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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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돼지열병바이러스, 사람이 숙주 아니라 다행

대형 이중나선 DNA 바이러스인데 RNA 바이러스 수준으로 돌연변이율 높아

유럽의 아프리카 식민지화 시기와 맞물려 300년 전 출현…200년 전부터 급속히 분화
등록 2019-09-30 03:13 수정 2020-05-02 19:29
아프리카돼지열병바이러스. 위키피디아

아프리카돼지열병바이러스. 위키피디아

아프리카돼지열병바이러스(ASFV)가 경기도 파주, 연천, 김포, 인천 강화 등으로 퍼지고 있다. ASFV에 감염된 돼지의 치사율이 100%에 육박하고 감염력마저 높아 매우 위협적인 상황이다. 백신마저 개발이 안 돼 속수무책이다.

한 가지 눈여겨볼 점이 있다. ASFV는 현대 과학이 발달한 뒤로 ‘덜 위협적’이라고 생각했던 바이러스 종류였다는 사실이다. 이들이 대유행하며 인류의 관심사로 떠오른 건 매우 오랜만이다. 백신 개발이 어려운 점 등 많은 문제도 이와 관련돼 있다. ASFV를 둘러싸고 무슨 일이 벌어진 걸까.

우리가 아는 신종 바이러스는 대부분 RNA 바이러스

바이러스는 크게 두 종류로 나뉜다. 생명체의 핵심인 유전정보를 DNA(디옥시리보핵산)에 담고 있는 ‘DNA 바이러스’와 RNA(리보핵산)에 담고 있는 ‘RNA 바이러스’다. RNA는 DNA에 비해 안정성이 낮아 쉽게 변형된다. 그래서 RNA 바이러스는 DNA 바이러스보다 돌연변이가 잘 일어나고 신종 감염병으로 등장할 확률도 높다. 종류와 수도 훨씬 많다.

최근 30~40년간 전세계를 공포에 빠뜨린 신종 바이러스는 대부분 RNA 바이러스다. 에볼라, 지카, 구제역, 조류인플루엔자(AI), 인간면역결핍바이러스(HIV), 신종인플루엔자, 중동호흡기증후군(MERS·메르스), 급성호흡기증후군(SARS·사스), 중증열성혈소판감소증후군(SFTS·일명 ‘살인진드기’) 등이 그것이다.

DNA 바이러스의 대표 선수들을 보면 느낌이 사뭇 다르다. 사마귀·자궁경부암을 일으키는 파필로마바이러스, 장염·유행성 결막염을 일으키는 아데노바이러스, 입술 물집을 일으키는 헤르페스바이러스 등이다. 숙주인 인간에게 치명적 손상을 일으키지는 않지만 쉽게 쫓아내기도 힘들다. 인간 면역세포의 공격을 잘 피하고 깊숙이 숨어 있다가 나타나기 때문이다.

치명적인 DNA 바이러스도 있긴 하다. 천연두는 인류 역사와 함께하며 수많은 사람을 죽이고 고통스럽게 했다. 하지만 1796년 백신 개발 뒤 크게 줄어 1977년부터 새로운 환자가 나오지 않았다. B형 간염 바이러스도 위협적이지만 백신이 개발됐다. 인간뿐 아니라 가축에게도 위험한 DNA 바이러스는 백신이 개발돼 예방접종으로 방어하고 있다. 워낙 돌연변이가 심해 백신을 개발해도 금방 소용없어지는 RNA 바이러스와 달리, DNA 바이러스는 백신으로 비교적 방어가 잘된다.

사람에 비유하자면 DNA 바이러스는 보수적 성향이 강하고 RNA 바이러스는 진보적 성향이 강하다. DNA 바이러스는 한 숙주에서 ‘가늘고 길게’ 살아가는 전략을 선택하고, RNA 바이러스는 여러 숙주를 옮겨다니며 ‘짧고 굵게’ 살아가는 전략을 선택하는 경향이 있다.

