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시 한국에는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가 올 수밖에 없는 구조적인 문제점이 있었습니다. 우리 개개인이 잘못된 선택을 했기 때문에 불행했던 게 아니었습니다. 영화를 통해서 어려운 시기를 견뎌낸 사람들에게 위로를 건네고 싶었습니다.”
1997년 12월 한국을 휩쓸었던 경제위기를 다룬 영화 의 엄성민 작가는 인터뷰에서 영화로 전하고 싶었던 메시지를 ‘위로’라는 한 단어로 요약했다.
IMF를 다룬 영화 시나리오를 쓰기 위해 엄 작가는 사업 실패와 경제적 어려움을 겪은 사람들을 수소문해 만났다. 국가 규모의 큰 경제위기였기 때문에 IMF로 힘들었던 사람을 찾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엄 작가가 이렇게 발로 뛰어 모은 이야기를 꿰뚫는 단어는 ‘후회’였다. 엄 작가는 “IMF 때 어려움을 겪은 사람들의 특징은 ‘내가 그때, 그 선택만 하지 않았으면 어땠을까’라며 후회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하지만 IMF는 이분들이 사업을 잘못하고, 어떤 선택을 잘못하고의 문제가 아니었다”고 말했다.
통계학 전공 작가, 국내서 낯선 ‘경제 스릴러’ 성공“사업을 하기 전에 언론 보도와 정부에서 내놓는 보고서를 많이 검토했다. 하지만 이 정도의 큰 위기에 대한 예측은 없었다. 내가 본 경제 예측과 현실은 크게 달랐다.” 당시 건설 중장비 수입 사업을 했던 엄 작가의 아버지가 회상하는 IMF다.
엄 작가의 집도 외환위기의 태풍을 피하지 못했다. 아버지가 달러로 중장비를 수입하는 사업을 했는데 원–달러 환율이 폭등하면서 큰 경제적 타격을 입었다. “세상 물정을 모르는 어린이의 시선으로 봐도 뭔가 큰일이 일어났고 부모님이 고생한다는 걸 알았다. 학교에서 선생님이 ‘부모님이 실직한 사람은 교무실에 와서 이야기를 하라’ 했고, 집이 어려워서 학교 체육복을 구입하지 못한 친구들이 있었다. 갑자기 전학을 가거나 학원에 나오지 않는 친구들이 늘었다.” 당시 초등학교 6학년이던 엄 작가는 금반지와 집에 있던 금붙이를 꺼내 ‘금 모으기’ 운동에 동참했던 어머니를 떠올렸다.
은 단군 이래 최대의 경제위기로 꼽혔던 1997년 외환위기를 다룬 첫 영화다. 한국이 IMF에 구제금융 협상을 체결한 1997년 12월3일, 21주기를 일주일여 앞둔 11월28일 개봉했다. 대중의 반응은 뜨겁다. 상영 9일 만인 12월6일 현재, 누적 관객 수 200만 명을 돌파했다. 영화계의 ‘비수기’로 꼽히는 11월 말이라는 개봉 시기를 감안하면 대단한 선전이라고 영화 관계자들은 평가했다.
영화는 한국이 경제 호황에 취해 있었던 시기, 세 명의 인물을 조명한다. 경제위기를 예상하고 상부에 보고해 대책을 고심하는 한국은행 통화정책팀장 ‘한시현’(김혜수), 초유의 경제위기를 예상하고 종합금융회사에 사표를 던지고 국가부도 위기에 역으로 투자를 결심하는 금융맨 ‘윤정학’(유아인), 이런 상황을 알지 못하고 한 대형 백화점에 제품 납품을 어음으로 계약하고 기뻐하는 ‘갑수’(허준호)다. ‘국가부도의 날’을 일주일 앞두고 소용돌이에 빠져드는 국가경제와 세 인물의 삶이 빠르게 교차하면서 관객의 몰입도도 높아진다.
“ 영화 봤어? 구성이 탄탄한데, 경제부 기자가 언론사 그만두고 처음 쓴 시나리오래.”
