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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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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윤상원 왜곡된 죽음을 바로잡아라

정부 공식 자료엔 화상·자상으로 남아 있는 윤상원 사인…

당시 동료인 안길정씨 총상 → 화상 → 자상 경위 논문으로 밝혀
등록 2018-05-23 00:59 수정 2020-05-02 19:28
벽체는 헐리고 쇠기둥만 남은 옛 전남도청 별관 뒤쪽에 선 안길정씨가 윤상원 열사의 죽음을 이야기 하고 있다. 5·18 당시의 헬기 총격 흔적이 남아 있다는 전일빌딩이 멀리 보인다. 김현대 선임기자

벽체는 헐리고 쇠기둥만 남은 옛 전남도청 별관 뒤쪽에 선 안길정씨가 윤상원 열사의 죽음을 이야기 하고 있다. 5·18 당시의 헬기 총격 흔적이 남아 있다는 전일빌딩이 멀리 보인다. 김현대 선임기자

1980년 5월27일, 그를 떠나보냈다. 그날 이후, 그날을 잊고 지냈다. 작은 기억조차 되살리고 싶지 않았다. “2015년 그를 다시 만나게 됐어요. 35년 만이었네요. 옛 전남도청 회의실에 안치돼 있는 주검 사진으로요. 정말로 그 모습 되살리고 싶지 않았는데….” 안길정(61)씨는 5·18 당시 시민군 대변인이던 윤상원 열사의 경비병이었다. 윤 열사는 의 주인공으로 5·18광주민주화운동의 상징적 인물. 5월17일 안씨를 광주에서 만나 ‘윤상원의 사인’(죽게 된 원인) 이야기를 나눴다. 윤 열사가 숨진 옛 전남도청 현장과 헬기 피격을 받았다는 광장 건너편 전일빌딩 10층 현장을 오가며 인터뷰했다.

정부 공식 자료에 없는 진짜 사인윤 열사 사인이 여태 공식적으로 규명되지 않았나요. 그럴 수가 있나요.

허허, 그러니까요. 2015년에 미국계 한국인 김대령이란 사람이 느닷없이 ‘윤상원 수류탄 자폭설’을 퍼뜨리는 거예요. “어떻게 이렇게까지 왜곡할 수 있나” 충격을 먹었지요. 김씨는 그동안 5·18의 진실을 왜곡하는 책을 5권이나 펴냈어요. 저는 이 사람을 ‘5·18음해전문가’라고 하는데, 그때부터 윤 열사 사인을 철저하게 규명하는 작업에 나서게 된 거죠. 그랬더니, 너무나 당연한 것도 당연하지 않게 기록돼 있는 게 곳곳에서 드러나는 거예요.

대표적으로 무엇이 잘못돼 있던가요.

정부 공식 자료 어디에도 ‘총상’이란 기록이 남아 있지 않아요. 윤 열사가 총을 맞아 쓰러진 현장을 목격한 증인이 여럿인데요, 그들의 증언이 정부 기록에 통째로 빠져 있는 거예요. 하다못해, “스스로 기름을 끼얹어 불에 타죽은 듯하다”는 보안사의 기록도 남아 있는데요, 군검찰 자료는 사인을 “화상과 자상(찔린 상처)”이라고 하면서 “어느 것이 죽음에 이르게 한 1차 원인인지는 불명”이라고 적었으나, 서울지검 자료는 사인을 ‘자상’이라고 하면서도 자상에 앞서 있었던 ‘화상이 직접 사인인 듯’하다고 모순되는 기록을 남기고 있어요. 당시 현장에 불려간 의사들이 정확한 사인을 밝히는 건 어려웠겠죠. 주검을 해부하는 검시가 아니라, 눈으로 시신을 살피는 검안이 전부였거든요. 하지만 ‘총상’의 진실이 단 한 줄도 남아 있지 않다는 걸, 어떻게 설명할 수 있나요? 이제라도 바로잡아야지요.

안씨는 2015년부터 1년여 동안 꼬박 그(윤 열사)와의 작업에 매달렸다. 이듬해 꼼꼼한 결과물을 란 작은 논문으로 내놓았다. 윤 열사의 직접 사인이 “자상이나 화상이 아니라, (계엄군에 의한) 총상”이란 증언과 기록을 충실하게 채집해 역사의 기록으로 남겼다. “세월이 더 지난다고 생각해보세요. 기존의 기록이 역사적 사실로 굳어버릴 수 있잖아요. 사람들이 왜 세상을 떠나게 됐는지, 왜곡된 사인을 바로잡는 것이 모든 진실 규명의 첫걸음이에요.” 안씨는 2014년 말부터 2년 동안 5·18기념재단의 전임연구원으로 일했고, 지난해엔 국방부의 5·18진상규명특별조사관으로 참여해 ‘헬기 사격’ 진상을 파헤치고 있다. 현장의 살아 있는 5·18 연구자다.

