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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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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년째 임금이 그대로”

2월1~18일 비수도권 지역 방송작가 192명 노동환경 실태조사 결과

3명 중 2명 월 200만원 미만, 70% 이상 투잡… 고질적 저임금 심각
등록 2018-02-27 08:12 수정 2020-05-02 19:28
지난해 11월21일 서울 마포구 상암동의 한 카페에서 방송작가지부 조합원들이 직접 제작한 큐카드(대본등이 적힌 종이)를 들고 사진을 찍었다. 한겨레 강재훈 선임기자

지난해 11월21일 서울 마포구 상암동의 한 카페에서 방송작가지부 조합원들이 직접 제작한 큐카드(대본등이 적힌 종이)를 들고 사진을 찍었다. 한겨레 강재훈 선임기자

강원도 춘천 지역 방송사에서 일하는 A작가는 ‘가을 야구’ 시즌이 시작되면 겁부터 덜컥 난다. 행여 경기가 연장전에 들어가기라도 하면 눈앞이 캄캄해진다. 야구 중계가 예상보다 길어져 자신이 만들어놓은 저녁 프로그램이 불방되기 때문이다. 방송이 “죽으면” 노동의 대가를 받지 못한다. 이유는 간단하다. 방송사가 작가를 노동자로 인정하지 않는 탓에 원고료가 ‘노동시간’이 아닌 ‘편성시간’에 따라 지급되기 때문이다.

A작가는 2007년부터 12년간 춘천에서 방송작가로 일했다. 지난해 말 그에게 큰 위기가 찾아왔다. 공영방송 정상화를 위한 방송사 파업이 시작됐기 때문이다. 벌이가 끊긴 A작가는 결국 쥐꼬리만 한 원고료를 아껴 모은 500만원 청약 적금을 깨야 했다. 그는 간신히 빚을 지지 않고 “제로 베이스(저축이 0원)”를 유지하고 있다. 이따금 “마이너스 인생이 아닌 게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가장 큰 문제, 적은 원고료’

A작가처럼 프로그램 불방 한 번에 생활고를 걱정해야 하는 지역 방송작가는 흔하다. 전국언론노조 방송작가지부는 2월2일부터 18일까지 비수도권 지역 방송작가들에게 ‘지역 방송작가 노동환경 실태조사’를 했다. 그 결과 지역 방송작가의 3분의 2가 월 200만원이 안 되는 임금을 받고, 85%가 생계 걱정을 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주업으로는 충분한 수입을 얻지 못하는 탓에 부업을 하는 이들도 전체의 70%를 넘었다.

방송작가지부는 지역 방송작가들이 이런 고질적 저임금 구조에서 노동을 강요당하는 이유로 △지역 방송사의 영세성 △단체행동이 어려운 프리랜서라는 고용조건 △여성이 대다수인 작가들의 노동을 부차적으로 대하는 성차별적 분위기 등이 결합된 결과라고 해석하고 있다. 이번 조사는 그동안 언론의 주목을 거의 받지 못했던 비수도권 지역 방송작가들의 노동환경 실태에 대한 사실상 첫 조사이다.

이번 조사 대상 지역은 서울과 경기도 등 수도권을 제외한 전 지역이었고, 응답한 방송작가는 총 192명이었다. 이들은 KBS·MBC 등 지상파 방송의 지역본부, SBS네트워크 등 민영방송, 교통방송, CBS 등이 운영하는 TV와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일하는 방송작가였다. 연령은 이제 막 방송일을 시작한 20대 저연차부터 40대 고연차를 망라했다.

응답자들의 지역·소속·연차 등은 다양했지만, 작가의 노동을 제대로 대접하지 않는 ‘저임금’ 구조 속에서 시름한다는 점은 일치했다. 응답자의 86.5%는 현재 자기가 겪는 가장 큰 문제로 ‘적은 원고료’(사실상 급여)를 꼽았다. 구체적으로 평균수입이 100만원이 안 된다고 답한 이들이 5.2%, 100만~150만원은 25%, 150만~200만원은 36.5%였다. 지역 방송작가 셋 가운데 둘(66.7%)은 월 200만원 이하의 원고료를 받는 것이다. 이는 2017년 8월 현재 전체 임금노동자 평균임금 242만원에 훨씬 못 미치는 수준이다. 200만~250만원을 버는 이들은 21.9%였고, 250만~300만원은 8.3%, 300만원 이상은 3.1%였다.

