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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라보, 청년 촌라이프

경상남도 남해 ‘팜프라촌’에 도시 생활 지친 청년들 모여
농사짓고 집 지으며 농촌 생활 인큐베이터에서 삶 실험

제1279호
등록 : 2019-09-16 12:29 수정 : 2019-09-16 1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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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2일 경상남도 남해군 상주면 ‘팜프라촌’에서 생활 중인 팜프라촌민과 운영진들. 도시 생활에 지쳐 떠나온 이들은 이곳에서 도시 밖 삶을 실험하고 있다. 박승화 기자
번잡한 서울에서 약 400㎞, 5시간30분쯤 차로 달리면 닿는 경남 남해군 상주면 양아리. 뒤로는 금산이 버티고, 앞으로는 남해 앞바다가 펼쳐진 콩 모양의 소박한 마을에 청년 12명이 모였다. 늦은 밤엔 박쥐가 날아다니는, 폐교인 ‘양아분교’에 이불 보따리를 풀어놓은 청년들은 대체 무슨 꿍꿍이일까.

지원서까지 써서 남쪽 끝으로

“이장님이 트랙터로 밭을 갈아엎어주셨다. 비가 와서 땅이 질지만 오늘은 밭을 만드는 작업을 할 거다. 맨 끝은 진입로로 다지고 고랑에서 파낸 흙을 왼쪽으로 넘겨 이랑을 만들면 된다.” 부슬비가 내리던 9월2일 오후, 양아분교 뒤편 잡초 뿌리가 땅 위로 올라온 66평짜리 황무지를 눈앞에 두고 귀농 7년차인 정광하(39)씨가 말했다.

광하씨의 말이 끝나자 장화와 챙이 넓은 꽃무늬 모자, 그리고 삽이 좀체 어울릴 것 같아 보이지 않는 이삼십대 청년 셋이 삽을 들고 한 줄로 나란히 섰다. 이들은 광하씨가 박아놓은 말뚝 사이 흰 줄을 기준선으로 잡고 땅에 삽을 연신 박아댔지만, 여간해서 서툰 삽질로는 젖은 흙덩이를 들어올리는 게 쉽지 않았다. “여기 갯벌 같아.” 권진영(29)씨가 젖은 흙이 달라붙어 무거운 다리를 옮기며 혼잣말을 했다. 이어 움푹움푹 파인 진입로를 편평하게 다지며 말했다. “울퉁불퉁한 모습도 사랑할 수 있어. 내 밭이니까. 아! 안주 없이 막걸리 마시고 싶다.”

진영씨는 ‘팜프라촌민’이다. 8월 중순 입주했다. 방은 2인1실, 화장실과 샤워실은 별도 건물에서 공동으로 사용, 공동식당에서만 잡히는 와이파이까지. 얼핏 보면 불편함투성이인 팜프라촌에 진영씨는 지원서까지 써가며 입주를 희망했다. 그리고 입주를 허가받은 뒤 미련 없이 도시를 떠났다. “서울에서 회사 생활을 하면서 바쁘고 힘들어서 끼니를 거를 때가 많았다. 기본 욕구가 배제되니까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해도 이게 맞는 건가 싶었다.”

팜프라촌을 만든 이들은 ‘팜프라’(FARMFRA). 팜프라는 ‘Farm+Infra’의 줄임말로 ‘기반 없는 청년들을 위한 농업 인프라 구축’을 목표로 한다. 유지황(32) 팜프라 대표는 “땅, 집 같은 기반이 없는 청년들은 농촌에 들어오기 어렵다. 이들이 스스로 농촌에서 살 수 있도록 농사와 집을 짓는 방법을 알려줄 필요가 있다”고 했다.


유 대표는 청년들이 농촌에 적응할 수 있게 돕고, 농업 정책 제안 등의 역할을 위해 2018년 2월 팜프라를 만들었다. 진영씨처럼 경쟁을 기반으로 한 도시 생활에 지치고, 촌에서 살아보고 싶은 19~39살 팜프라촌민들은 팜프라촌에 모여 105일 동안 농사를 지으며 ‘식’을, 집 짓기 교육을 받으며 ‘주’를 해결한다. 또 생활비를 내고 자치 시스템인 조례를 만들며 도시 바깥에서 대안적인 삶을 실험한다.

