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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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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군 통역병, “그건 죄악이었다”

베트남전 민간인 학살 직후 300명 추가 학살 말린

청룡부대 제2대대 5중대 배속 남베트남군 팜반랑
등록 2018-02-22 01:39 수정 2020-05-03 04:28




한베평화재단· 공동기획_1968 꽝남! 꽝남!

① 1968 꽝남대학살 지도
② 무고한 죽음에 대한 예의
③ 살아남은 자의 물음


“지금 기억나는 한국말 있어요?”
‘방’이 느리게 입을 뗐다. “매복.” 그 말을 알아듣는 데 시간이 조금 걸렸다. “아, 매복! 그리고요?” “작전, 청룡부대, 몇 중대, 발사, 더 더.”
50년 세월이 흘러도 잊히지 않는 것들이 있다. “내가 그때 한국군 통역병이었어. 여기서 사람들 정말 많이 죽었지.” 가지런히 빗어 넘긴 백발에 노란 스웨터를 입은 방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지난해 12월31일, 베트남 중부 다낭공항에서 남쪽으로 45km 떨어진 꽝남성(도) 주이쑤옌현(군) 주이선사(읍·면)에 있는 그의 집을 찾았다.
방의 본명은 팜반랑(74). 1960년대 후반 베트남전쟁에 파병된 한국군에 배속된 남베트남군 통역병이었다. 청룡부대(제2해병여단) 제2대대 6중대(1967년 7월~1968년 6월)와 5중대(1968년 6월~1970년 2월)에서 통역병 생활을 했다. 한국군은 그의 이름 ‘랑’을 본떠 ‘방’이라는 한국 이름을 지어 불렀다.
“남베트남군에서 전투병을 하느니 통역병을 하는 게 낫겠다고 생각했어. 한국군이 마을 사람들을 잡으면 민간인이라고 알려주고, 누군가 다치면 후송 요청을 할 수 있었으니까. 일부러 우리 마을 주변에 주둔한 5중대에 지원했지.” 한국군 통역병 시절을 얘기하는 방의 눈엔 생기가 돌았다. ‘그날’도 그는 한국군과 함께 있었다.
베트남 꽝남성 주이쑤옌현 주이선사에서 2017년12월31일 만난 팜반랑. 그는 1960년대 후반 한국군에 배속된 남베트남군 통역병이었다.

베트남 꽝남성 주이쑤옌현 주이선사에서 2017년12월31일 만난 팜반랑. 그는 1960년대 후반 한국군에 배속된 남베트남군 통역병이었다.

1968년 10월, 꽝남성 주이쑤옌현 주이선사 2촌 마을(현재 짜쩌우촌)은 ‘전략촌’이었다. 전략촌은 ‘안전지역’이라고도 불렸다. 한국군은 베트콩(VC·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과 마을 주민을 분리하는 ‘평정작전’의 하나로, 주변 지역 민간인들을 남베트남군 통제구역인 전략촌으로 강제 이주시켰다. 마을엔 이주민이 사는 천막이 즐비했다. 그들은 밤에 전략촌에서 자고, 아침에는 자기 마을로 일하러 나갔다.

10월19일, 장마로 강이 범람했다. 마을 외곽 한국군 청룡부대 제2대대 5중대 1개 소대는 홍수로 기지 방어가 어려워지자 안전지역인 짜쩌우촌에 들어왔다. 한국군은 마을 어귀에 있는 절에 머물렀다. 10월22일 새벽 1시께, 북베트남 정규군이 절을 포격했다. 한국군 3명가량이 숨졌다. 전투와 추격전이 벌어졌다. 한국군이 마을의 집들과 천막을 불태웠다. 새벽 3~4시, 베트콩이 모두 마을을 빠져나갔다. 방은 현장을 둘러봤다. 외삼촌 집 마당에 외삼촌이 심한 부상을 입고 쓰러져 있었다. 한국군의 수류탄과 총을 맞은 모양이었다. 즉시 한국군에 헬기 후송을 요청했다. 외삼촌은 후송 중 끝내 숨졌다. “한국군은 외삼촌을 베트콩 유격대라고 생각해 총을 쐈던 것 같아.” 방이 담담한 어투로 말했다.

“다 총으로 쏴 죽였을 거야”
판짜(77·)는 2000년 12월 유가족들에게 돈을 걷어 주이선 위령비를 직접 만들었다. 그는 2017년 12월31일 주이선사 집에서 50년 전의 학살을 증언하며 자주 탄식을 내뱉었다.

판짜(77·)는 2000년 12월 유가족들에게 돈을 걷어 주이선 위령비를 직접 만들었다. 그는 2017년 12월31일 주이선사 집에서 50년 전의 학살을 증언하며 자주 탄식을 내뱉었다.