지역 방송작가들이 맞닥뜨린 현실은 자본력이 있는 대형 방송사가 밀집한 서울의 방송작가들이 받는 원고료 수준과 비교해보면 분명해진다. 서울 지역 응답자가 많았던 2016년 ‘방송작가 노동인권 실태조사’(방송작가지부 실시) 결과를 보면, 월평균 300만원 이상을 번다는 응답자가 지역 방송작가보다 3배 이상 많은 9.4%였다. 서울처럼 고임금을 받는 일부 ‘스타 작가’도 없는 지역에선, 모두가 ‘공평하게’ 저임금을 감내하고 있는 셈이다.

그 때문에 방송작가들은 생계유지에 심각한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지역 방송작가들은 “지역 작가로 살아가며 생계 걱정을 하십니까”라는 질문에 43.5%가 “매우 그렇다”고 답했고, 40.8%는 “대체로 그렇다”고 했다. 이들의 삶을 위협하는 요인은 많았다. 가장 큰 변수가 불규칙한 방송 일정이다. 올림픽, 프로야구 등 스포츠 중계나 급박한 뉴스 보도가 방송 시간대를 밀고 들어와 프로그램이 방송되지 못하면, 몇 시간을 일했는지와 관계없이 원고료는 못 받는다. 방송사들이 이들을 노동자로 인정하지 않아 송출시간을 기준으로 원고료를 주기 때문이다.

경력 쌓여도 임금 인상 미미

수입이 적다보니 지역 방송작가 대부분은 부업을 할 수밖에 없다. 대표적인 부업이 기업 홍보 영상이나 정치인 연설문 가필 등이다. 이번 설문에서도 ‘생계를 위해 투잡을 하십니까’라는 질문에 ‘늘 하고 있다’는 응답이 19.8%, ‘대체로 하고 있다’가 25.5%, ‘경험이 있다’가 34.4%를 차지했다. ‘거의 하지 않는다’는 17.7%에 지나지 않았다.

이들이 저임금에 시름할 수밖에 없는 근본 원인은, 근로기준법 보호를 받는 노동자성을 인정받지 못하는 데 있다. 그래서 발생하는 가장 큰 문제는 경력에 따른 임금 인상 체계가 없다는 점이다. A작가는 일을 시작한 첫해인 2007년, 10분짜리 TV 교양프로그램을 한 회 만들 때마다 15만원을 받았다. 11년이 지난 현재 똑같은 방송사에서 똑같은 일을 하는데, 회당 22만원을 받는다. 한 달 꼬박 일해 최대 8번 방송한다고 가정했을 때, 2007년에 120만원을 받았다면 지금은 176만원을 받는다. 11년 동안 이뤄진 물가인상률을 고려하면, 경력에 따른 원고료 인상이 거의 없었음을 알 수 있다. A작가는 “그나마 나는 나은 편이다. 강원 지역 다른 방송사에서 일하는 동료는 7년째 원고료가 똑같다”고 털어놨다. 대구교통방송에서 교양정보 프로그램을 만드는 권지현(40) 작가도 “2001년 방송작가로 일을 시작했는데, 20년 가까이 임금이 그대로다”라고 말했다.

이번 설문조사가 전하는 현실도 이와 같았다. ‘원고료 인상은 어떻게 이뤄집니까’라는 질문에 43.2%는 ‘인상한 적 없음’, 43.8%는 ‘구두 개별 인상’이라 답했다. ‘물가상승률 반영한 단체 인상’이라는 답변은 2.6%에 불과했다. 지역 방송작가들은 연차가 쌓여도 원고료가 거의 오르지 않거나, 오르더라도 특별한 기준 없이 제작비를 나누는 PD의 선의에 의존하는 경우가 대부분임을 알 수 있다.

그렇지만 자신의 ‘생사여탈권’을 쥔 정규직 PD 앞에서 원고료 인상을 요구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2003년부터 전남 지역에서 정보프로그램을 만들고 있는 B작가는 “PD들은 일을 시작할 때 계약서를 안 쓰고, 원고료도 전혀 언급하지 않는다. 그러니 언제, 얼마를 받게 될지 모른다. 돈을 받을 때에야 얼마를 받는지 알게 된다. (원고료를 정하고 일을 시작하지 않는 게) 일종의 불문율”이라고 말했다. “작가가 미리 원고료를 물어보면 ‘돈 밝히는 작가’로 공격을 많이 당하거든요. 평소 친분이 있거나 좋은 PD면 뒤로 살짝 물어보거나 사정을 봐 원고료를 좀 올려달라고 하죠.”