1971년 처음 제정된 볼티모어 분류법은 바이러스를 유전물질(DNA, RNA)과 나선(단일, 이중), 극, 복제 방식 등에 따라 7종류로 정의한다. 1군은 이중나선 DNA 바이러스, 2군은 단일나선 DNA 바이러스, 3군은 이중나선 RNA 바이러스, 4군은 양성 단일나선 RNA 바이러스, 5군은 음성 단일나선 RNA 바이러스, 6군은 단일나선 RNA 레트로바이러스, 7군은 이중나선 DNA 레트로바이러스다. 이 글에서는 논의를 단순화하고자 크게 DNA 바이러스와 RNA 바이러스로 구분했다. (그림 출처 : ViralZone, SIB 스위스 생물 정보학 연구소)

1971년 처음 제정된 볼티모어 분류법은 바이러스를 유전물질(DNA, RNA)과 나선(단일, 이중), 극, 복제 방식 등에 따라 7종류로 정의한다. 1군은 이중나선 DNA 바이러스, 2군은 단일나선 DNA 바이러스, 3군은 이중나선 RNA 바이러스, 4군은 양성 단일나선 RNA 바이러스, 5군은 음성 단일나선 RNA 바이러스, 6군은 단일나선 RNA 레트로바이러스, 7군은 이중나선 DNA 레트로바이러스다. 이 글에서는 논의를 단순화하고자 크게 DNA 바이러스와 RNA 바이러스로 구분했다. (그림 출처 : ViralZone, SIB 스위스 생물 정보학 연구소)

20세기 초 케냐에 돼지 대량유입된 뒤 유행

다시 ASFV로 돌아와보자. ASFV는 DNA 바이러스다. 그중에서도 덩치가 크고 안정성이 높은 종류인 대형 이중나선 DNA 바이러스다. 이 종류는 일반적으로 돌연변이율이 매우 낮다. 그런데 ASFV는 예외다. 비슷한 크기의 이중나선 DNA 바이러스인 감마-헤르페스 바이러스보다 돌연변이율이 무려 1만 배에서 10만 배나 높다. RNA 바이러스에 가까운 돌연변이율이다.(참고문헌1) 현재 ASFV는 유전자가 조금씩 다른 24개 유전형이 있다.

이런 빠른 돌연변이는 최근 200여 년간 집중적으로 나타났다. ASFV는 지금으로부터 약 300년 전인 1700년대 초반 동아프리카에서 나타났을 것으로 추정된다.(참고문헌2) 이때 ASFV는 현재 존재하는 24개 유전형과는 다른, 이들의 공통 조상이다.

ASFV의 출현과 빠른 돌연변이 모두, 유럽 제국의 아프리카 식민지화와 관련 있다. 1700년대 전까지 사하라사막 남쪽에선 돼지가 대규모로 사육되지 않았다. 돼지는 유럽·아시아 등에서 처음 가축화돼 함께 살아왔다.

1400년대 후반 대항해 시대가 시작됐다. 유럽인들이 배를 타고 새로운 항로를 개척했다. 포르투갈인들은 아프리카 남쪽 끝 희망봉을 지나 인도로 향했다. 그리고 1500년대부터 1600년대에 걸쳐 동아프리카 해안 지역에 돼지를 들여오기 시작했다. 아프리카 동남쪽 모잠비크에서 돼지 사육이 시작돼 북쪽으로 서서히 확산됐다. 이 지역에 살던 멧돼지, 물렁진드기와 돼지 사이에 바이러스가 상호 전파되다가 1700년대 초 ASFV의 조상이 출현했다.

1800년대 들어 영국이 동아프리카의 케냐를 식민지화했다. 이 무렵 감염병이 돌아 소가 집단폐사하자, 돼지를 대규모 사육하기 시작했다. 영국은 1904~05년 케냐에 돼지를 대량으로 들여왔다. 그로부터 몇 년 뒤인 1907년 케냐에서 처음 ASFV가 유행했다.

