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대법원이 팽개친 ‘사법부 독립’

법원행정처의 ‘원세훈 판결 동향’ 보고서에 드러난 청와대의 ‘원세훈 재판’ 개입

끝인 줄 알았던 국정원 댓글 사건, ‘대법원 양심’ 가늠할 척도로 되살아나
등록 2018-01-30 14:48 수정 2020-05-03 04:28
김명수 대법원장이 1월24일 서울 서초동 대법원에서 퇴근하고 있다. 김 대법원장은 이날 추가조사위의 조사 결과와 관련해 “사법부에 대한 국민의 신뢰를 무너뜨려 대법원장으로서 마음 깊이 사과한다”고 했다. 연합뉴스

김명수 대법원장이 1월24일 서울 서초동 대법원에서 퇴근하고 있다. 김 대법원장은 이날 추가조사위의 조사 결과와 관련해 “사법부에 대한 국민의 신뢰를 무너뜨려 대법원장으로서 마음 깊이 사과한다”고 했다. 연합뉴스

“상고심에서 깨어지지 않기를 기도합니다.”

2015년 2월9일, 원세훈 전 국가정보원장의 공직선거법 위반 혐의가 인정돼 항소심에서 징역 3년의 실형이 나오자 판사들의 익명 커뮤니티에 올라온 글이다. 기도는 대법원에 가닿지 않았다. 같은 해 7월16일 대법원 전원합의체(주심 민일영 대법관)는 항소심 판결을 파기하고 사건을 서울고등법원으로 돌려보냈다. 항소심에서 핵심 증거로 인정됐던 ‘425지논’ ‘시큐리티’ 파일의 증거능력이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425지논 파일에는 국정원이 트위터에서 시기별로 확산시켜야 할 이슈에 대한 지침이 담겨 있었다. 시큐리티 파일에는 국정원 직원의 트위터 계정이 정리되어 있었다. 둘 다 핵심 ‘물증’이었다.

상상 뛰어넘는 대법원 문건

대법원 판결에 대한 비판은 많았지만, 이 판결의 이면에 공개되어선 안 될 뒷이야기가 숨어 있다고 상상하는 이는 적었다. 보수 성향 대법관의 비율이 높고, 그들이 이 사건에 완고한 판단을 내렸을 것이라고 짐작할 뿐이었다. 판결 과정에 권력이 개입했다 생각하는 이들은 드물었다. 이는 상상력 부족 탓이 아니다. 한국 최고법원에 대한 최소한의 신뢰와 존중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1월22일 ‘대법원 추가조사위원회’(추가조사위)가 밝힌 조사 결과 보고서에는 한국 사회가 미처 생각지 못한 ‘영역’을 포괄하는 내용이 있었다. ‘원세훈 전 국정원장 판결 선고 관련 각계 동향’이라는 제목이 붙은 보고서다. 이 보고서는 원 전 원장이 항소심에서 공직선거법 위반 등의 혐의로 징역형을 받고 법정 구속된 다음날인 2015년 2월10일 작성됐다. 보고서만 보면 대법원 행정처는 스스로 ‘BH’라고 표기한 청와대와 한마음으로 움직였다. “‘(항소심 선고 전)1심과 달리 결과 예측이 어려우며, 행정처도 불안해하고 있는 입장임’을 알림” “법원행정처 → (청와대) 법무비서관을 통하여 사법부의 진의가 곡해되지 않도록 상세히 입장을 설명” “기록 접수 전이라도 특히 법률상 오류 여부 면밀히 검토” 주어와 목적어만 바꾸면 청와대 비서실에서 작성했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내용이 노골적이다.

주목할 대목은 또 있다. 보고서에는 “특히 우병우 민정수석 → 사법부에 대한 큰 불만을 표시하면서, 향후 결론에 재고의 여지가 있는 경우에는 상고심 절차를 조속히 진행하고 전원합의체에 회부해줄 것을 희망”했다고 적혀 있다. 짧게 적힌 우 전 수석의 ‘희망’에는 수많은 의미가 담겨 있다.

대법원 재판의 기본은 전원합의체이다. 법원조직법 제7조(심판권의 행사)를 보면 “대법원의 심판권은 대법관 전원의 3분의 2 이상의 합의체에서 행사하며, 대법원장이 재판장이 된다”고 명시하고 있다. 다만 전원합의체 판결이 나오는 것은 드문 일이다. 법원이 한 해 다루는 사건 수가 3만~4만 건이기 때문에 대법원장을 포함해 13명의 대법관(법원 행정처장 제외)이 모두 참여하는 전원합의체 판결은 한 해 20여 건밖에 되지 않는다. 대부분의 사건은 대법관 4명으로 구성되는 소부에서 결정된다. 하지만 국정원 댓글 사건은 사회적 파장이 큰 사건이라 소부에서 판결할 가능성은 크지 않았다. 당시 많은 언론이 대법원이 사건을 전원합의체에 회부할 것으로 예상했다. 20년 넘게 검사 생활을 한 우 전 수석이 이 사실을 모를 리 없다.

