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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리니 보이는 것들 그 인연 그 눈빛 그 순간

<여자전>의 김서령 작가, 세상을 품은 한 여자의 삶이 빚어낸 전시 ‘물목지전’
등록 2018-09-15 15:05 수정 2020-05-03 04:29
9월11일 김서령 작가가 서울 효자동 ‘갤러리우물’ 앞에서 웃고 있다.

9월11일 김서령 작가가 서울 효자동 ‘갤러리우물’ 앞에서 웃고 있다.

서울 종로구 효자동, 대로변에서 살짝 물러나 있는 좁은 골목 초입엔 이름마저 고즈넉한 ‘갤러리우물’이 있다. 9월11일 늦은 오후 우물 안으로 들어서니, 특유의 담박함에 세월의 깊이가 더해진 토기와 자기, 가구, 소품 180여 점이 세련된 솜씨로 놓여 있다. 자신이 “아끼고 매만져 살짝 피가 돌기도 했던 어여쁜 생명들”이 새 인연을 만났으면 하는, 참으로 애틋한 벗의 마음이 느껴지는 전시회다. ‘김서령의 다정하고 고요한 물건들의 목록 물목지전(物目誌展)’, 전시 기획자인 이세은씨가 지은 애칭은 ‘밑지도다전! 동나도다전!’이다.

수십 년 곁에 둔 사물을 버린다는 것
김서령 작가의 ‘물목지전’에 전시된 떡살들

김서령 작가의 ‘물목지전’에 전시된 떡살들

눈 밝은 독자들은 눈치챘겠지만, 운 좋은 물건들의 벗은 를 쓴 작가 겸 칼럼니스트 김서령(62)이다. 암 투병 중인 김 작가가 “애착을 버린다는 것은 추상적인데, 물건을 버리는 게 가장 구체적인 연습”이라며 시작한 일이다. 김 작가는 수술과 방사선 치료를 마치고 암이 전이된 뒤, 인생 고수들과 열심히 춤을 추면서 암과 함께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하고 있다. 김 작가의 마음을 아는 다정한 벗들은 9월6일 전시회 문이 열리기 무섭게 벗의 눈길과 체온이 담긴 ‘어여쁜 생명들’의 새 인연이 되어주었다. 전시는 9월16일까지 이어지지만 대부분의 물건에 이미 판매됐음을 알리는 빨간 스티커가 붙어 있다.

“한꺼번에 산 것 없고, 시간 나면 장한평 골동품 골목, 포항·안동·경주 시골 골동품 가게에 보러 다니고, 외국여행을 가도 맨날 벼룩시장에만 갔어요. 개수가 이렇게 많을 줄 몰랐어요. 페이스북에 올리니까 사람들이 첫날 다 사갔어요.”

김 작가는 경북 안동 김씨 3대 종가 중 하나인 의성 김씨 집성촌에서 나고 자랐다. 어려서부터 고풍스러운 물건들을 보고 자랐고, 그때부터 “예쁜 걸 밝혔다”고 했다. 물건을 모으기 시작한 건 대학생 무렵이다. 집에 있던 옛 물건들이 트럭을 몰고 동네를 다니는 고물장수에게 터무니없는 값에 팔려 사라지는 걸 본 뒤부터 어머니께 “팔지 말라”고 했단다.

일부는 타고난, 일부는 보고 배운 남다른 심미안으로 고르고 고른 물건들, 어떤 건 20년 30년씩 사랑하고 중히 여기다 “내가 쓰는 밥그릇 빼곤 다” 내려놓는 일이 쉽지는 않았다. 지난해 갑작스레 찾아온 암이 아니었다면 ‘물목지전’은 불가능했을지도 모른다. “거창하게는 아니지만, 애착을 버린다는 의미가 있어요. 나는 애착을 버릴 수 없을 줄 알았어요. 내놓고 나니까 애착이 버려지는 느낌이 있어요. 어차피 다 버려야 하잖아요. 물건이 문제겠어요, 다 헤어져야 하는데.”

주인이 떠난 뒤 버려진 물건들에 대한 안타까운 기억도 영향을 미쳤다. “저는 부자가 아니지만 주택이 많은 산 아래 부자 동네에 살아요. 주민이 돌아가시면 자녀들이 물건을 길가에 쌓아놓는데, 제가 정말 사고 싶었던 서양 앤티크 가구들까지 쓰레기가 되는 걸 서너 번 봤어요. 너무 사랑했던 제 물건들이 저 죽은 다음에 그런 꼴을 당하게 하고 싶지는 않았어요.”