객관적으로 입증하기가 쉬운 일은 아니었을 텐데요.

다행히 5월27일 마지막 새벽을 함께했던 증인들이 살아 있잖아요. 그날 계엄군이 도청 건물로 진입할 때, 윤 열사는 회의실 2층 건물의 뒤쪽(조선대 쪽) 구석 창가를 지켰어요. 이양현·김영철이란 분과 셋이 나란히 총을 들고 마지막까지 버텼던 거죠. 이양현씨가 또렷하게 증언을 해주었습니다. “내 바로 옆에서 윤씨가 총 맞아 쓰러지는 것 봤다. ‘윤상원씨!’ 불러도 반응이 없었다. 그래서 쓰러진 윤씨를 회의실 널찍한 데로 끌고 와 이불을 펴고 눕혀놓았다. 숨이 끊어진 것인지는 확인 못했지만, 정신은 완전히 잃은 상태였다.”

최초 현장 사진이 말하는 진실
5월18일 광주 국립 5·18민주묘지에서 5·18민주화운동 38주년 기념식이 열렸다. 앞줄 맨 오른쪽이 계엄군의 학살을 전세계에 알린 독일 기자 위르겐 힌츠페터의 부인 에델트라우트 브람슈테트다. 김정효 한겨레 기자

5월18일 광주 국립 5·18민주묘지에서 5·18민주화운동 38주년 기념식이 열렸다. 앞줄 맨 오른쪽이 계엄군의 학살을 전세계에 알린 독일 기자 위르겐 힌츠페터의 부인 에델트라우트 브람슈테트다. 김정효 한겨레 기자

당시 윤 대변인의 경비병이었는데, 본인은 어디에 있었나요.

대변인실은 별관 건물 2층이었고, 저는 그곳을 줄곧 지키고 있었어요. 윤 열사는 밤사이 회의실 건물로 옮겨가 있었고요. 그래서 윤 열사의 마지막 현장은 목격하지 못했습니다. 저는 5월27일 체포돼 감옥 살다가 그해 크리스마스 때 석방됐어요. 소요 및 포고령 위반죄였죠.

김영철이란 분도 만났나요.

그분은 이미 돌아가셨어요. 그런데 그날 일을 본인의 육필 원고로 남겨놓으셨다는 말을 이양현씨한테서 들었어요. 유족을 찾아가 만났죠. 이양현씨 증언과 완벽하게 일치하는 기록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5·18기념재단 이름으로 소중한 유고집을 만들어 발간했어요. 이양현·김영철 두 분 말고도, 이태호·정태호·박내풍이란 분들이 윤 열사가 총에 맞아 쓰러지는 모습을 봤다는 증언을 이미 내놓았어요. 그분들의 증언은 민중항쟁 사료 전집에 잘 기록돼 있어요. 이들 말고도 윤 열사 사망 현장에 함께 있었던 이들이 20여 명이나 돼요.

외신기자들의 최초 현장 사진 자료도 확보했다면서요.

운 좋게 노먼 소프라는 당시 외신기자와 연락이 닿았어요. 5월27일 새벽 5시에 계엄군의 진압 작전이 완료됐는데, 두 시간 뒤인 아침 7시에 찍은 두 장의 사진이에요. 윤 열사 주검 모습을 처음으로 담은 사진인 거죠. 로버트 모이어란 기자한테도 사진을 한 장 받았어요. 같은 장면인데, 컬러사진이죠. 그때 외신기자들이 안전을 위해 함께 다니면서 현장 취재를 했다고 하더군요.

그 사진이 수류탄 자폭설이나 분신설을 객관적으로 배척하는 중요한 자료가 된다고요?

사진을 잘 보세요. 가만히 반듯하게 누워 있어요. 한쪽 눈은 뜨고 있어요. 분신을 했다면, 뜨거운 불이 몸에 닥치는데 이렇게 평온한 자세가 나올 수가 없지요. 창가에서 급격한 총상을 당한 뒤에, 그 자리로 옮겨놓았다는 현장 시민군들의 증언과 일치하는 모습이지요. 주위 사람들까지 다치게 하는 수류탄 자폭설은 더 터무니없지요. 그랬다면 시신이 갈가리 찢겼을 것이고, 파편 흔적이 주위에 있어야 하잖아요. 검게 화상은 입었지만 주검은 온전해요.