ASFV는 1800년대 동아프리카에서 서아프리카, 유럽, 아시아로도 퍼졌다. 대륙 간 무역이 활발해지며 사람과 돼지의 이동도 잦아졌다. 1800년대부터 ASFV의 유전적 다양성이 급속히 커졌다. 돼지의 잦은 이동과 새로운 환경(아프리카 열대지방) 접촉 때문에 돌연변이율이 높아졌는지, 아니면 다른 요인이 있었는지는 알지 못한다. 어쨌든 이 시기와 맞물려 폐사율이 100% 이르는 급성형, 만성질병을 일으키는 만성형 등 다양한 유전형의 ASFV가 등장했다. 그리고 유럽, 아시아 등 세계로 빠르게 퍼져갔다.

ASFV는 놀라울 정도로 빠르게 다양화됐다. 이런 변화가 감염력 및 독성과 얼마나 관련이 있는지는 아직 연구가 부족하다. 다만 일반적으로 RNA 바이러스가 DNA 바이러스보다 새로운 환경에 잘 적응하고 대유행을 일으킬 확률이 높은 것처럼, ASFV도 그것이 가능한 조건을 역사적으로 갖추게 됐다고 볼 수는 있다.

각 바이러스 종류별로 돌연변이율(Mutation rate)과 치환율(Substitution rate)을 비교한 그래프. 이중나선 DNA 바이러스(dsDNA), 단일나선 DNA 바이러스(ssDNA), 단일나선 RNA 바이러스(ssRNA), 레트로바이러스(Retro) 등에 따라 차이가 난다. 그래프에서 왼쪽으로 갈수록 돌연변이율이 높다. (그래프 출처 : 논문(doi: 10.1038/nrg2323)) 돌연변이율은 자연적 돌연변이가 발생하는 비율이고, 치환율은 생존 계보에 유전적 변화가 축적되는 비율이다. 이 글에서 서술한 ASFV의 돌연변이율은 정확히 말하면 치환율이다. 돌연변이율과 치환율에 대한 보다 자세한 설명은 논문(doi: 10.1038/nrg3564)에서 확인할 수 있다.

각 바이러스 종류별로 돌연변이율(Mutation rate)과 치환율(Substitution rate)을 비교한 그래프. 이중나선 DNA 바이러스(dsDNA), 단일나선 DNA 바이러스(ssDNA), 단일나선 RNA 바이러스(ssRNA), 레트로바이러스(Retro) 등에 따라 차이가 난다. 그래프에서 왼쪽으로 갈수록 돌연변이율이 높다. (그래프 출처 : 논문(doi: 10.1038/nrg2323)) 돌연변이율은 자연적 돌연변이가 발생하는 비율이고, 치환율은 생존 계보에 유전적 변화가 축적되는 비율이다. 이 글에서 서술한 ASFV의 돌연변이율은 정확히 말하면 치환율이다. 돌연변이율과 치환율에 대한 보다 자세한 설명은 논문(doi: 10.1038/nrg3564)에서 확인할 수 있다.

같은 과에 속한 바이러스 없어

ASFV는 인류가 그전까지 만나보지 못한 바이러스다. 보통 유전체의 구조와 복제 방식이 비슷한 바이러스를 하나의 ‘과’(family)로 묶는데, ASFV는 같은 과에 속한 바이러스가 없다. ASFV의 친척이 인간과 가축에게서 한 번도 발견된 적이 없다는 뜻이다. 이는 ASFV의 조상이 인간·가축과는 전혀 다른 환경에서 살아왔다는 점을 시사한다. 조상 대대로 함께 살아본 적 없는 낯선 숙주와 바이러스가 만난 셈이다.

바이러스 연구자인 정용석 경희대 생물학과 교수는 “바이러스가 종을 넘어 이동할 때 기존 숙주와 유전적 차이가 크면 클수록 큰 충격을 일으킬 수 있다”고 말했다. DNA 바이러스 중 유일하게 절지동물(물렁진드기)을 통해 전염될 수 있는 바이러스라는 것도 특이한 점이다.