새벽 5시30분, 한국군이 방을 호출했다. 방의 사촌형네 방공호였다. 까맣게 연기가 피어올랐고 숨진 사람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마을 주민들이 대피한 방공호에 한국군이 M26 수류탄을 던진 흔적이었다. 한국군이 방에게 물었다.

“방, 이 사람들 민간인이야, 베트콩이야?”

“민간인들입니다. 남베트남 정권 사람들입니다.”

왜 민간인들을 죽였을까. 방은 “한국군 입장에선 베트콩이 마을을 다 빠져나갔는지 확신할 수 없어서 마을에 있던 사람들이 무서웠을 거야”라고 말했다. 하지만 그는 “그건 명백한 죄악”이라고 선을 그었다. “전투 상황에서 그런 일이 벌어졌다면 죄악이라고 단정하기 어려워. 근데 그땐 전투가 끝난 상황이었고, 베트콩은 한두 시간 전에 마을을 모두 떠났어. 전투가 끝나고 민간인을 그렇게 죽인 것은 명백한 죄악이야.” 이날 방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한국군을 비판한 말이었다.

아침 8시, 한국군이 전략촌으로 강제 이주당한 6개 사(주이선, 주이찐, 주이쭝, 주이쩌우, 주이호아, 디엔쭝) 주민 300명을 논두렁으로 끌고 왔다. 홍수로 잠긴 논에 주민들을 무릎 꿇렸다. 갓 출산한 여성도 예외는 아니었다. 무릎 꿇은 주민들 목까지 빗물이 찼다. 그들 앞에 기관총 4대가 설치됐다. 방이 논으로 찾아가 5중대 중대장에게 설명했다. “이 사람들은 베트콩 쪽 사람이 아니라, 남베트남 쪽 사람입니다.” 방의 말을 들은 중대장은 주민들을 풀어주라고 명령했다. “그때 당신이 ‘민간인들’이라고 설명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됐을까요?” 망설임 없는 답변이 돌아왔다. “다 총으로 쏴 죽였을 거야. 베트콩으로 간주하고 다 죽여버렸겠지.”

증거를 남겼다
판짜(77)는 2000년 12월 유가족들에게 돈을 걷어 주이선 위령비를 직접 만들었다. 그는 2017년 12월31일 주이선사 집에서 50년 전의 학살을 증언하며 자주 탄식을 내뱉었다.

판짜(77)는 2000년 12월 유가족들에게 돈을 걷어 주이선 위령비를 직접 만들었다. 그는 2017년 12월31일 주이선사 집에서 50년 전의 학살을 증언하며 자주 탄식을 내뱉었다.

방의 사촌형 판짜(77)는 주민 300명이 논두렁으로 끌려간 사이 집에 도착했다. 옆마을 1촌 보건소에서 부인을 간호하며 하룻밤을 보내고 집에 온 참이었다. 그의 눈앞에 참혹한 풍경이 펼쳐졌다. 집과 방공호는 무너져 있었다. 피범벅된 온몸이 너덜너덜해진 가족들은 방공호에 누워 있었다. 큰딸(6)은 집 근처 수풀에서 머리에 총을 맞고 쓰러져 있었다. 처 할머니, 장인, 장모, 처제, 처남, 딸 2명을 그날 잃었다. 보건소에 있는 부인과 돌이 지나지 않은 막내아들만 살아남았다. 방공호 안에서 아이 울음소리가 들렸다. 옆집 사는 한 살배기 아이였다. 수류탄 파편에 왼쪽 다리의 살점이 떨어져 뼈만 간신히 붙어 있었다. 판짜는 살아 있는 아이를 안고 보건소로 달려갔다.

지난해 12월31일, 주이선사 짜쩌우촌에 있는 판짜의 집 창문과 문에 뚫린 수십 개의 작은 구멍으로 빛이 새어 들어왔다. 50년 전 그날, 한국군의 총과 수류탄 파편 자국이었다. 판짜가 문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날 무너진 흙집을 시멘트집으로 다시 지으면서 그나마 형체가 남아 있던 문과 창문을 그대로 썼어. 학살의 증거를 남기려고 버리지 않은 거야.” 그는 학살 유가족들에게 돈을 걷었다. 그 돈으로 마을 입구 도로변에 그날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위령비를 세웠다. 홀로 한 달 동안 위령비를 지은 판짜가 말했다. “많은 사람, 특히 한국 사람들이 지나가다 볼 수 있도록 도로변에 세웠는데 지대가 낮아서 홍수가 나면 위령비가 물에 잠겨. 자꾸 망가지고 있어.” 검은 물이끼가 핀 주이선 위령비 앞에서 유가족들은 매해 음력 12월25일 합동제사를 지낸다.

