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식 신임 금융감독원장이 4월10일 한국금융투자 협회에서 열린 증권사 사장 간담회에 참석해 머리를 쓸어넘기고 있다. 한겨레 박종식 기자
김기식 금융감독원장의 ‘국회의원 시절 피감기관 지원 외유성 출장’ 논란은 가뜩이나 각박한 삶에 찌든 서민들의 화를 돋우었다. ‘금융개혁 적임자’라는 청와대의 대대적인 선전을 믿고 곧 서민을 위한 금융정책이 나올까 기대했더니, 취임하자마자 하루아침에 ‘내로남불’의 상징이 돼버렸다.
야당이 물고 늘어진 피감기관 지원 외유성 출장에 대해 그는 “국민의 눈높이에 맞지 않아 죄송스럽다”면서도 의정 활동에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았다고 강변했다. 시민단체 활동가 출신으로 공인의 염치를 누구보다 잘 알 것 같은 그에게 기대한 답변은 아니었다. 노회한 정치인과 다를 바 없는 그의 이중적 언행은 서민들의 마음에 깊은 상처를 남겼다.
그를 감싸고 돌았던 청와대 행태는 더욱 볼썽사나웠다. ‘특권과 반칙을 없애겠다’던 문재인 대통령의 말을 여전히 믿는 서민들은 청와대가 국회의원의 특권을 톡톡히 누린 김 원장을 비호한 것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 ‘국회 외유 관행은 야당이 더 많다’는 청와대 발표에서는 오만함까지 느껴진다는 의견도 있다. 현 정권 인사들이 야당보다 깨끗하기 때문에 서민 정서와 동떨어진 인사도 밀어붙이겠다는 메시지로 읽혔기 때문이다. 김 원장보다 ‘더 잘 땡겼던’ 야당 의원이 얼마나 많은지는 이번 사태의 본질이 아니었다. 서민들은 힘 있는 자들의 특권과 ‘갑질’을 없애겠다던 문 대통령의 의지를 청와대 인사에서 확인할 수 있기를 기대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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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원장을 둘러싼 논란의 핵심은 19대 국회의원 시절(더불어민주당 비례대표) 피감기관의 돈으로 갔다온 외유성 출장이었다. 2014년 3월 한국거래소(KRX)가 보내준 우즈베키스탄 출장과 2015년 5월 대외경제정책연구원(KIEP)이 비용을 부담한 미국·유럽 출장, 그리고 같은 기간 우리은행의 초청으로 간 중국·인도 출장 등 3건이다.
김 원장은 이 외유에 대해 “국민의 기대와 눈높이에 맞지 않다는 지적에 죄송스러운 마음이 크다”면서도 “출장 후 해당 기관과 관련된 공적인 업무를 처리하면서 어떠한 영향도 받지 않았고, 관련 기관에 오해를 살 만한 혜택을 준 사실도 없었다”고 해명했다. 도덕적 비난은 감수하겠지만 대가성은 전혀 없기 때문에 법적으로 책임질 문제가 아님을 강조한 것이다.
그는 미국·유럽 출장 6개월 전에 국회 정무위 예산 심사에서 KIEP 예산 삭감을 주도했다. 이 때문에 이 출장이 김 원장의 KIEP 예산 삭감 시도를 막기 위한 것이라는 의혹이 제기됐으나, 그는 출장을 다녀온 후에도 예산을 일부 삭감했다. 한국거래소와 우리은행 출장도 각각 자본시장법 개정을 위한 로비와 금감원 징계를 막으려는 로비용이라는 의혹이 제기됐지만, 로비가 통했다고 볼 수 있는 정황은 드러나지 않았다.