청와대-대법원의 교감

이 때문에 눈길을 끄는 것은 ‘그럼에도’ 우 전 수석이 굳이 대법원에 이 사건을 전원합의체에 회부해줄 것을 희망했다는 점이다. 그만큼 소부에서 사건이 결정될 작은 가능성조차 차단하고 싶었던 청와대의 속내가 드러나 있다. 소부와 전원합의체 판결의 차이점은 대법원장의 관여 여부다. 소부와 달리 전원합의체의 경우 당시 양승태 대법원장이 자동으로 재판장이 된다. 심리 과정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공식적인 권한을 갖는 것이다.

양 대법원장은 박근혜 정부 내내 청와대와 깊은 교감을 하고 있다는 의혹이 끊이지 않았고, 당시 대법원은 상고법원 추진에 사활을 걸고 있었다. 그래서 정부·여당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또 전원합의체에는 13명의 대법관이 참여하는 만큼 일부 진보·중도 대법관의 ‘일탈’을 제어하고 판결 결과를 예측하는 것도 쉬워진다. 청와대로서는 소부보다 전원합의체를 선호하는 것이 당연했다.

더 흥미로운 대목은 우 전 수석이 붙인 “결론에 재고의 여지가 있는 경우”라는 어구다. 4명의 대법관이 참여하는 소부 결정과 13명이 참여하는 전원합의체 결정이 가지는 무게는 다를 수밖에 없다. 항소심 결론을 ‘재고’한다는 것은 결국 원 전 원장의 공직선거법 유죄를 무효로 돌리는 것을 뜻한다. 우 전 수석의 말을 문맥 그대로 해석하면 유죄를 그대로 유지할 경우 소부에서 판단해도 되지만, 파기를 할 경우 전원합의체에서 해달라는 의미가 된다. 청와대가 원치 않는 결과는 무게감을 줄이고, 원하는 결과는 무게감 있게 결정해달라는 취지로 보인다.

판결 시점에 대해서도 마찬가지 해석이 가능하다. 재고가 가능할 경우 “상고심 절차를 조속히 진행”해달라는 것은 당시 박근혜 대통령이 국정원의 여론 조작에 힘입어 당선됐다는 항소심의 ‘잠정 결론’을 대법원이 가능한 한 빠르게 뒤집어달라는 뜻으로 해석된다. 실제 이 사건은 항소심이 끝나고 5개월쯤 지난 2015년 7월16일 대법원에서 파기환송됐다. 민감한 사건은 대법원에서 해를 넘기는 사례가 흔한 상황에서 상대적으로 빠른 결론이 나온 셈이다.

손뼉은 마주쳐야 소리가 난다. 이 불운한 보고서의 한 축에는 사법부의 독립을 뿌리째 뽑아버린 대법원이 있다. 그 맞은편에는 국정원 댓글 사건에서 벗어나고 싶어 했던 청와대가 있다. 그 의지는 보고서에 이 사건을 ‘BH의 최대 관심 현안’이라고 적은 데에서 잘 드러난다.

실제 박근혜 대통령 시절 청와대와 정부는 국정원 댓글 사건을 무마하기 위해 갖은 무리를 했다. 원 전 원장에게 공직선거법 위반 혐의를 적용해 기소한 채동욱 당시 검찰총장은 국정원과 청와대의 뒷조사 대상이 됐다. 그는 결국 2013년 9월 혼외자 의혹으로 옷을 벗어야 했다. 국정원 댓글 사건을 수사하던 검찰 수사팀의 윤석열 팀장(현 서울중앙지검장)과 박형철 부팀장(현 청와대 반부패비서관)은 좌천됐다. 수사 대상이던 국정원은 압수수색에 대비해 ‘가짜 사무실’을 마련해놓고 그곳이 심리전단 사무실이라고 검찰을 속였다. 국정원 파견 검사들은 검찰 조사를 받는 국정원 직원들에게 거짓 진술을 훈련시켰다.

되살아난 국정원 댓글 사건
검찰은 국정원 직원 김하영씨를 조만간 위증 혐의로 기소할 예정이다. 국정원 댓글 사건이 처음 불거진 2012년 12월부터 시작된 수사가 만 5년이 넘은 지금에야 마무리 수순을 밟고 있다. 김봉규 선임기자

검찰은 국정원 직원 김하영씨를 조만간 위증 혐의로 기소할 예정이다. 국정원 댓글 사건이 처음 불거진 2012년 12월부터 시작된 수사가 만 5년이 넘은 지금에야 마무리 수순을 밟고 있다. 김봉규 선임기자

이 굴곡 많았던 국정원 댓글 사건 수사는 곧 마무리될 예정이다. 검찰은 조만간 국정원 직원 김하영씨를 위증 혐의로 기소하고 사건을 마무리할 계획이다. 김씨가 자신의 서울 역삼동 오피스텔에서 댓글 작업을 하고 있는 것이 발각된 2012년 12월11일부터 시작된 수사가 만 5년 넘게 갖은 풍파를 겪은 뒤 대단원의 막을 내리는 셈이다.

