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노동시간 기록 ‘절대 반지’ 되려면

주52시간제 실노동시간 기록이 가져온 변화들…

포괄임금제, 유연근로제 등 넘어야 할 산 많아
등록 2018-07-17 05:58 수정 2020-05-15 11:31
7월9일 광구 북구 오룡동의 삼성전자 공장에서 성수기를 맞아 직원들이 에어컨 조립에 땀을 흘리고 있다. 연합뉴스

7월9일 광구 북구 오룡동의 삼성전자 공장에서 성수기를 맞아 직원들이 에어컨 조립에 땀을 흘리고 있다. 연합뉴스

“52시간을 넘으면 휴게시간을 조정해서 맞추지 않나요?” “화장실 가는 시간도 기록하고, 커피 마시는 시간도 기록하고….” “79시간 근무, 휴게시간 27시간, 최종 근로 실적 52시간?”

7월1일 직원 300명 이상 사업장을 대상으로 ‘주52시간 근무제’가 시행된 지 2주가 지났다. 비교적 큰 혼란 없이 시행되고 있다는 평가가 따르지만 익명 직장인 커뮤니티 등에는 ‘무늬만 52시간’을 맞추려는 회사의 ‘꼼수’에 대한 폭로와 비판도 속속 올라오고 있다. 주52시간제 도입 취지는 52시간을 일하라는 게 아니다. 근로기준법에서 규정하는 법정 노동시간은 주40시간으로, 제도의 제 이름은 ‘주52시간 상한제’가 정확하다. 장시간 노동 관행을 개선해 생산성을 높이고, 노동자가 ‘저녁이 있는 삶’을 누리기 위한 첫 단추로 주52시간 근무제가 시행된 것이다.

그럼에도 일부 기업은 형식적으로 법을 준수하며 제도 취지를 무력화하려는 모습이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직장인들이 커뮤니티에서 회사의 꼼수를 폭로할 수 있는 배경에는 ‘노동시간 기록’이 자리잡고 있다. 그동안 관리되지 않던 노동시간이 주52시간 근무제에 따라 기록되고 관리되기 시작하며 노동자와 기업 모두 ‘실노동시간’에 주목하게 된 것이다.

노동시간 기록으로 노동자가 자신의 ‘진짜 노동시간’을 돌려받을 수 있을지, 기업이 주52시간 근무제의 취지를 지키며 생산성을 확보할 수 있을지에 제도의 정착 여부가 달렸다. 노동시간 기록이 일과 가정이 양립하는 사회로 가는 길에 나침반이 될 수 있을까.

‘주52시간제’ 취지 무색게 하는 꼼수들

‘근태관리 솔루션, 주52시간 근무제 시장 공략!’

근태관리 시스템 업체의 보도자료 제목이다. 학원, 헬스장 등 ‘칼퇴근’에 따라 수요가 느는 자기계발 업종만 ‘주52시간 시장’을 노리지 않는다. 주52시간 근무제 시행에 맞춰 근태관리 시스템을 생산하는 업체도 기지개를 켜고 있다. 그동안 출입통제 보안용으로 전자태그인식(RFID) 카드를 제한적으로 활용해왔던 기업들이 노동시간 기록이 필요하자 별도의 근태관리 시스템을 착착 도입하고 있기 때문이다. 7월1일을 전후로 해당 기업의 노동자들은 출퇴근 시간이나 휴게시간 등을 직접 입력하며 노동시간 데이터를 쌓기 시작했다. 일부 기업들은 노동시간이 지나거나, 자리를 일정 시간 이상 비웠을 경우 컴퓨터를 끄는 ‘PC오프제’도 도입했다.

이는 그동안 일부 업종에서 ‘의도적으로’ 노동시간을 관리하지 않던 관행에 비춰 눈에 띄는 변화다. 한 금융기관 계열사의 정보기술(IT) 부문 노동자였던 양아무개씨는 잦은 야근에 따른 면역력 저하로 2009년 폐 일부를 잘라내는 수술을 했다. 하지만 그가 산업재해를 인정받는 데는 7년 넘는 시간이 걸렸다. 야근을 입증할 객관적 자료가 없어 노동자 스스로 야근시간을 증명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는 오랜 소송 끝에 은폐될 뻔한 수천 시간의 노동시간을 돌려받았다. 이를 계기로 IT 산업노조(현 한국정보통신산업노동조합)는 노동자가 야근시간을 기록할 수 있는 모바일 애플리케이션을 만들기도 했다. 2017년 5월 고용노동부는 게임업체 넷마블에 대한 근로감독에서 건물 출입 기록 880만 건, 시스템 접속 기록, 컴퓨터 사용 기록 등을 분석하는 ‘디지털 포렌식’ 기법으로 2057명의 법정 노동시간 초과와 연장근로수당 44억원 체불을 적발했다. 그동안 진짜 노동시간은 노동자 스스로 증명하거나, 검찰과 경찰의 수사에 준하는 분석이 있어야 알 수 있었던 것이다. 이 현상은 근로기준법에 “근로계약에 관한 중요한 서류를 3년간 보존하여야 한다”라고만 돼 있어 기업에는 노동시간을 기록할 의무가 없는 현실에서 비롯됐다. 주요 유럽 국가들이 2~3년간 노동시간을 기록한 문서의 보관을 의무화하는 것과 대조적이다.