실제 설문 결과도 이런 증언을 뒷받침한다. ‘현재 어떤 방식의 계약을 맺고 일하십니까’라는 질문에 응답자 36.1%가 ‘노동조건을 전혀 모르는 상태로 일을 시작했다’고 답했다. ‘노동조건에 대해 구두로 대략적인 설명만 듣는다’는 이는 59.2%였다. 문화체육관광부가 2017년 12월 마련한 방송작가 표준집필계약서가 있지만, 현장에서 이를 쓰는 사람은 소수였다. 이번 조사에서도 ‘서면계약을 했다’고 응답한 이들은 4.7%에 불과했다.

‘여자가 그 돈 받으면 됐지’라는 시선

그렇다고 방송사가 정한 명확한 원고료 책정 기준이 공개돼 있는 것도 아니다. 설문 결과에서 방송사 원고료 기준을 ‘정확히 알고 있다’고 답한 비율은 3.1%에 불과했다. ‘기준이 있는 건 알지만 무슨 내용인지 모른다’는 응답자가 65.4%로 대다수를 차지했고, ‘기준이 없다’는 응답자도 27.7%에 이르렀다.

고질화된 저임금 구조에서 방송작가들은 모멸감과 상처를 감내하고 있다. B작가는 “상대적 박탈감이 진짜 심하다”고 털어놓았다. “비슷한 연차에 동갑인 PD가 있어요. 10년간 같이 일하면서 그 PD의 연봉은 5천만원, 8천만원 계속 오르는데 저는 제자리걸음이에요. 저는 방송작가 일에 매력을 느끼고, 내가 잘할 수 있는 일이라 좋아요. 그런데 학생들 직업체험 수업에 가서 내 일을 추천할 수 없는 게 자존심 상하더라고요.” 그러다보니 신입이 들어오지 않는다. B작가는 “막내작가는 종일 일해도 120만원 받는데, 최저임금 밑이라 새로 들어오는 사람이 없다”고 걱정했다.

저임금에 시름하는 방송작가 대부분이 여성이라는 점도 곱씹어볼 대목이다. 앞선 2016년 조사에선 응답자의 95%, 이번 조사에선 98%가 여성이었다. 2004년부터 경북 지역에서 시사 라디오프로그램을 만들어온 김은주(46·방송작가지부 부지부장) 작가는 “여성이 많은 분야는 직종 자체가 저평가된다. 방송사 직원 가운데 ‘여자가 그 정도 일하고 그 돈 받으면 됐지’라며 방송작가를 아르바이트처럼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우리는 전문성을 가지고 일한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권지현 작가도 “시사프로그램을 만들려면 지역 정책과 현안을 파악해야 한다. 자료 조사도 많이 필요하고, 어려운 사람 섭외도 해야 한다. 우리 일은 지식노동이자 감정노동이지만 전혀 전문성을 인정받지 못한다. 정당한 노동의 대가를 받지 못하다보니 자존감이 떨어진다”고 말했다.

그래서인지 권 작가는 자신이 ‘날품팔이’를 하고 있는 게 아닌가 생각할 때가 있다. “영화 (2014)를 보면 마트에서 일하는 주부사원들을 해고할 때, 회사 쪽 사람이 ‘여사님들 반찬값 벌러 나오는 거 아니냐’고 말해요. 아니 누가 회사에 일하러 나오지 취미로 나옵니까? 나도 직업인으로서 정체성을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어서 그 장면이 공감 가더라고요.”

결국, 방송작가는 방송사가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존재다. B작가는 방송사가 어려울 때 정규직과 비정규직이 고통 분담을 함께했는데 정작 돈을 벌자 차별 대우를 했다고 말했다. “깎을 때는 함께 깎았는데, 올려줄 때는 정직원은 원상복구, 방송작가는 절반만 복구하더라고요.” 김은주 작가가 만든 다큐멘터리는 2016년 한국방송대상 수상작으로 뽑혔지만, 그가 받은 것은 모조 트로피와 기념 수건 한 장뿐이었다. 김 작가는 “방송을 만들 때는 내 프로그램이라 생각하고 애정을 담아 만드는데, 만들고 나면 외부인이 돼 허탈하다”고 토로했다.