하지만 끝인 줄 알았던 이 사건의 불씨가 추가조사위의 최근 발표로 다시 되살아났다. 마치 검찰이 기소하고 법원이 재판하는 형사소송 절차처럼 이제 불똥은 대법원으로 넘어갔다.

추가조사위 발표 중에는 법관 사찰과 성향 분석 등 충격적인 내용이 여럿 포함되어 있었지만, 대법원은 무엇보다 ‘원세훈 전 국정원장 판결 선고 관련 각계 동향’ 보고서에 민감하게 반응했다. 김명수 대법원장을 제외한 13명의 대법관은 1월23일 “일부 언론은 대법원이 외부 기관 요구대로 특정 사건을 전원합의체로 회부해 원심을 파기함으로써 외부 기관이 대법원의 재판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대법원이 이에 영향을 받았다는 취지로 보도했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라는 입장을 밝혔다. 대법관들이 집단적으로 재판 외 사안에 입장을 밝히는 것은 이례적인 일이다. 하지만 권위를 가져야 할 대법관들의 주장에 좀처럼 힘이 실리지 않고 있다. 보고서 내용이 공개된 이상 한국 최고법원에 지금까지와 같은 권위를 부여하기는 힘들어졌다. 보고서에 담긴 한줄 한줄이 법원의 신뢰를 깎아내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중에서도 백미는 대법원이 청와대와 유일하게 입장을 달리하는 대목이다. 보고서에는 “(국정원 댓글 사건) 상고심 판단이 남아 있고 BH의 국정 장악력이 떨어지고 있는 국면 → 발상을 전환하면 이제 대법원이 이니셔티브를 쥘 수도 있음” “상고심 처리를 앞두고 있는 기간 동안 상고법원과 관련한 중요 고비를 넘길 수 있도록 추진을 모색하는 방안 검토 가능”이라는 내용이 담겨 있다. 중요 사건 판결을 지렛대로 대법원이 원하는 정책을 통과시키려는 놀라운 ‘발상의 전환’이다. 이 구절을 보면, 대법원이 자신의 이해관계에 따라 판결을 좌지우지할 수 있다는 ‘불온한’ 상상을 하게 된다.

진실이 무엇이든 이제 그 실체를 명확하게 밝히지 않고는 사법부에 대한 신뢰를 회복하기 어려운 지경이 됐다. ‘판사 블랙리스트’ 의혹 사건은 이미 지난해 6월 검찰에 접수됐고, 최근 서울중앙지검 공공형사수사부(부장 김성훈)에 재배당됐다. 추가조사위 조사 결과가 발표된 이후인 1월26일, 시민단체인 투기자본감시센터는 이번에 드러난 청와대의 대법원 개입 의혹 사건과 관련해 양승태 전 대법원장과 우병우 전 민정수석 등을 검찰에 고발했다. 이 사건 역시 판사 블랙리스트 의혹 사건에서 파생된 것이기 때문에 같은 부서에 배당될 가능성이 크다.

바닥에 떨어진 사법부 신뢰

사건을 맡을 것으로 보이는 공공형사수사부는 최근까지 국정원 댓글 사건을 수사하고 원 전 원장 재판의 공소 유지를 담당해왔던 부서다. 검찰에서 누구보다 이 사건을 잘 아는 조직이다. 이번 사건이 본격적인 수사로 이어진다면 대법원 압수수색이라는 헌정 사상 초유의 사태가 벌어질 수도 있다. 하지만 김명수 대법원장은 1월24일 “법원 스스로의 힘으로 이번 사안이 여기까지 밝혀졌듯이 앞으로도 그럴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 저를 믿고 조금만 더 기다려주시기 바란다”고 밝혔다. 국민에게 마지막 신뢰를 보여달라는 당부이자 법원이 검찰 수사를 받을 수 없다는 바람을 완곡하게 표현한 것으로 해석된다.

진실이 어떤 방식으로 밝혀질지는 아직 모른다. 하지만 지난 5년간 검찰 수사의 공정성을 재는 잣대가 됐던 국정원 댓글 사건이 이제 대법원의 양심을 저울질하는 척도가 된 것만큼은 분명하다.

정환봉 기자 bonge@hani.co.kr



독자  퍼스트  언론,    정기구독으로  응원하기!


전화신청▶ 02-2013-1300 (월납 가능)
인터넷신청▶ http://bit.ly/1HZ0DmD
카톡 선물하기▶ http://bit.ly/1UELpok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