문재인 대통령 ‘노동시간 기록’ 공약

서울 서초구 양재동 현대자동차 본사 직원들이 점심을 먹으러 밖으로 나가고 있다. 연합뉴스

서울 서초구 양재동 현대자동차 본사 직원들이 점심을 먹으러 밖으로 나가고 있다. 연합뉴스

우리 사회도 이러한 시대적 요구를 마냥 외면할 수 없었다. 숨은 노동시간을 찾아달라는 노동자의 요구와 노동시간 단축이 공론화되며 지난해 대선에서 문재인 대통령은 출퇴근 시간 기록제를 공약으로 내세웠고, 20대 국회에서도 관련 법안이 발의됐다. 아직 법과 제도로 정착된 것은 아니지만 주52시간 근로제 시행에 따라 노동시간 기록이 민간에서 자발적으로 관리되기 시작한 것이다. 최민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상임활동가(직업환경의학과 전문의)는 “노동시간 기록은 사후 과로에 따른 산재 인정에 필요할 뿐만 아니라 장시간 노동을 막기 위해서도 필요하다. 노동자들이 자신의 노동시간을 확인하고 접근하는 것은 중요한 권리다”라고 말했다.

노동시간 기록은 과로와 ‘무제한 공짜 노동’의 주범인 포괄임금제 폐지의 디딤돌이 될 수도 있다. 포괄임금제는 실제 노동한 시간이 아니라 사전에 산정한 시간만큼만 회사가 연장·야간·휴일근로수당을 지급하는 제도다. 즉, 야근을 아무리 많이 하더라도 수당이 똑같기 때문에 근로기준법 위반일 경우가 대부분이다. 하지만 정보기술 기업처럼 촉박한 일정과 긴급한 상황에 대응해야 한다는 업종의 특수성을 내세워 포괄임금제를 적극 활용하는 기업이 대다수다. 2016년 12월 한국노동연구원이 100명 이상 사업장 206곳을 조사한 뒤 펴낸 ‘사무직 근로시간 실태와 포괄임금제 개선 방안’ 보고서를 보면, 포괄임금제를 적용받는 사무직 노동자 비율이 41.3%였다. 포괄임금제 채택 이유에 대해 기업들은 ‘노동시간 산정이 어려워서’(45.9%), ‘임금 계산의 편의 때문’(30.6%)이라고 답했다. 노동시간을 기업이 직접 체계적으로 관리하면 포괄임금제의 존립 기반은 허물어질 수밖에 없다. 주52시간 근무제 시행에 맞춰 네이버, 위메프 등 일부 기업은 포괄임금제를 폐지했지만 대다수 기업은 정부 눈치를 보며 우려를 표하고 있다. 노동계는 주52시간 근무제 시행과 함께 포괄임금제에 대한 정부의 ‘규제 가이드라인’을 기대했지만, 고용노동부는 ‘포괄임금제 지도 지침’ 발표를 8월로 늦춘 상태다.

물론 노동시간 기록이 노동시간 단축과 노동자의 저녁을 찾아주는 ‘절대 반지’는 아니다. 추가 고용 없이 현재의 생산성을 유지하려는 기업이 52시간 넘는 노동시간을 감추며 ‘공짜 노동’을 강요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제도 시행 2주 동안 기업이 52시간 넘는 노동시간을 휴게시간, 점심시간, 업무 외 활동 등 ‘비노동시간’(비근로시간)으로 대체해버리는 사례가 종종 드러나고 있다. 익명 직장인 커뮤니티에서 나오는 한 대기업 계열사 직원의 경우 회사에서 7월2일부터 8일까지 79시간을 체류한 것으로 기록됐는데, 회사는 이 중 일부를 비근로시간으로 분류해 52시간을 맞췄다. 근로기준법과 대법원 판례 등은 휴게시간을 “근로자가 사용자의 지휘·감독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이용이 보장된 시간”이라 정의하고, 대기시간은 “시간의 자유로운 이용이 어려운 경우 사용자의 지휘·감독 아래에 있는 대기시간으로 보아 근로시간으로 인정한다”고 규정한다. 이에 따라 주52시간 근무제를 앞두고 직장인 사이에서 논란이 됐던 담배를 피우고, 커피를 사오고, 화장실을 다녀오는 시간은 대기시간으로 노동시간에 포함된다.