‘하고잽이’가 얻은 병, 그리고 새 삶

인터뷰가 진행되는 동안 갤러리우물에는 다양한 연배의 지인들이 들고 났다. 김 작가는 그렁그렁한 눈으로 환히 웃으며 지인들을 꼬옥 안아주었다. 새 인연을 찾지 못하고 남은 빈티지 자수보를 예쁘게 포장해 건네주기도 했다. 그 따뜻한 마음 씀씀이에서 물건을 대할 때보다 깊은 사람에 대한 사랑이 배어나왔다.

사람이 너무 궁금하고 좋다는 김 작가는 1980년대 중반부터 등 여러 매체에 인터뷰 칼럼을 써온 탁월한 인터뷰어다. 등 책도 여럿 펴냈다. 2007년 초판을 발행했으나 2017년 개정판으로 돌풍을 일으킨 을 낸 뒤에는 독자들로부터 ‘서령체’라는 이름을 얻은 타고난 글쟁이이기도 하다. “한국 근현대사를 살아온 분들의 고통은 지금 사람이 상상할 수 없는 것인데, 할머니들은 그 과정에서도 굉장히 능동적이고 따뜻했어요. 인생이 굉장히 장엄하고, 인간이 60년 70년을 사는 게 엄청나다는 것, 인간은 어떤 고통도 이겨낼 수 있다는 것을 알았죠.”

김 작가에게선 등장인물의 면면이 겹친다. 장엄한 곡절을 겪었으나 능동적이며 총명하고 따뜻했던 주인공들이 김 작가의 족적과 말투와 태도에서도 스쳤다. 김 작가는 가장 안정적인 교사직을 버리고 미래가 불확실한 자유기고가가 됐다. 26년간의 결혼생활을 이혼으로 정리하며 홀로 삶을 일궈왔다. 원고지 한 장당 1만원이던 시절, 잡지와 사보에 한 달에 400장씩 원고를 써서 “진을 빼며” 생계를 꾸리기도 했다. 삶의 행로를 과감하게 틀 수 있었던 비결을 묻자 “내가 평균적인 사람보다 에너지가 많고 ‘하고잽이’”라는 답변이 돌아왔다.

“별거 아니야” 초연한 태도로 살아온 김 작가지만, 병을 얻고부터는 인생을 바라보는 관점이 완전히 달라졌다고 했다. 처음엔 “오늘을 잘 살고 사람들과 좋은 시간을 가지면 밀도 높은 시간을 만들 수 있고, 죽어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6개월 시한부 인생을 벌써 6년째 살고 있는 지인이 날린 묵직한 직구는 뜻밖의 ‘사건’이었다. “무의식에게 물어봤어?” 김 작가는 이제 “무의식은 죽음을 원치 않을 수 있고, (죽음을 받아들일 때까지) 아직 걸어가야 할 길이 좀 있다곤 생각”하지만 “병 때문에 억지로 놓아지는 게 아니라 내가 의도해서 놓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석 달 전 결혼한 아들 부부를 향해 ‘독립 선언’을 한 것도 “놓아버리는 것 중의 하나”다.

김 작가는 첫째인 아들을 “너무 사랑스러워서 야단칠 수 없었다”고 말할 만큼 사랑했다. “그 아이가 나한테 존재 자체로 준 게 많아서 충분했어요. 효도, 사랑을 증명하는 거 안 해도 돼요. 애들이 나한테 효도해야 한다고 생각하면 기다리게 되고 섭섭할 거잖아요. 아들 며느리한테 기쁜 마음으로 ‘엄마한테 아무것도 안 해도 돼, 전화도 하지 마. 엄마가 진짜 보고 싶을 때 와’ 그랬어요.”

그간 며느리와 갈등은 없었는지 물었더니 “고부 갈등이 있을 만큼 자주 만나질 않았다”고 했다. 잠시 생각에 잠기는가 싶더니, 며느리가 “너무 예뻤던” 얘기를 하며 금세 큰 눈에 눈물이 가득 찼다. “내가 아파서 방에 누워 있었어요. 며느리가 와서 나를 너무 따뜻한 눈으로 내려다보고 있더라고요. ‘너 어쩜 그렇게 따뜻해?’ 물었어요. 나를 걱정하는 애틋한 그 눈빛, 지금도 생각하면 너무 좋아서 울어요.”