분신이나 자폭이 아니라면, 전신의 3분의 1이 화상 입은 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김영철씨의 기록에 관련 내용이 일부 담겨 있어요. “갑자기 사과탄 몇 개가 터졌고 우리 앞의 커튼에 불이 붙었다. 나중에 생각한 것이지만, 이 불붙은 커튼이 떨어져 윤상원군을 덮친….” 노먼 소프 기자와 김영철씨의 유고를 종합하면, 김씨가 사과탄으로 착각한 섬광탄이 터지면서 커튼에 불이 붙었고, 그 불이 이불로 감싸 회의실 가운데로 옮겨놓은 윤 열사의 주검으로 옮겨붙었던 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얼굴이 까맣게 탄 이유 가장 중요한 총상 이야기를 해볼까요. 총상이라면 검안으로도 드러날 텐데, 왜 아예 기록에서 빠졌을까요. 사진에서도 총상은 확인하기 어렵잖아요.

군과 검찰의 검안 기록을 종합하면, 먼저 화상이 있었고 치명상인 자상이 있었다는 걸로 정리됩니다. 하지만 총상을 입었다는 것은 여러 명의 현장 증언이 일치하는 명확한 사실이에요. 그러면, 왜 검사와 의사가 총상을 놓쳤을까 하는 의문이 생깁니다. 아마도 아랫배의 같은 부위에 총상과 자상을 입었기 때문 아닌가 싶습니다.

이미 치명적인 총상을 입었는데, 자상은 어떻게 생겼단 말인가요.

당시 사망자 중 총상과 자상을 동시에 입은 숫자가 9명에 이르러요. 회의실 안으로 진입한 계엄군이 우발적이든 의도적이든 총상 부위에 자상을 가했을 가능성을 생각할 수 있는 거죠. 같은 날 방위병 신아무개씨가 체포를 피하기 위해 주검들 사이에 죽은 척하고 누워 있다가 계엄군의 대검에 찔렸다는 증언도 있거든요. 하지만 이 모든 게 가설일 수밖에 없다는 한계가 있습니다.

윤 열사 주검의 모습을 사진에 담았던 노먼 소프 기자는 훗날 남긴 글에서 이렇게 썼다. “회상할 때마다 그 시민군(윤 열사)은 한쪽 눈을 뜨고 있었고, 이 장면이 내 기억 속에 끊임없이 출몰한다… 유독 그의 얼굴이 까맣게 타 있었다. 그가 군인들이 쏜 로켓 추진탄이나 스턴탄(섬광탄)에 맞아 탔다고 추측했다. 이 경우라야 수수께끼가 풀리는 것이다.” 안씨는 를 통해 ‘총상→자상→화상’이라는 사인의 선후 관계를 명확히 했다는 점을 자부한다. 그러면서 5·18 때 세상을 떠난 수많은 생명의 사인을 명확히 하는 ‘전면적인 진상 규명’의 필요성을 강조한다.

사인 규명이 왜 그리 중요한가요.

윤 열사는 5·18의 상징으로 여겨지는 시민군의 대표적 인물입니다. 틈만 나면 그런 사람의 사인을 두고 논란을 일으키는 거예요. 계엄군이 시민을 죽이지 않았다고 강변하고, 윤 열사의 죽음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면서 고귀한 죽음을 먹칠하려는 거죠. 그때마다 눈으로 주검을 살핀 데 불과한 불충분한 정부의 공식 기록이라는 게 근거가 되고 있는 거예요. 이제라도 5·18 사망자의 사인에 대한 사망자 전수조사가 이뤄져야 합니다. 현장을 직접 목격한 증언 등을 담은, 더 정확한 사망 원인을 정부 기록으로 남겨야 합니다.

5·18 사망자 사인 전수조사해야 실제로 왜곡된 사례를 더 들 수 있나요.

21일 도청 앞에서 계엄군 총에 맞아 신원 미상자로 병원에 실려온 유영선이란 사람이 있습니다. 이미 의식을 잃은 상태였죠. 유씨의 주검은 23일 학생 대표들이 인수해 도청 앞 상무관에 안치했어요. 그런데 이미 세상을 떠난 유씨가 23일 광주교도소 습격사건의 주범으로 정부 공식 문서에 기록돼 있는 거예요. 어떻게 터무니없는 조작이 있을 수 있었을까요? 당시 사망자 중 신원 미확인자 6명에 대해서도 관심을 기울였으면 합니다. 고아나 무연고자일 가능성이 높다보니, 아무래도 소홀했겠죠. 국가에서 더 무거운 책임을 느껴야죠.

광주=김현대 선임기자 koala5@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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