사표 내고 촌에 와서 ‘인생 실험’

촌민들은 대부분 도시 생활에 지친 퇴사자였다. 진영씨와 함께 팜프라촌에 입주한 남편 이준민(34)씨도 그중 한 명이다. 준민씨는 팜프라촌에서 “퇴사한 게 대단하다”는 말을 듣는 공무원이었다. 하지만 입사 3년6개월째 되던 올여름, 민준씨는 공무원을 그만뒀다. “밤 9~10시에 퇴근하면 피곤하니까 (아내가) 말을 거는 게 귀찮았다. 나에게 중요하지 않은 사람들에게 많은 에너지를 쏟느라, 정작 내게 중요한 사람한테는 쏟을 에너지가 없었다. 어느 평일 저녁엔 아내와 함께 밥을 먹는데 그 상황이 너무 낯설었다. 같이 먹은 적이 없어서. 이게 정상적인 거냐라는 질문을 던졌을 때 그렇다는 대답이 쉽게 안 나왔다.” 진영씨는 이때를 “하우스메이트(집 짝궁) 같았다”고 했다. 2년을 고민한 부부는 조직에서 사는 삶에서, 사람이 너무 많은 도시의 삶에서 벗어나기로 했다.

어린 시절을 농촌에서 보낸 홍수연(23)씨도 도시의 삶이 버거웠다. 되풀이되는 삶에서 얻는 것도 없었고, 뿌듯하지도 않았다. 팜프라촌 입주 공고를 보고 사표를 냈다. “서비스업에서 일했다. 월세를 벌고 생활비를 버느라, 하루 벌고 하루 사는 느낌이었다. 월세가 43만원, 공과금을 합치면 50만원이 넘었다. 서울에 살면 그만큼 돈이 나간다. 도시의 삶은 막막했다. 힘들수록 시골의 삶이 더 고팠다.”

도시를 벗어난 삶을 고민하는 이들에게 팜프라촌은 일종의 실험실이다. 도시를 떠나서 삶이 가능한지, 자신이 그 삶을 살 수 있는지, 농사는 지을 만한지 같은 농촌 생활을 미리 경험해보며 시행착오를 줄이고, 비슷한 생각을 하는 또래들과 정보와 고민을 나눈다.

‘귀농’ 라이프가 목표인 강민경(25)씨는 도시에서 학원 강사와 카페 직원으로 일하다 팜프라로 왔다. 대학을 졸업하고 강사로 일한 학원은 학교 교사보다 경쟁이 훨씬 심했다. 학생 수대로 수당을 받았다. 애들 몇 명을 데려오느냐에 따라 민경씨의 월급이 달라졌다. 민경씨는 도시에서의 삶이 쓰레기를 만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트에서 장을 보면 식재료 쓰레기가 식재료보다 많았다. 과대 포장 때문이었다. “흙에서 자란 걸 먹고, 다시 흙으로 돌려보내는 것이 지속가능한 순환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채소가 생산되는 과정을 보고 싶었다. 농업에도 여러 길이 있으니 이곳에 살면서 알아보고 싶다.”

팜프라촌민들이 양아분교 뒤에 있는 황무지를 밭으로 개간하고 있다.

촌장 없애는 것도 촌민회의에서 결정

민경씨와 같은 숙소를 쓰는 이경진(32)씨는 농사를 배우고 싶지만 농부가 되고 싶은 건 아니다. 국제개발구호단체에서 일했던 경진씨는 농사일을 배워 빈민국에 스스로 먹고살아갈 수 있는 방법을 전하고 싶다. “현장에서 사업을 하다보면 용접이나 미장 교육을 해도 사람들이 오지 않는다. 일당을 포기하고 교육받으러 올 수 없기 때문이다. 먹고사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교육도 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을 건사하는 방법을 배우고 전하기 위해 팜프라촌에 왔다.”

촌민들의 생활은 매주 월요일 오전에 열리는 촌민회의에서 결정된다. 생활비를 어떻게 쓸지, 식사 당번을 어떤 식으로 운영할지도 촌민회의에서 논의한다. 9월2일 오전에 열린 회의에서는 촌민들이 일주일에 한 번씩 돌아가면서 맡기로 했던 촌장을 없애기로 결정했다. 촌장을 맡은 사람이 부담스러울 수 있다는 이유였다. 이를 제안한 경진씨가 말했다. “촌장의 역할은 명확하진 않았지만 회의를 이끌고, 촌민들 의견을 수렴하고 촌민들 상황을 살피는 걸로 서로 묵시적 합의가 있었다. 그런데 다른 촌민을 살피는 것에 부담이 있었다. 그래서 모두가 다 촌장의 역할을 하고 회의 사회자를 매주 바꿔서 정하면 촌장이라는 말에서 생기는 부담이 덜하지 않을까 싶었다.”