기자가 처음 엄 작가와 인터뷰를 하겠다고 마음먹은 건 방송국 피디인 대학 동기의 제보를 받고서였다. 하지만 ‘엄성민 기자’가 쓴 기사를 아무리 검색해도 기사가 나오지 않았다. 소문에 대해 엄 작가는 “저도 들어보지 못한 소문인데요”라며 멋쩍게 웃었다. 그는 픽션보다는 논픽션을 많이 읽고, 신문을 꼭 챙겨 보긴 하지만 기자가 되겠다는 생각은 해본 적 없다고 털어놨다.
엄 작가를 놓고 이런 소문이 돈 것은 국내에서 주목받기 어려운 ‘경제물’이 꽤 잘 만들어졌기 때문으로 보인다. 미국에선 2008년 세계 금융위기를 다룬 같은 영화가 흥행을 거두면서 이른바 ‘경제 스릴러’가 주목받았지만 국내 관객에겐 생소한 장르다. 은 각종 경제지표들이 악화되면서 국가부도의 순간이 엄습하는 과정을 세밀하게 그려냈다. 영화에서 많이 등장하는 어려운 경제 용어가 자칫 피로감을 높일 수도 있었지만 간결한 설명으로 관객의 이해를 돕는다.
“IMF 이후 한국 사회가 많이 바뀌었고, 그 변화가 IMF 협상 내용과 긴밀한 관련이 있다는 게 문제의식의 출발점이었다. 노동 유연화와 비정규직 증가 등의 문제는 IMF 때문에 생긴 건 아니었지만 한국 사회의 담론으로 떠오르는 계기가 됐다. 우리가 이런 변화의 출발점이었던 그(IMF) 협상을 돌아봐야 하는 때가 됐다.”
IMF 때 정부·언론, 세월호·메르스 때 판박이대학에서 통계학을 전공한 엄 작가는 학창 시절 IMF와 IMF 이후 한국 사회를 이끈 신자유주의에 관심을 갖고 들여다봤다. 대학을 마친 뒤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전문사에서 시나리오를 다시 공부하며 IMF를 다룬 상업영화 시나리오를 써보고 싶다는 꿈을 꿨다. 그는 시나리오를 쓰기 위해 IMF 협상 기록, 국회에서 진행된 ‘IMF 환난 경제청문회’, 각 기관에서 집필한 IMF의 영향에 관한 연구보고서들을 탐독했다.
엄 작가는 “한시현이 재정경제부(현 기획재정부) 공무원과 정보 공개를 놓고 설전을 벌이고, 윤정학은 국가부도에 역으로 투자하는 투자 설명회를 열며, 평범한 공장주 갑수가 어음 계약서에 동의하는 세 이야기가 맞물리는 장면이 가장 중요하기 때문에 많은 공을 들였다”고 했다. 국가경제 위기라는 거대한 물줄기와 그 흐름 속에 포함돼 있지만 방향을 읽을 수 없는 개인의 삶 사이에 화면 전환이 많고 빠르게 이뤄지지만, 산만한 느낌을 주지 않았던 것은 이 영화의 감상 포인트다.
의 배경이 되는 경제위기는 21년 전 일이지만 영화에서 묘사되는 정부와 관료, 언론의 모습은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조금도 낯설지 않다. 거대한 재난 상황 앞에서 이들이 대응하는 방식이 지금과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2014년 세월호 참사 때는 “전원 구조됐다”는 언론의 잘못된 보도로 공동체에 큰 상처를 남겼고, 정부는 더 많은 희생자를 구할 수 있는 기회를 놓쳤다. 2015년 메르스(중동호흡기증후군) 유행 때는 감염병 관리에 실패한 정부가 감염병 확산 경로에 관한 정보 공개까지 미뤘다. 정부의 늑장 대응 때문에 메르스와 관련한 악성 소문이 떠돌자, 정부는 “악성 소문이 정부의 방역 활동을 지연시킨다”며 되레 탄압에 나섰다. 에서도 IMF 구제금융 요청을 전후해 언론과 정부는 “국민들이 사치하고 흥청망청했기 때문”이라며 평범한 시민의 책임을 강조한다. IMF 때 어려움을 겪었던 사람들을 지배하는 정서가 ‘원망’이 아니라 ‘후회’로 귀결되는 것도 이처럼 정부가 경제위기의 책임을 개인에게 돌린 결과일지 모른다.