인생의 정답은?
김 작가가 9월11일 갤러리우물에서 <한겨레21>과 인터뷰를 하고 있다.

김 작가가 9월11일 갤러리우물에서 <한겨레21>과 인터뷰를 하고 있다.

아들 부부는 주례 없는 결혼식을 했다. ‘신랑 어머니’가 낭독한 축하의 말이 명언이었다. 김 작가는 그때 네 가지 당부를 했다. 첫째, 좋은 부모가 되기 위해 노력해라. 가만히 있으면 좋은 부모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둘째, 부부가 같은 책을 읽어라. 사람이 읽은 책은 10년 20년 30년 내면에 쌓여가는데, 같은 책을 읽어야 보폭이 같아진다. 셋째, 매년 맞절을 해라. 설에 어른들에게만 절하지 말고 맞절을 하면 서로 존중하게 된다. 넷째, 미래를 위해 현재를 희생하지 마라. 돈 모으느라 너무 애쓰지 말란 얘기다.

스스로 좋은 부모인지 궁금해하자, “애들한테 엄마는 실패했으니 이렇게 말하는 거라고 얘기했다”며 배를 잡고 웃었다. 스물여섯에 결혼한 김 작가는 마흔다섯에 이혼했다. 결혼 실패는 “좋은 아버지가 될 사람을 파트너로 고르지 않고, 남자 애인을 구했기 때문”이며, “파트너를 고를 때 10명 중 제일 조건이 나쁜 사람을 선택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김 작가는 “내 정신의 건강도가 낮았기 때문에 그런 선택을 했다”는 자가 분석을 하면서도 주저함이 없었다.

“내가 겉으로는 명랑한데 속으로 어두운 그림자가 있었어요”로 시작하는 플래시백 역시 오랜 지인에게 얘기를 풀어놓듯 거침이 없었다. 어머니는 시골 종갓집에서 김 작가와 함께, 아버지는 도시에서 따로 살았다. 아버지는 다른 여자와 연애했다. 결혼 13년 만에 태어난 김 작가는 아버지에게 귀찮은 존재였다. 김서령이라는 이름도 아버지가 애인에게 지어줬던 이름과 같다. 철없을 때는 낭만적이라고 느꼈지만, 지금은 트라우마다. “아버지가 나를 차갑게 바라봤던 눈빛이 각인됐나봐요. 무의식 치료 하시는 분이 제 뼈를 만지는 순간 기억이 나더라고요. 아버지한테 기우뚱기우뚱 걸음마 해서 갔는데 아버지가 나를 싸늘하게 쳐다보고 안아주지 않았던 기억이.”

김 작가는 “300명인지 500명인지” 헷갈릴 정도로 많은 인생을 인터뷰했다. 인생 선배들에게 부지런히 인생의 정답을 물었다. “‘인생의 정답이 뭐예요?’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게 뭐예요?’ 같은 질문을 빼놓지 않았어요. 사람마다 조금씩 표현은 달랐지만 결론은 같았어요. 선한 인연을 만나는 것, 좋은 인연을 만드는 것, 그러려면 내가 선해야 한다는 거예요.”

행복한 순간을 살아라

이번엔 인터뷰어가 아닌 인터뷰이로, 인생 선배 김서령이 세상에 남기고 싶은 말을 물었다. “힘들 때 지칠 때 꺼내 볼 행복한 순간, ‘자원’이 많이 쌓인 사람이 좋은 삶을 사는 거래요. 햇볕이 너무 좋은데 바람이 불고 가로수 그림자가 흔들릴 때, 완전 천국 같은 순간이 있잖아요. 그걸 ‘파라다이스 빔’이라고 한대요. 파라다이스 빔이 쏟아지는 날, ‘너무 좋다’고 말하고 누군가 옆에 있으면 증폭되는 그 순간, 그런 순간이 많으면 자원이 많다는 거예요. 자원이 많은 삶을 살아라, 그 말을 남기고 싶네요.”

전정윤 기자 ggum@hani.co.kr
사진 박승화 기자 eyeshoo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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