ASFV는 RNA 바이러스의 장점(빠른 돌연변이)도 일부 가지고 있지만, DNA 바이러스가 원래 가지고 있는 뛰어난 생존전략도 지닌다. 숙주의 면역계 공격을 아주 효과적으로 피할 수 있다. 이는 큰 덩치 덕분이다. ASFV는 염기쌍(DNA와 RNA를 이루는 기초 단위)이 17만 쌍에서 19만 쌍이나 된다. RNA 바이러스 중 최대 크기인 코로나바이러스의 염기쌍이 3만 쌍에 불과한데 이보다 6배가량 크다. 그 덕분에 단백질을 최대 167가지나 만들 수 있다. 참고로 에볼라바이러스는 겨우 7가지 단백질을 만들 수 있다.

ASFV는 이 단백질들을 이용해 숙주 면역세포의 공격을 효과적으로 피한다.(참고문헌3) 우선 면역세포가 적이 침투했다는 신호를 내보내지 못하게 한다. 아예 면역계 최전선을 지키는 정찰병인 대식세포에 침투해 번식 도구로 삼는다. 면역계가 감염된 면역세포의 자살을 명령해도 무력화한다. 많은 연구가 이뤄졌지만 ASFV가 어떻게 대식세포에 침투하고 면역계를 교란하는지 확실히 알지 못한다. 정용석 교수는 “유전체가 굉장히 크다는 것은 매우 독자적인 활동 능력을 가지고 있으며 유연성이 크다는 뜻이기도 하다”며 “사람이 숙주가 아니라 너무 다행”이라고 했다.

그래서 백신 개발도 어렵다. 1960년대부터 백신 연구가 이뤄졌는데 기존에 주로 사용하던 방식이 대부분 불가능하다고 밝혀졌다. 바이러스를 죽이거나 비활성화해서 건강한 동물에 넣었지만 항체가 제대로 만들어지지 않았다. 항체가 있어야 다음에 진짜 바이러스가 들어왔을 때 면역계가 맞서 싸울 수 있다.

약독화 생백신(살아 있으면서 병원성이 약한 바이러스)을 넣으면 일부 항체가 생성되기는 한다. 하지만 돼지에게 폐렴, 운동 장애, 피부 괴사, 유산 등을 일으키는 부작용이 있어 안전하지 않다. 백신으로 사용한 바이러스가 건강한 돼지에게 퍼지면서 고병원성으로 변할 위험도 있다. ASFV 백신 연구자인 선우선영 건국대 수의학과 겸임교수는 “한국은 아직 ASFV가 전국에 퍼지지 않아 약독화 생백신을 고려할 단계가 아니다”라고 했다. “재조합 단백질 백신, DNA 백신 등 최신 기술을 적용한 백신이 연구되고 있지만 아직 상용화할 만큼 성공하지 못했다.”

ASFV는 DNA 바이러스치고는 돌연변이율이 높은 편이다. 사람으로 전파될 가능성도 있을까. 선우선영 겸임교수는 “ASFV는 워낙 거대한 바이러스라 전체가 아닌 일부만 측정해 돌연변이율을 계산한 것”이라며 “전체 유전체가 얼마나 변하고 있는지는 모른다”고 했다. 크기가 작은 RNA 바이러스와 달리 돌연변이율이 불확실하다는 뜻이다. 사람으로 옮겨갈 가능성에 대해선 “100년 넘게 그런 보고가 없었다”며 언급 자체를 자제해달라고 했다.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게 많다

ASFV는 평범하지 않다. 천연두 박멸 뒤 드물게 전세계에 대유행을 일으킨 대형 이중나선 DNA 바이러스다. 기존에 알려진 DNA 바이러스와 사뭇 다른 특성을 띤다. 인류가 그동안 만나보지 못한 새로운 종류(과)에 속한다. 유럽의 아프리카 식민지화 시기와 맞물려 빠르게 진화했다. 아직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것이 더 많다. ASFV는 새로운 공포이기도 하지만, 바이러스와 생명 진화에 대한 인류의 이해를 넓히는 데 중요한 계기가 될 수도 있다.

참고문헌 1. doi: 10.1371/journal.pone.0069662
2. doi: 10.1371/journal.pone.0192565
3. doi: 10.3390 / vaccines5040035
변지민 기자 dr@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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