하지만 그가 공직자의 갑질을 처벌하는 ‘김영란법’(부정청탁금지법) 입법에 앞장섰던 것을 감안하면 피감기관 외유는 매우 부적절했다고 볼 수밖에 없다. 김영란법은 공직자뿐 아니라 사립학교와 언론 등 공공성 있는 직업을 가진 이들과 그 배우자의 금품·향응 수수를 대가성에 관계없이 처벌한다. 법 적용 대상자가 정부 추산으로만 400만 명인데, 이들과 접촉한 당사자도 부정청탁을 하거나 금품을 건네면 처벌받으므로 사실상 전 국민이 김영란법 적용 대상이 되는 셈이다. 이처럼 강력한 부패방지법을 주도했던 김 원장이 이 법의 취지에 어긋나는 행위를 한 것은 전형적인 ‘내로남불’로 보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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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식 사태’는 그를 금감원장으로 추천한 장하성 청와대 정책실장(왼쪽)과 인사검증 책임자인 조국 민정수석으로 확산될 수도 있다. 세 사람은 모두 참여연대 출신이다. 청와대사진기자단
김 원장이 외유성 출장을 다녀온 시점을 따져보면 상황은 더욱 고약하다. 김영란법은 2015년 3월3일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고 1년6개월의 유예기간을 거친 뒤 2016년 9월28일 시행됐다. 그런데 김 원장의 미국·유럽 외유성 출장과 중국·인도 출장은 이 유예기간에 이뤄진 것이다. 마치 김영란법이 시행되기 전에 한꺼번에 몰아서 갔다온 것처럼 보인다.
김 원장은 2014년 5월23일과 27일 열린 국회 정무위 법안심사소위에서 김영란법의 형사처벌 기준과 대상을 강화하는 데 앞장섰다. 속기록을 보면 국민권익위원회가 법무부 등의 의견을 반영해 직무관련성 여부를 처벌 기준으로 하는 내용의 수정안을 제출하자, 김 원장은 ‘김영란법의 애초 취지에서 크게 후퇴했다’며 당시 이성보 국민권익위원장을 강하게 질책했다. 김 원장의 활약으로 형사처벌 기준은 애초 원안대로 ‘직무관련성과 상관없이 100만원 이상이면 무조건 형사처벌’하는 것으로 확정됐다. 김 원장은 또 사립학교 교원과 재단 관계자 등도 이 법의 적용 대상에 포함해야 한다고 주장해 이를 관철했다.
법조계에서는 김 원장이 19대 국회 임기 종료 직전 정치후원금으로 유럽을 다녀온 것은 형사처벌이 가능할 수도 있다는 견해를 내놓는다. 그는 2016년 5월20일부터 27일까지 독일·네덜란드·스웨덴을 다녀왔는데, 이를 정치자금법 위반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그의 국회의원 임기 종료일은 29일이었다. 불과 임기 종료 사흘 전에 남은 정치후원금으로 외유를 다녀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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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자금은 정치활동을 위해 쓰는 경비 이외에 사적인 비용이나 부정한 용도로 지출할 수 없다. 이를 어기면 징역 2년 이하 또는 4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 법조계의 한 인사는 “의정활동을 위한 외유로 인정받으려면 외유 결과가 의정활동에 반영돼야 한다. 김 의원은 이미 20대 국회의원 당내 경선에서 떨어졌기 때문에 이 외유를 반영할 의정활동이 아예 불가능했다”고 말했다. 이와 관련해 서울남부지검은 자유한국당과 바른미래당이 김 원장을 고발한 사건과 관련해 4월13일 그가 소장으로 있었던 더미래연구소와 KIEP, 한국거래소, 우리은행을 압수수색했다.
김 원장 사태는 청와대 인사검증 시스템에 심각한 문제가 있음을 드러낸 것이라는 지적도 나온다. 조국 민정수석이 이끄는 청와대 인사검증팀이 김 원장의 피감기관 지원 외유성 출장 사실을 사전에 보고받고도 문제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조 민정수석 등이 김 원장의 개혁성을 지나치게 높이 평가한 나머지 도덕성 논란을 너무 가볍게 여긴 게 아니냐는 것이다. 금융 당국 고위 관계자는 “최흥식 전 금감원장이 하나은행 채용 비리 연루 의혹으로 낙마했기 때문에 후임인 김 원장의 인사검증은 더욱 철저히 했어야 했다”고 말했다.