주이선 위령비(2000년 12월 건립)에는 1968년 10월22일 학살로 민간인 20명이 희생되고 16명이 다쳤다고 적혀 있다. 한베평화재단이 입수한 주이쑤옌현 인민위원회 보고서(2006년)를 보면, 희생자 4명이 추가 집계됐음을 알 수 있다. 한베평화재단은 베트남전쟁 당시 한국군 전투부대(청룡·맹호·백마부대)가 주둔한 베트남 5개 성(꽝남성·꽝응아이성·빈딘성·카인호아성·푸옌성)에서 학살한 민간인 수를 9천 명 이상(2002년 집계)으로 추정한다. 최근 집계 중인 통계에 따르면, 1968년부터 꽝남성에서만 한국군이 민간인 4천 명 이상을 학살한 것으로 파악된다. 베트남 정부, 공공기관, 인민위원회, 군 작성 자료 등을 종합한 결과다.

미군이 보고한 학살
2017년 12월31일 주이선사 판짜의 집 거실. 판짜와 그의 부인 후인티탄(75)이 50년 전 학살을 증언하는 동안 옆에서 손녀 레티후인늬(8)가 과자를 먹고 있다. 등진 이는 취재진에게 베트남어를 통역한 쑤언.

2017년 12월31일 주이선사 판짜의 집 거실. 판짜와 그의 부인 후인티탄(75)이 50년 전 학살을 증언하는 동안 옆에서 손녀 레티후인늬(8)가 과자를 먹고 있다. 등진 이는 취재진에게 베트남어를 통역한 쑤언.

주이선 학살 내용으로 보이는 기록이 있다. 2000년 6월1일 비밀 해제된, 미 국립문서기록보관소의 주월미군사령부 감찰부 보고서다. 1970년 1월11일 로버트 쿡(Robert M. Cook) 대령(감찰감)은 사령부 참모장에게 ‘1968년 10월22일 한국 해병대의 잔학행위 의혹’ 보고서를 전달했다. 그 사건은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 의혹들 가운데, 미 국무부가 추가 정보를 요구한 세 사건 중 하나였다.

보고서는 ‘한국군의 잔학행위’에 대해 ‘1968년 10월22일 호안쩌우(Hoàn Châu·짜쩌우촌의 옛 지명, 보고서에 적힌 Hoang Chau는 오기로 보인다) 마을에 진지를 구축 중이던 청룡부대가 새벽 1시22분께 베트콩의 60mm 박격포와 소총 공격을 당하고, 마을 방향으로 대응사격을 한 뒤, 집집마다 수색하고 방공호에 수류탄을 던지고 나서, 마을 주민들을 아침 7시에 불러모았지만 결국 풀어줬다’고 설명한다. 당시 피해 현황은 ‘민간인 20명 사망, 16명 부상, 한국 해병대 3명 사망’ 등으로 집계했다. 주이선 짜쩌우촌에서 벌어진 학살과, 날짜·위치·피해 현황이 일치하고 그 시간대별 과정이 흡사하다.

1968년 10월2~31일 청룡부대 ‘승룡작전 3호’ 일지를 기록한 국방부 파월한국군전사(1973년 12월 발행) 제5권에도 비슷한 배경 설명이 나온다. ‘(홍수로) 5중대 기지 방호가 곤란하여 안전지역으로의 대피가 필요하였다’(10월19일·456쪽)는 내용과, ‘(5중대가 새로 구축한) 진지 남쪽으로부터 이상한 적의 기미가 엿보이더니 새벽 1시25분 60mm 박격포탄이 진내로 집중되기 시작’(10월22일·458쪽)했다는 내용이 그렇다. 다만 한국 기록에는 민간인 학살 내용은 없다.

향과 꽃이 사라졌다
50년 전 주이선 학살 현장에서 다리를 다쳐 울고 있었던 한 살배기 아이 응우옌티잔(51·왼쪽)과 당시 그를 병원으로 옮긴 판짜. 2017년 12월31일 주이선사 응우 옌티잔의 집 거실.

50년 전 주이선 학살 현장에서 다리를 다쳐 울고 있었던 한 살배기 아이 응우옌티잔(51·왼쪽)과 당시 그를 병원으로 옮긴 판짜. 2017년 12월31일 주이선사 응우 옌티잔의 집 거실.

그날 학살로 다리를 다쳐 방공호에서 울고 있던 한 살배기 아이는 올해 51살이 됐다. 지난해 12월31일 만난 응우옌티잔은 그날 일을 기억하지 못했다. 그날 학살로 잔의 할아버지는 숨졌고 어머니는 다쳤다. 잔의 왼쪽 종아리는 아직도 깊게 파여 있다. 잔은 “지나간 일은 지나간 일일 뿐, 과거에 미련을 두지 않는다”고 하면서도 “원한 같은 건 없다”고 말하는 순간 눈시울이 붉어졌다.

오후 4시 짜쩌우촌을 빠져나가며 주이선 위령비를 지나쳤다. 그날 오전 10시 한국인들이 참배하며 놓은 향과 꽃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못내 못마땅한 누군가 치운 모양이었다.

꽝남(베트남)= 김선식 기자 kss@hani.co.kr
사진 김진수 기자 js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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