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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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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법부가 닦아 준 ‘삼성 직업병’ 희생자 눈물

삼성전자 직업병 관련 산재 판결 집중 분석해보니…

노동자 입증 책임 완화하며 산재 인정 범위 차츰 확장
등록 2018-01-05 05:07 수정 2020-05-03 04:28
삼성전자 반도체 노동자였던 고 황유미씨의 아버지 황상기씨는 2010년 딸 유미씨의 백혈병을 산업재해로 인정해달라는 소송을 제기하며 삼성전자 반도체 직업병을 처음 세상에 알렸다. 법원은 2011년 황유미씨의 백혈병을 처음 산재로 인정한 뒤 이후 불거진 삼성 반도체 노동자의 뇌종양, 삼성 반도체 협력업체 관리자의 백혈병 등을 업무상 재해라고 보는 판례를 쌓아가고 있다. 특히 대법원은 2017년 8월29일 삼성전자 LCD 노동자 이희진(34)씨에게 나타난 희귀병인 다발성경화증을 처음 산재로 인정하는 판결을 내놨다. 대법원 판결은 이후 하급 법원이 내놓는 판단을 구속하는 ‘판례’가 되기 때문에 삼성전자 노동자에 대한 대법원의 산재 인정 판결은 하위 법원의 판결과 비교할 수 없는 중요성을 갖는다. 은 제1192호에서 이 판결을 2017년 ‘올해의 판결’로 꼽았다.
그렇다면 한국 사법부는 그동안 삼성전자 직업병 문제에 어떤 판단을 내려왔을까. 산업재해보상보험제도의 의미를 새삼 돌아보게 한 삼성전자 관련 산재 판결을 집중 분석해봤다. _편집자
삼성전자 LCD 노동자 이희진씨가 2017년 12월14일 ‘산업재해 인정’을 뜻하는 근로복지공단 요양보험 급여 결정 통지서를 들고 있다. 대법원은 2017년 8월 29일 이희진씨에게 나타난 희귀병인 다발성경화증을 처음 산재로 인정하는 판결을 내놨다. 김진수 기자

삼성전자 LCD 노동자 이희진씨가 2017년 12월14일 ‘산업재해 인정’을 뜻하는 근로복지공단 요양보험 급여 결정 통지서를 들고 있다. 대법원은 2017년 8월 29일 이희진씨에게 나타난 희귀병인 다발성경화증을 처음 산재로 인정하는 판결을 내놨다. 김진수 기자

삼성전자 반도체·엘시디(LCD) 등과 관련된 직업병을 산업재해로 인정해달라며 법원에 소송을 제기한 노동자는 2017년 12월 현재 27명에 이른다. ‘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 지킴이, 반올림’(이하 반올림)이 집계한 수치다. 서울행정법원 14부(재판장 진창수)는 2011년 6월 이 가운데 이아무개(사망 당시 30살)·황유미(사망 당시 22살)씨의 업무상 재해를 처음으로 인정했다. 그 뒤 법원은 김경미(사망 당시 29살)씨의 백혈병을 산재로 인정한 2013년 1심 판결에서 노동자의 산재 증명 책임을 완화하는 등 산재 인정의 폭을 확장해왔다.

대법원은 8월29일 삼성전자 노동자의 희귀병을 산재로 인정한 첫 판례를 내놓았다.

현재까지 소송을 제기한 노동자 27명 가운데 1심 재판이 진행 중인 9명을 제외하고 산재가 인정된 사람은 모두 12명이다. 고용 형태별로 보면, 정규직이 9명, 삼성반도체 사내·외 협력업체 노동자가 3명이었다. 병명 가운데는 백혈병이 4명으로 가장 많고, 다발성경화증 3명, 난소암·뇌종양·유방암·재생불량성빈혈·다발성신경병증 등이 각각 1명이었다.

삼성전자 직업병과 관련한 법원의 판단 가운데 가장 눈에 띄는 것이, 첨단산업 관련 희귀병의 산재 판단 기준을 노동자 편에 서서 계속 완화해왔다는 점이다. 대법원은 1999년 간질을 앓던 타워크레인 기사의 추락사를 업무상 재해로 인정하면서 “업무와 재해 사이의 인과관계는 의학적·자연과학적으로 명백히 입증돼야 하는 것은 아니고, 제반 사정을 고려할 때 업무와 재해 사이에 상당인과관계가 있다고 추단되는 경우에도 그 입증이 있다고 할 것”이라고 판결한 바 있다.