비수도권 지역 방송작가 노조가 떴다

이런 현실을 타파하기 위해 지역 방송작가들은 지역마다 노조를 만들려고 움직이고 있다. 그 첫걸음으로 2월24일 방송작가지부 영남지회가 출범했다. 부지회장을 맡은 권지현 작가는 “노조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간담회를 열었는데 의외로 많은 사람이 모여 놀랐다. 노동의 정당한 대가를 받도록 직업인으로서 우리 목소리를 내고 싶다”고 말했다.

변지민 기자 dr@hani.co.kr

2월 24일 방송작가지부 영남지회 출범


너무 오래 감내했다


2000년대 초반, 대구MBC를 중심으로 대구·경북권에서 방송작가노조를 만들자는 움직임이 있었다. ‘프리랜서’라는 허울 좋은 이름으로 저임금과 열악한 처우를 당연시하는 분위기를 바꿔보자는 결의였다. 하지만 결과는 실패였다. 노조에 대한 경험 부족과 프리랜서의 태생적 한계, 생계를 위협하는 내·외부적 압박이 원인이었다.
실패의 대가는 쓰라렸다. 노조 결성에 적극 개입했던 대구MBC 방송작가들은 상당수 해고됐다. 일부는 방송작가 일을 아예 그만뒀고, 일부는 다른 방송사로 옮겼지만 요주의 인물로 찍혀 사상교육을 받기도 했다.
그리고 10년이 훌쩍 넘게 지났다. 사정은 나아지지 않았다. 과거의 실패를 딛고, 해고 작가들의 후배들이 다시 뭉쳤다. 대구MBC 방송작가 16명 전원을 비롯해 대구·포항·안동의 지상파와 교통방송 등의 방송작가 45명이 2월24일 방송작가지부 영남지회를 출범시켰다. 해고된 바로 그 자리에서 지역 방송작가노조의 첫 깃발을 들어올렸다는 점이 의미가 크다. 보수의 심장인 대구·경북이라지만, 연대하고 뭉치는 건 잘한다. 과거 노조를 하다 잘려 방송사를 옮겨야 했던 작가들도 적극 돕고 있다. 실패의 경험이 지금은 도리어 큰 자산이 됐다.
다시 실패는 없다. 과거보다 훨씬 조직적으로 움직여 성공 가능성이 높다. 전국언론노조라는 큰 우산 안에 방송작가지부가 자리잡고, 그 연장선에서 영남지회가 생겼다. 다음으로는 방송사마다 5~20명씩 흩어져 있는 방송작가들이 분회를 만들 차례다. 노조에 대한 인식도 과거보다 긍정적으로 변해 젊은 작가들이 더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 개인적 피해를 감수하고서라도 노조를 만들어 불합리함을 바꿔야 한다는 생각도 강해졌다. PD 등 다른 직군 사람들의 격려도 힘이 되고 있다.
방송작가들은 지역 방송사가 재정적으로 어렵다는 점을 충분히 공감하고 있다. 제작비 면에서 서울권보다 운용 폭이 좁은 점도 이해한다. 회사 재정의 어려움을 이유로 원고료가 동결되거나 오히려 삭감되는 일이 있어도 ‘회사의 구성원’이라는 생각에서 감내해왔다. 그러나 이런 상황이 너무 오래 지속되도록 내버려둔 것은 문제다. ‘지역방송작가 노동환경 실태조사’ 결과에서도 나타나듯이 수도권에 비해 원고료가 턱없이 낮고 그마저도 10년째 동결 상태다. 연차별 원고료, 프로그램별 원고료의 기준조차 없는 경우가 많아 이 부분의 개선이 필요하다.
노조는 방송사별로 분회를 만들어 임금협상에 나설 것이다. 방송사에 최저임금을 지키도록 요구하고, 경력을 기준으로 명확한 원고료 기준을 만들도록 요구할 것이다. 정규직 전환처럼 큰 걸 원하는 게 아니다. 이제 남은 숙제는 방송작가노조의 첫 지회인 영남지회를 잘 꾸려서 참여 작가들이 단합해 잘 지켜가는 길이다. 얼마나 오래 지속되고 끈끈하게 유지되는지도 ‘방송작가노조’가 앞으로 나아갈 방향이기 때문이다.
염정열 대구MBC 작가(18년차·전국언론노조 방송작가지부 영남지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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