커피 마시는 시간도 노동시간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대기업이 비노동시간을 직원 스스로 시스템에 입력하게 하는 상황에서 휴게시간이 자의적으로 남용될 우려가 있다. 조직 눈치를 봐야 하고 업무량이 많은 노동자의 경우 ‘자의 반 타의 반’으로 52시간 넘는 노동시간을 비노동시간으로 기록하고 공짜 노동을 해야 하는 상황으로 몰릴 수 있다. 중견기업에 다니는 30대 직장인 강아무개씨는 “30분 이상 자리를 비울 때마다 사유를 입력해야 하는데, 일단 자리를 비우기보다는 눈치만 보고 있다”고 말했다. 또 인력 충원 없이 과도한 업무량이 부과되거나, 불필요한 회의가 잦은 우리 직장문화가 개선되지 않으면, 주52시간을 맞추기 위해 퇴근 뒤 카페나 집에서 일해야 하는 ‘웃픈 풍경’이 계속 연출될 수 있다.

고용노동부도 권장하고 기업들이 적극 도입하는 유연근로시간제(유연근로제)도 노동시간 기록이 필수인데, 오히려 노동자의 노동시간 통제권을 무력화할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유연근로제는 노동시간을 탄력적으로 이용할 수 있는 제도인데 탄력적 근로시간제, 선택적 근로시간제, 사업장 밖 간주 근로시간제, 재량근로시간제, 보상휴가제 등 다섯 유형이 있다. 기업들이 주52시간에 맞춰 주로 도입하는 유형은 탄력적 근로시간제인데, 2주 또는 3개월 단위 안에서 일이 많이 몰리는 기간에 노동시간을 늘리고, 다른 기간에 시간을 줄여 법정 노동시간을 맞추는 제도다. 계절을 타는 냉난방장비 제조업체, 음식서비스업 등에서 활용하기에 적당하다고 고용노동부는 설명한다. 하지만 노동자가 업무 여건에 따라 특정 주에 60시간 넘는 장시간 노동을 할 수 있고, 시간에 맞춰 업무를 마치기 위해 노동강도 역시 커질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유연근로제 채택 여부가 모두 개별 노사의 합의에 따라 결정되는 것도 이런 우려를 더한다. 이는 경영계가 유연근로제 단위 기간을 6개월에서 1년 연장을 요구하지만 양대 노총은 유연근로제에 반대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김영선 노동시간센터 연구위원은 “노동자 개인의 선택이 적절히 보장받지 못하는 우리 사회에서 유연근로제가 자칫 노동자의 시간의 권리와 ‘워라밸’(일과 생활의 균형)을 무력화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빵 안 만드는 시간을 보장하는 이유

주52시간 근로제 시행을 앞두고 위반 기업에 6개월의 처벌 유예 방침을 밝힌 고용노동부는 현재 300명 이상 사업장의 실태조사를 하고 있다. 이를 통해 보완 대책을 마련하겠다는 계획이다. 김 연구위원은 “현재 주52시간 근로제는 노사가 구체적인 내용을 합의해야 하는 구조다. 하지만 과로가 유발하는 우리 사회의 병폐를 바로잡겠다는 큰 방향을 본다면 정부의 적절한 가이드라인은 계속 필요하다”고 말했다.

노동시간 단축은 당분간 우리 사회에 혼란과 진통을 가져올 수 있다. 하지만 이럴 때일수록 일본의 한 시골마을 빵집 주인 와타나베 이타루의 성찰을 되새겨볼 필요가 있다. “지금보다 빵을 더 잘 만들기 위해서는 빵을 안 만드는 시간이 필요하다.”(<시골빵집에서 자본론을 굽다>)

이승준 기자 gamja@hani.co.kr



독자  퍼스트  언론,  <한겨레21>  정기구독으로  응원하기!


전화신청▶ 1566-9595 (월납 가능)
인터넷신청▶ http://bit.ly/1HZ0DmD
카톡 선물하기▶ http://bit.ly/1UELpok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