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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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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대의 법정’으로 오세요

베트남전쟁 한국군 민간인 학살 다루는 ‘시민평화법정’ 4월20일부터 열려
등록 2018-03-27 09:10 수정 2020-05-02 19:28
베트남전쟁 민간인 학살 시민평화법정을 소개하고, 이 법정에 참여를 호소하는 글을 세 차례 나눠 싣습니다. _편집자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의 변호사들이 지난해 6월 베트남 현지를 방문해 베트남전쟁 때 한국군에게 학살된 피해자 가족들과 면담하고 있다. 임재성 제공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의 변호사들이 지난해 6월 베트남 현지를 방문해 베트남전쟁 때 한국군에게 학살된 피해자 가족들과 면담하고 있다. 임재성 제공

2017년 6월 베트남 중부 다낭시에서 베트남전쟁 때 한국군에 희생된 민간인 학살 피해자들을 조사했다. 1968년 당시 8살이던 A는 자신과 가족들을 쏜 한국 군인의 모습을 이야기했다. 진술의 신빙성을 높여야 하기에 무례한 질문을 드려야 했다. “8살이었는데 어떻게 그렇게 정확히 기억할 수 있나요?” 그녀는 답했다. “그날 피 흘리며 엄마를 찾아 돌아다니면서 보았던 들판의 풀 모양까지 기억합니다.”

유감 표명하는 문재인 정부

A의 진술이 끝나고, 조사를 진행한 변호사들은 그녀에게 시민평화법정에 대해 설명했다. “실제 재판이 아니라 시민들이 만드는 재판입니다. 아무리 전쟁 중이었다 해도 군인들이 어린아이에게 총을 쏘고, 저항도 하지 않는 사람들을 죽이는 건 해서는 안 되는 범죄입니다. 그런데 여전히 한국에서는 이런 일이 없었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정부 역시 학살 사실도, 책임도 인정하지 않고 있습니다. 시민평화법정은 오늘 들었던 슬픈 이야기를 한국 사람들에게 들려주는 자리가 될 것입니다. 그 재판의 원고가 되어주실 수 있을까요?”

베트남전쟁 때 벌어진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 문제에 대해 ‘한국’의 위치는 중층적이다. 한국은 30만 명 넘는 군인을 베트남에 파병한 국가이기에 마땅히 파병된 군인들이 행한 불법행위에 책임을 져야 한다. 한국 정부는 한국전쟁 때 한국군에 의해 이루어진 민간인 학살에 대해 국가배상을 했다. 1980년 5월 광주에서 헬기사격이 있었는지 여부에 관해 40년 가까이 지난 바로 올해 특별법을 만들어 진상조사를 하고 있다. 폭력의 대상이 한국인이 아닌 베트남인이라고 해서 진실을 밝히고 배상해야 하는 책임을 외면할 수는 없다. 그것은 인권의 보편성을 논하기 전에, 비열한 일이다.

국가로 환원되지 않는 ‘한국’도 있다. 책임의 직접적 주체는 아니지만, 한국이라는 정치공동체에 살고 있다는 이유로 한국이 행한 참혹한 일에 마음이 무거운 사람들. ‘한·베 평화역사관 건립 기금’에 써달라며 7천만원을 기탁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문명금·김옥주 할머니. 베트남전쟁 민간인 학살 피해자들이 베트남에 있는 한국대사관 앞에 가서 사죄하고 배상하라고 시위를 한다면 기꺼이 돕겠다고 말한 이용수 할머니가 그런 사람들이다. 베트남전쟁 민간인 학살 문제가 국내에서 공론화된 2000년 이후 일군의 언론과 시민단체들이 꾸준히 베트남에 가서 피해자들을 만나고, 이들의 이야기를 세상에 전했으며, 한국 정부의 책임을 요구했다. 가해국 국민으로서 피해자들과 연대한 것이었다.

베트남 정부조차 피해자 외면

연대는 쉽지 않았다. 베트남전쟁 민간인 학살 피해자들은 베트남 사회 내에서도 배제돼 있었다. 베트남 안에서 베트남전쟁은 ‘승리한 전쟁’ ‘항미항전’으로 미화돼 있기에 군사적 승리에 기여한 군인만이 기념된다. 한국군에게 가족을 잃고, 다친 몸으로 살아가는 피해자에 대한 베트남 정부 차원의 지원은 전혀 없다. 시민사회가 없는 베트남 사회의 특성 때문에 피해자들을 지원하거나 조직할 현지 단체 역시 없다. 베트남 한국대사관 앞 ‘수요집회’가 없는 이유다. 흔히 “베트남이 사과를 원치 않는다”라는 오해는 이런 맥락에 놓여 있다. 베트남 정부조차 피해자를 외면하는 상황에서, 베트남 피해자들과 한국 시민사회의 연대는 물리적 거리와 언어적 장벽이라는 현실에서 더디고 어려울 수밖에 없다.