그때 선택 ‘최선’이었는지 물어야 할 때엄 작가는 “영화를 통해 강조하고 싶었던 것은 IMF 협상이 한국 사회에, 우리 삶에 얼마나 큰 영향을 줬는지 생각해보자는 것이었다. 그리고 우리의 선택은 최선이었는지, 할 수 있는 선택은 이것뿐이었는지 다시 한번 묻고 싶었다”고 강조했다. 그는 우리가 했던 선택이 아닌, 다른 가능성을 모색하기 위해 ‘한시현’이라는 가상의 인물을 불러냈다.
“실제로 한시현과 같은 인물은 존재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때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더 많은 사람을 위한 선택을 위해 분투하는 인물이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고 상상했다. 그 가상 인물의 활약을 보는 것만으로도 엄혹한 시기를 버텨온 우리에게 위로를 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엄 작가는 한시현과 거대 경제권력의 대립이라는 구도가 실제로는 훨씬 복잡한 층위의 사실을 ‘선악 구도’로 단순화한다는 지적이 나올 수도 있다고 봤다. 그러나 그 시대를 견뎌낸 사람들에게 진실을 가리는 상상력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차기작도 ‘실화’ 바탕… 데뷔 전 ‘손바닥문학상’ 입선도“에서 주최하는 손바닥문학상에도 공모했습니다.”
엄 작가는 ‘제7회 손바닥문학상’에서 수상하지는 못했지만 입선해 작품집에 글이 실린 경험이 있다고 털어놨다. 엄 작가의 작품은 ‘K와 나’라는 제목의 단편소설이었다. 군대에서 소대장으로 일하는 젊은 간부인 ‘내’가 나이 많은 선임부사관 ‘K’의 죽음을 수습하면서 K에 대해 알지 못했던 사실들을 알게 되고 태도가 달라지는 과정을 담담하게 묘사한 글이다.
그는 “대학을 졸업하고 막연하게 영화와 관련된 일을 하고 싶었다. 영화는 감독 말고도 다양한 사람들의 노력으로 만들어진다는 사실을 깨달았고, 작가가 되기로 마음먹었다. 손바닥문학상에 제출한 작품은 시나리오작가가 되기 위해 한예종에 입학하려고 쓴 글을 주변에서 추천해 출품하게 됐다”고 했다.
엄 작가는 픽션보다 논픽션을 즐겨 읽는 성향에서 엿볼 수 있듯, 현실에 기반을 둔 이야기에 관심이 많다. 그는 “현실에 뿌리가 있는 이야기를 작가가 찾아내고, 공부해서 상상력을 더할 수 있는 이야기를 쓰고 싶다”고 했다. 그래서인지 다음 작품도 언론사와 기자와 관련된 실제 이야기를 다룬다고 귀띔했다.
첫 작품으로 IMF 외환위기를 다룬 엄 작가는 실화를 소재로 할 때 더욱 신중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엄 작가는 “영화라는 매체의 파급력을 다시 생각해보게 됐다. 나름대로 진정성을 갖고 접근했지만 이 사건이 아직 많은 사람들에게 큰 상처로 남아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실화를 소재로 이야기를 구성하는 과정에 더욱 많은 걸 고려해야 한다고 느꼈다”고 했다. 일부에서 영화 내용의 사실관계를 놓고 논란이 된 것을 염두에 둔 발언으로 들렸다.
을 보면, 세상을 향한 작가의 시선이 따뜻하고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에 관심이 많다는 것이 느껴진다. IMF 구제금융 신청 이후 학습지 방문교사인 갑수의 아내가 사직서와 계약직 전환신청 서류를 받아드는 장면이나, 20년이 지나 갑수의 공장에서 갑수가 외국인 노동자에게 “빨리 일하라”고 채근하는 장면은 작가의 다양한 관심사가 잘 드러난다.
“영화를 본 관객이 1997년 자신들이 겪은 이야기를 많이 공유하는 걸 보면서 우리 사회가 지금껏 IMF의 맨얼굴을 보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한 편의 영화를 보고 많은 사람이 저마다의 아픔을 떠올리는 것 같았다. 독자도 IMF 때 겪었던 자신과 가족, 주변 사람들의 상처를 나누고 끌어안는 계기가 되면 좋겠다.” 독자에게 한마디 해달라는 요청에 대한 엄 작가의 대답이었다.
이재호 기자 ph@hani.co.kr전화신청▶ 1566-9595 (월납 가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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