산재 기준 노동자 편에 서서 완화

하지만 이 판결 뒤에도 법원은 삼성전자 노동자의 산재 인정에 엄격한 증명과 증거를 요구했다. 서울행정법원 4단독 정재우 판사는 2013년 12월 삼성전자 LCD 노동자 한혜경씨의 뇌종양과 관련해 “노출되었을 가능성이 있는 화학물질과 뇌종양과 연관성에 대한 의미 있는 연구 결과가 없고 노출 정도도 불분명하다”며 업무상 재해로 인정하지 않았다. 서울고법 행정9부(재판장 김주현) 역시 2016년 10월 뇌종양으로 숨진 삼성전자 반도체 노동자 이윤정(사망 당시 32살)씨의 산재를 인정한 1심을 파기하며 “유해물질과 특정 질병의 발병 사이에 연관성이 있을 가능성만으로, 사업자에게 인과관계가 없다는 증명 책임까지 지울 수 없다”는 이유를 들었다.

이러한 시대 흐름에 역행하는 판결도 있었지만, 법원은 반도체·LCD 같은 첨단산업 분야에서 발생한 ‘직업병’의 업무 관련성을 폭넓게 인정하는 방향으로 꾸준히 나아가는 추세다. 서울행정법원 1부(재판장 이승택)는 2013년 10월 김경미씨의 백혈병을 산재로 인정하면서 “현대 의학으로도 백혈병의 원인이 명확하게 규명되지 못하고 있는 현실과 작업장에서 발생할 수 있는 안전보건상의 위험을 공적보험을 통해 산업과 사회 전체가 분담토록 하는 산재보상보험제도의 목적 등을 고려해보면, 비록 망인의 백혈병 발병 경로가 의학적으로 명백히 밝혀지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근무하는 동안 각종 유해화학물질에 지속적으로 노출되어 발병하거나 적어도 그 발병이 촉진되었다고 추단할 수 있다”고 밝혔다. 이어 서울행정법원 2부(재판장 박연욱)도 2016년 1월 이은주씨의 업무상 재해를 인정하면서 “점액성 난소암은 발병률이 낮고 발병 원인이 의학적으로 명백히 밝혀지지 아니한 질병이므로 발병률이 높은 질병, 발병 원인에 대해 의학적으로 연구가 다수 이루어진 질병에 비해 상당인과관계에 대한 증명 정도가 완화된다”고 밝혔다.

첨단산업 직업병 폭넓게 인정

이런 1심 판단이 이어지며 2017년 5월 2심인 고법에서도 증명 책임의 완화를 처음 명시한 판결문이 나왔다. 서울고법 행정2부(재판장 김용석)는 이소정씨의 다발성경화증을 산재로 인정하면서 “희귀 질병이어서 임상적 자료가 충분하지 않고 작업현장에서 발병 원인으로 거론되는 요소들과 인과관계를 의학적·자연과학적으로 규명하는 것이 불가능하거나 현저히 곤란한 경우라 하더라도, 그러한 사정만으로 상당인과관계를 부정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 “근로자에게 질병의 원인이 될 만한 건강상의 결함이나 유전적 요소가 밝혀진 바 없고 업무 수행 중 또는 업무 수행 직후에 질병의 증상이 나타났다면 상당인과관계는 추단된다”고 판단했다.

삼성 ‘기밀주의’에도 책임 물어

대법원의 8월29일 판결은 이런 하급심의 판단을 종합한 결과로 보인다. 대법원 3부(주심 김재형 대법관)는 삼성전자 LCD 노동자 이희진씨의 다발성경화증을 산재로 보지 않은 원심을 파기하며 ‘첨단산업 분야 희귀병의 업무상 재해 인정 기준’을 제시했다. 대법원은 “첨단산업 분야에서는 직업병에 대한 경험적·이론적 연구 결과가 없거나 부족한 경우가 많다. 발전 속도가 매우 빨라 사용되는 화학물질이 빈번히 바뀌고, 화학물질 그 자체나 작업 방식이 영업비밀에 해당하는 경우도 많아 산재의 존부와 발생 원인을 사후적으로 찾아내기가 쉽지 않다”고 지적했다. 이어 “근로자에게 발병한 질병이 첨단산업 현장에서 새롭게 발생하는 유형에 해당하고 그 연구 결과가 충분하지 않아 인과관계를 명확하게 규명하는 것이 곤란하더라도 그것만으로 인과관계를 쉽사리 부정할 수 없다”고 짚었다.