야당은 조 수석과 장하성 청와대 정책실장, 그리고 김 원장이 모두 참여연대 출신인 점을 공격한다. 장 실장이 김 원장을 새 금감원장으로 강하게 밀었고, 외유 논란이 발생한 뒤 조 수석이 김 원장을 적극적으로 감쌌던 배경에 참여연대 출신이라는 인연이 있다는 지적이다. 유승민 바른미래당 공동대표는 “김 원장의 밑바닥이 드러나면 참여연대의 위선적 밑바닥이 드러나고, 참여연대가 무너지면 (참여연대가) 장악하고 있는 청와대가 무너지는 것을 문재인 정부가 두려워하고 있는 게 아닌가”라고 비난했다.
야당의 이런 공격은 문재인 정부로서는 뼈아픈 것일 수 있다. 문 대통령은 그의 저서 등에서 “참여정부의 유일한 실세는 인사시스템”이라는 노무현 전 대통령의 말을 청와대 인사의 모범으로 소개했다. 그만큼 문재인 정부도 시스템 인사를 중요시한다. 이번 금감원장 인사는 결과적으로 인사검증에 실패한 사례라고 볼 수 있다. 청와대 인사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다는 지적이 나와도 청와대로서는 할 말이 없는 상황이다.
청와대 안에서는 김 원장에 대한 공격을 ‘금융기득권 세력의 조직적 저항’으로 보는 의견도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김 원장이 ‘금융권 저승사자’ ‘모피아 저격수’라 불릴 정도로 개혁성이 강하기 때문에 그를 반대하는 세력이 야당의 공격을 지원한다는 시각이다. 문 대통령이 4월13일 김 원장 사태와 관련한 의견을 밝히면서 “근본적인 개혁이 필요한 분야는 과감한 외부 발탁으로 충격을 주어야 한다는 욕심이 생깁니다. 하지만 과감한 선택일수록 비판과 저항이 두렵습니다”라고 언급한 것은 이런 맥락에서 나왔다는 것이다.
청와대는 새 정부 출범 1년이 다 돼가도록 금융 분야에서 전혀 개혁이 이뤄지지 않는 상황을 못마땅하게 여겼다고 한다. 최종구 금융위원장과 최흥식 전 금감원장이 금융관료와 금융엘리트의 보수성을 제압하지 못하는 것을 불만스러워했다는 것이다.
이건희 삼성 회장 차명계좌 과징금 부과 결정을 둘러싼 해프닝이 이를 잘 보여준다. 지난해 국회 국정감사에서 이 문제가 처음 제기됐을 때 금융위는 과징금 부과에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다. 금융위는 국감 직후 여론의 비난이 빗발치자 법제처의 유권해석을 받아 결정하겠다고 밝혔다. 결국 법제처가 과징금을 부과해야 한다는 해석을 내리자 그제야 금융위는 태도를 바꿔 후속 조처를 마련했다.
이런 상황에서 청와대는 김 원장을 장하성 청와대 정책실장, 김상조 공정거래위원장과 함께 금융·재벌개혁을 강하게 추진할 인물로 발탁했다. 그러나 김 원장이 전혀 예상치 못한 도덕성 논란에 휘말려 개혁의 칼을 꺼내보지도 못하게 됐다. 이는 문재인 정부가 추진하려는 각종 개혁 작업에 적잖은 타격을 줄 것으로 보인다.
‘김기식 사태’는 전임 최흥식 금감원장의 ‘6개월 천하’와 함께 금감원 조직에 큰 상처를 입혔다. 금감원의 한 팀장급 간부는 “금융감독은 정책적 판단이 필요할 때가 많다. 그래서 원장의 메시지가 매우 중요하다. 하지만 도덕적 권위가 떨어진 원장의 메시지는 시장에서 잘 먹히지 않는다. 금융기관을 감독해야 하는 금감원이 제 기능을 못하게 되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금감원이 4천 개 금융기관을 제대로 감독하지 못하면 그에 따른 피해는 서민들이 져야 한다. ‘인사가 곧 만사’인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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