촌민들의 생활은 주로 아침 8~9시에 시작한다. 언제 일어나고 자야 하는지, 무슨 일을 해야 하는지 정해진 것은 없다. 단지 목공이든, 농사든, 양계장 디자인이든 자신이 잘하거나 원하는 일을 주도적으로 한다. 운영팀들은 개입하지 않고, 영상을 찍고 일지를 작성하며 이들의 생활을 기록한다.

도시에서 배달 음식이나 인스턴트로 연명하던 청년들이 매 끼니를 만들어 먹기는 쉽지 않았을 터, 입주 바로 다음주엔 반찬워크숍이 열렸다. 반찬 여러 개를 미리 만들어놓으면 식사 당번의 부담이 줄어들 수 있다는 판단이었다. 유 대표 어머니의 지원 아래 오징어채무침(진미채), 파멸치무침, 묵은지볶음, 양파장아찌 등이 냉장고에 쌓였다.

땅, 집 기반 없는 청년들에게 기회를

팜프라촌을 만들고 촌민들을 모은 사람은 유 대표다. 유 대표는 세계 청년 농부들이 어떻게 기반을 만드는지 배우려고 친구 둘과 함께 2013년부터 2015년까지 약 2년 동안 오스트레일리아, 베트남 등 13개국 35개 농장을 돌았다. 인도네시아에선 학교 밖 청소년들을 데려다가 유기농업을 가르치는 모습을 보았고, 오스트레일리아에선 생태공동체를 만나고, 농장에서 돈을 벌었다.

유 대표가 농업에 관심을 갖게 된 건 20대 초반 이집트 배낭여행을 하면서다. “자동차 밑마다 아이들이 들어가서 자고 있었다. 그 애들을 보고 난 뒤 많은 질문이 생겼다. 이들이 나처럼 앞으로 여행하고, 삶을 선택하며 살 수 있을까 싶었다.”

유 대표는 한국에 돌아와서 몽골, 중국, 동남아시아를 돌며 왜 이들이 가난한지 공부했다. 결론은 시스템이었다. “내 삶의 키워드는 ‘식·주·학’이다. 먹을 것을 키워내고, 보호받을 공간이 있고, 교육을 잘 받으면 그들의 삶도 차츰 변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지속가능성을 기반으로 하는 시스템을 만드는 공부를 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집도 땅도 없는 빈털터리 청년이 농촌에서 농사짓는 것은 도시에서처럼 쉽지 않았다. 유 대표는 이집트 여행에서 돌아와 몇 년 뒤인 2012년 경남 통영에서 땅을 빌려 농사를 지었지만, 1년쯤 됐을 때 땅 주인에게 쫓겨났다. “땅이 없는 청년들이 농촌 생활을 하는 건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걸 깨달았다.” 이후에도 땅을 빌려 농사짓다가 네댓 번 밀려나길 반복했다. 7년 농촌 생활 끝에 팜프라촌을 만들게 된 계기다.

“팜프라촌 같은 중간 장치가 없으면 촌라이프(시골 생활)를 시작하기 어렵다. 하지만 촌민들은 농사짓고, 곡괭이질하고, 밭을 가는 방법을 배울 수 있다. 집을 짓고 방충망을 갈아끼울 수도 있다. 도시를 벗어난 곳에서 하는 경험이 촌민들에게 도움이 됐으면 좋겠다.”

유 대표는 ‘코부기 워크숍’도 하고 있다. 코부기는 협동이라는 의미의 영어 ‘코퍼레이션’의 ‘코’와 거북을 합친 단어다. 거북처럼 등딱지 속에서 쉴 수 있고 이동도 쉬운 주거지를 만든다. 보증금을 털어 만든 코부기 1호를 시작으로, 코부기 워크숍 시즌4를 진행하고 있다.

심고 뿌리고, 이제 시작

9월3일 아침, 촌민들은 전날 심은 애플민트, 공심채, 잎샐러리, 상추, 브로콜리 옆자리에 배추와 무를 심으려고 또다시 밭이랑을 다졌다. 금산에 짙게 낀 안개와 구름이 수묵화를 만들었지만, 촌민들 눈에는 풍광보다 전날 다 뽑지 못한 잡초가 먼저 들어왔다. 누군가 튼 노동요에, 촌민들의 촌라이프는 더 흥이 올랐다.

“낯설었던 남해에서 지내는 생활이 좋아요. 105일이 다 지난 뒤 내 삶이 어떻게 될지 모르겠지만, 이 공간이 보장되고 남해에 살고 싶어지면 남해에서 할 수 있는 게 있을 것 같아요.”(민경)

남해= 장수경 기자 flying710@hani.co.kr

사진 박승화 기자 eyeshoo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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