“원고를 하겠습니다.”

앞서 언급한 베트남 사회의 특성상 피해자가 한국에 가서, 한국 정부의 책임을 얘기한다는 것은 너무나 어려운 일이다. 연대는 옆에 서서 걷는 것인데, 우리 걸음이 너무 빨라 손을 잡아당기는 것은 아닌지 걱정됐다. 혹시나 시민평화법정의 의미가 잘못 전달됐을까 수차례 다시 통역을 부탁했다. 8살 소녀를 왜 쏘았는지, 왜 우리 가족을 죽여야 했는지 한국 군인에게 묻고 싶다며 흐느꼈던 A는 다시 말했다. “한국에 가겠습니다.”

2015년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소속 변호사들이 베트남전 민간인학살 연구를 시작하며 고민했던 시민평화법정은 A가 용기를 내준 뒤 본격적으로 준비됐다. 2017년 9월 내부 설명회를 거쳐 그해 11월 출범 기자회견을 했다. 이 문제를 한국 사회에 처음 알리고 피해자와의 연대를 이끌어온 구수정 박사가 상임이사로 있는 한베평화재단과 학살 지역에서 10여 년 의료봉사를 하는 베트남평화의료연대가 참여한 것은 물론, 참여연대·역사문제연구소 등 30여 사회단체가 ‘시민평화법정 준비위원회’라는 이름으로 법정을 준비하고 있다.

시민평화법정은 베트남전 민간인학살의 문제가 외교문제이기 이전에 인권문제라고 본다. 그동안 이 문제에 대한 한국 정부의 공식입장은 ‘외교관계 고려’이다. 국방부는 학살은 없었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지만, 전 대통령들은 “본의 아니게 베트남 국민에게 고통을 준 데 대해 미안하게 생각한다”(김대중 전 대통령)거나 “우리 국민은 마음의 빚이 있다”(노무현 전 대통령)의 수준에서 입장표명에 머물렀다. 사과의 본질인 사실인정이나 책임표명은 담겨있지 않았다. 문재인 정부의 입장은 얼마 전 확인되었다. 문재인 대통령은 3월23일 베트남을 방문해 베트남 주석궁에서 쩐 다이 꽝 국가주석과 정상회담에서 “우리 마음에 남아있는 양국 간의 불행한 역사에 대해 유감의 뜻”을 표명했다. ‘유감’이라는 표현의 무게감을 볼 때 과거 정부보다 진전된 태도를 나타낸 것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여전히 불행한 역사가 무엇인지, 유감에 따른 책임은 무엇인지는 흐릿하다. 인권을 침해당한 피해자들의 목소리보다는 베트남 정부의 입장이 우선시되고 있기 때문이다. 사과는 베트남정부에게도 해야 하지만, 피해자들에게 해야 한다. 법정은 우리가 피해자분들에게 직접 고개 숙이는 방식이다.

피해자와 가해국의 ‘연대의 법정’

묻고 싶다. 베트남 정부의 공식 입장 말고 피해자들의 목소리를 들어봤는지. 피해자 중심주의는 위안부 문제에만 적용되는 것인지. 사과는 국가가 아닌 피해자에게 해야 하는 것 아닌지. ‘전쟁’이라는 국가폭력의 피해자들은 또다시 ‘정치’와 ‘외교’라는 국가의 행위에서 배제되고 있다.

우리는 이 법정을 ‘연대의 법정’이라 이르고 싶다. 누군가를 처벌하려는 법정이 아닌, 사과와 책임을 손쉽게 국가에 떠넘기는 법정이 아닌, 피해자들의 용기와 가해국의 일원으로 살아가는 이들의 무거운 마음이 만나는 법정. 1968년 피해자들이 겪어야 했던 학살의 진실을 엄밀한 법적 기준으로 확인하는 장소임과 동시에, 2018년 오늘의 평화운동이 시작되는 장소를 만들고자 한다. 시민평화법정은 4월20일부터 22일까지 서울 마포구 성산동 복합문화공간 ‘문화비축기지’에서 열린다. 법정에 많은 분이 오시길 바란다. A의 옆에 서 있어주시길 바란다. 그것이 우리의 연대다.

임재성 변호사·시민평화법정 집행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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