눈먼 애’ ‘이런 애들이 성욕 해소하려 창녀촌 찾는다’ ‘여자한테 칭찬받고 얼굴 벌게져서 뒤에 가서 헉헉거리며 딸친다’ ‘여자한테 잘 보이려고 오만가지 주접 떤다’ ‘자기 인생에 주체와 목적 없이 여자나 추종한다’ ‘정육점 섬기는 돼지 같다’ ‘극악무도한 노예 근성을 가졌다’처럼 페미니스트인 한씨를 모욕하는 댓글이었다. 백래시(사회·정치적 변화에 대해 나타나는 반발)였다. 악성 댓글에 달린 아이디는 여러 개였다. 댓글은 페미니즘을 다루지 않은 글들에도 달렸다.
댓글 무시와 아이디 차단이 이어지던 중 한씨가 사는 지역을 언급한 댓글과 쪽지가 왔다. 그때까지 무시한 댓글과 쪽지도 모자라 전자우편에서 집 주소를 언급하자 두려운 마음이 들었다. “나는 블로그에 내가 졸업한 고등학교 이름이나 내가 사는 지역을 쓴 적이 없다. 상대가 우리 집 주소를 알고 있다는 압박 때문에 무서웠다.” 이어 그가 말했다. “집에는 어머니와 누나가 있다. 몇 년 전 누나 방 창문 밖에서 바바리맨이 자위 행위를 한 적이 있어서 누나는 트라우마가 심하다. 그래서 누나가 밤에 귀가할 때면 나나 아버지가 버스 정류장까지 데리러 나가곤 했다. 이번에 가족에게 위해를 줄까봐 더 걱정됐다. 나는 남성이고, 안전에 민감한 사람은 아니었는데, 전자우편을 받은 뒤 길거리에 사람이 없으면 주위를 둘러보고, 현관문을 열 때도 뒤를 한번 돌아보는 버릇이 생겼다. 아버지도 집 근처에 수상한 사람이 있는지 경계하게 됐다.”
가해자는 안티페미 카페 간부
경찰 조사 결과, 한씨가 고소한 ㅇ씨는 안티페미 카페 일원이었다. “ㅇ씨는 카페 회비도 관리하는 간부였는데 내게 여러 아이디로 접근해왔다. 경찰 조사에서 확인된 것만 아이디 10개가 넘는다. ㅇ씨는 경찰 조사에서 여러 아이디로 접근한 것에 대해 ‘본인과 비슷한 생각을 가진 사람이 많아 보이게끔 하려고 했다’고 답했다”고 한씨는 전했다. ㅇ씨는 한씨뿐만 아니라 다른 페미니스트들에게도 여성을 혐오하는 글을 남겼다. ‘여자들은 후각강간 좀 하지 맙시다. 생리를 쌌으면 밖에 나오지 마라고’ ‘난 세상에서 한국 계집들을 제일로 혐오하지. 속 좁고 이기적이고 지 편안함만 추구하는 유사인류. 한보충은 모기, 파리 이하로 취급함’ 같은 식이다.
서울중앙지검은 지난해 9월 정보통신망 이용촉진 및 정보보호 등에 관한 법률 위반 혐의를 받았던 ㅇ씨에 대해 증거불충분(혐의 없음)으로 불기소 처분했다. 검찰은 “ㅇ씨가 쓴 댓글이 한씨를 조롱하며 비아냥거리는 내용이었지만 욕설이나 협박으로 볼 만한 단어는 확인되지 않는다” “다른 사람을 가장하여 전화를 달라고 하거나, 고소인의 주거지 부근에서 만나자는 내용으로 욕설과 협박으로 볼 만한 단어는 확인되지 않는다” “ㅇ씨가 쓴 댓글과 이메일이 한씨가 공포심이나 불안감을 유발하는 문언에 해당한다고 인정하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검찰이 ㅇ씨에게 불기소 처분을 내리자 한씨는 ㅇ씨가 그동안 자신에게 접근해온 방법, ㅇ씨가 안티페미 카페의 회원인 것, 그리고 ㅇ씨 이름의 이니셜, 학교 등의 글을 블로그에 올리기 시작했다. “ㅇ씨는 다른 페미니스트들에게도 여성혐오 글들을 남겼다. 다른 사람으로 자신을 사칭해 접근해 내 신상을 턴 것처럼, 다른 여성 페미니스트들에게도 같은 피해를 당할 수 있다는 걸 알려주고 싶었다.”
하지만 자신의 피해에 대해 쓴 글 때문에 한씨는 역고소를 당했다. 블로그에 ㅇ씨를 알 수 있는 정보를 올리고, 여러 아이디를 돌려 써가며 접근한 ㅇ씨를 ‘안티 페미계의 드루킹’이라고 했다는 이유였다. ㅇ씨는 고소장에 “본인의 신상을 어디서 캐왔는지, ‘혐의 없음’으로 나온 사건에 본인의 신상과 활동 아이디, 작성한 댓글을 거론하며 마치 고소인을 파렴치한 스토킹, 드루킹, 여성혐오 가해자로 몰고 있는 한씨 때문에 일상생활과 학교·단체 생활에 피해가 있다”고 적었다.
법원, 블로그 공개에 “명예훼손·모욕”
법원은 명예훼손, 모욕 등의 혐의로 지난 5월 한씨에게 약식명령으로 벌금 70만원을 부과했다. 인천지방법원 부천지원은 ㅇ씨가 쓴 글이라며 ‘한국 계집들을 제일 혐오한다’ ‘한보충은 모기 파리 이하로 취급한다’ 등이 담긴 글을 한씨가 공개하자 “ㅇ씨를 비방할 목적으로 정보통신망을 통해 공공연하게 사실을 드러내 피해자의 명예를 훼손하였다”고 판단했다. 또 ‘안티페미계의 드루킹’이라고 쓴 부분에 대해선 한씨가 ㅇ씨를 모욕했다고 봤다. 약식명령이 떨어진 뒤 ㅇ씨는 한씨에게 위자료 500만원을 달라며 민사소송까지 냈다. 한씨는 법원에 정식 재판을 청구했지만 최근 1심에서 패소했다.
한씨는 이렇게 말했다. “ㅇ씨는 페미니즘 동아리에서 활동하는 여학생들이 페미니즘 동아리에 가입하지 않으려는 자신의 딸을 괴롭힌다는 식으로 딸 가진 어머니를 사칭하고, 자신이 쓴 안티페미니즘 글에 자신의 다른 아이디를 동원해 긍정하는 댓글을 남기면서 여론 조작까지 시도했다. ㅇ씨의 악의적 행위를 많은 이들에게 알리기 위해 글을 썼는데 ㅇ씨는 반성하기는커녕 나를 역고소했다. 1심에서까지 패소해 억장이 무너지는 듯하다. 하지만 ㅇ씨 때문에 피해를 보는 사람이 생기지 않고, ㅇ씨 행위가 정당화되지 않도록 내 무죄를 인정받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
장수경 기자 flying710@hani.co.kr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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