소송이 연이어 제기되면서 산재 판정에 필요한 정보를 은폐하는 삼성과 근로복지공단의 처사에 대한 법원의 문제의식도 짙어졌다. 김경미씨의 백혈병을 산재로 인정한 서울행정법원 1부는 2013년 “망인의 발암물질 노출 여부와 그 정도를 더는 규명할 수 없게 된 것은 근무 당시 사용된 화학물질에 대한 자료를 제대로 보존하지 않고 일부 자료에 대해서는 영업비밀이라는 이유로 공개하지 않은 삼성전자에도 일부 원인이 있다”며 사실상 처음으로 자료 공개를 거부하는 삼성전자의 책임을 지적하는 내용을 판결문에 담았다. 삼성의 ‘기밀주의’가 작동하는 상황에서 산재의 입증 책임을 노동자에게 떠넘기는 게 적절하지 않다고 판단한 것이다.

삼성전자 반도체 노동자 유아무개씨의 재생불량성빈혈, 이윤정씨의 뇌종양을 업무상 재해로 본 서울행정법원 7단독 이상덕 판사는 2014년 11월 판결문에서 산업안전보건연구원(산보연) 역학조사의 한계를 조목조목 비판했다. 근로복지공단은 업무와 질병의 상관관계를 파악하기 위해 산보연 등에 노동자가 일했던 작업환경에 대한 역학조사를 의뢰하고, 그 결과를 바탕으로 산재 여부를 판단한다. 그러나 산보연은 2010년 유씨와 이씨가 일했던 작업장에 대한 역학조사에서 이들이 일했던 삼성전자 반도체 충남 온양사업장의 유해화학물질의 노출 수준이 높지 않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이 판사는 △2010년 작업환경은 원고들이 일한 2000년보다 개선됐고 △사업장에서 사용하는 화학물질 일부에 대해서만 조사·측정했으며 △유해물질 검출량이 허용 기준 미만이라도 복합적으로 장기간 노출되면 질병 발생 위험이 커지고 △특정 화학물질과 질병 사이의 관련성 미연구는 판단의 근거가 될 수 없다는 ‘중대한 한계’를 지적했다. 이를 바탕으로 이 판사는 “사실관계가 제대로 규명되지 않은 데에 근로자의 책임이 없으면, 상당인과관계를 추단함에 있어 근로자에게 유리한 간접정황으로 참작함이 마땅하다”고 판단했다. 서울행정법원 6단독 심홍걸 판사 역시 2017년 8월 삼성반도체 사외협력업체 큐티에스의 노동자 김경순씨의 유방암을 산업재해로 인정하며 “부실한 역학조사를 근거로 발암물질의 노출 수준이 낮다며 원고에게 불리한 처분을 한 것은 매우 부당한 처사”라고 강도 높게 비판했다.

다른 직업병 판결에 영향 줄 듯

삼성과 공단의 책임을 노동자에게 돌려서는 안 된다는 1심 판단은 고법과 대법원에서 더욱 강화됐다. 서울고법 행정10부(재판장 김흥준)는 2017년 7월 이은주씨의 2심 판결문에서 “역학조사 당시 유해화학물질의 농도에 대해 별다른 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았고 공기 중 유해인자에 대한 작업환경 측정도 실시되지 않았다”며 “사실관계의 증명 책임에 있어, 열악한 지위에 있는 근로자를 불리하게 취급하는 것은 형평에 어긋난다”고 밝혔다. 8월29일 대법원 판결 역시 “사업주의 협조 거부 또는 관련 행정청의 조사 거부나 지연 등으로 유해요소들의 종류와 노출 정도를 특정할 수 없었다면, 상당인과관계를 인정하는 단계에서 근로자에게 유리한 간접사실로 고려할 수 있다”고 명시했다. 삼성 산재 소송의 대부분을 대리했던 반올림의 임자운 변호사는 “산재 판결들은 시간이 갈수록 대상 사업장과 대상 질병을 확장했을 뿐 아니라 판정 논리 면에서도 공단을 앞서고 있다. 특히 산재보험제도의 본래 목적과 기능에 충실하라는 대법원 판결은 다른 직업병 피해 노동자들에게도 유리하게 적용될 수 있다”고 평가했다.

김민경 기자 salma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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