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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인과 고립 그리고 죽음

성소수자 건강불평등 분석 논문 첫 입수…

우울증 및 자살 충동 심각, ‘다름’ 이해 없이 ‘우리’는 없다
등록 2018-01-03 10:46 수정 2020-05-03 04:28
2017년 4월20일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대학성소수자모임연대 등이 ‘대통령 후보들은 성소수자 인권 보장을 약속하라’며 차별금지법 제정을 요구하고 있다. 한겨레 김경호 선임기자

2017년 4월20일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대학성소수자모임연대 등이 ‘대통령 후보들은 성소수자 인권 보장을 약속하라’며 차별금지법 제정을 요구하고 있다. 한겨레 김경호 선임기자

불.

보이지만 잡히지 않는 것. 손으로 잡기엔 너무 아픈 것. 성소수자의 자살 문제는 마치 ‘불’과 같다. 한국 사회에서 이것이 심각한 사회문제라는 사실은 많은 사람이 알고 있었지만, 누구도 이 문제의 구체적인 ‘심각성’을 손에 쥐지 못했다. 제대로 연구나 조사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외면당해온 아픔이다.

우울증상 전체보다 5~7배 높아

이 아픔을 마주하려는 연구가 본격 시작됐다. 고려대학교 일반대학원 보건과학과 역학연구실이 진행하는 한국 성소수자 건강 연구 ‘레인보우 커넥션 프로젝트’다. 프로젝트 연구팀(김승섭 교수, 이호림, 이혜민, 박주영, 최보경)은 2016년 말부터 한국게이인권운동단체 ‘친구사이’ 등의 도움을 받아 성소수자에게 온라인 설문조사를 했다. 응답자 중 2335명의 데이터를 분석해 최근 첫 논문인 ‘한국 동성애자-양성애자의 건강불평등’을 펴냈다.

이 연구팀에서 입수한 논문을 보면, 한국 사회에서 성소수자의 정신적 건강 상태는 비성소수자에 견줘 매우 위험한 수준인 것으로 나타났다. 단, 이 논문은 연구 대상을 성소수자 가운데 트랜스젠더를 제외한 동성애자와 양성애자로 한정했다. “트랜스젠더는 동성애자나 양성애자와 사회적 경험 및 건강의 측면에서 다른 특성을 보일 수 있”기 때문이었다. 연구팀은 별도로 트랜스젠더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이번 연구에서 가장 눈에 띄는 점은 성소수자들이 심각한 수준의 우울증상을 경험한다는 점이었다. 논문을 보면 성소수자 남성(게이·양성애자)은 34.2%, 여성(레즈비언·양성애자)은 절반을 넘는 53.5%가 우울증상을 경험하는 것으로 확인됐다. 이런 결과는 전체 인구 집단을 대상으로 한 조사와 큰 차이를 보인다. 2015년 성인 6013명에게 이뤄진 제10차 한국복지패널조사를 보면 남성 5.6%, 여성 7.3%가 우울증상을 경험한다고 답했다. 성소수자의 우울증상 경험은 연령표준화를 적용해 비교할 경우 전체 인구 집단보다 5~7배 정도 높다.

자살 충동도 심각한 상황이었다. ‘지난 1년 동안 자살을 진지하게 생각한 적이 한 번이라도 있었는가’라는 질문에 성소수자 남성은 26%, 여성은 41.4%가 ‘그렇다’고 답변했다. 제6기 국민건강영양조사(2013~2015년) 결과와 연령표준화를 한 뒤 비교하면 남성(3.5%)은 9배 이상, 여성(5.0%)은 6배 이상 높은 수치다. ‘자살을 실제 시도한 적 있다’고 답한 이도 많았다. 성소수자 남성 3.7%, 여성 5.5%가 ‘지난 1년간 자살 시도 경험이 있다’고 답변했다. 제6기 국민건강영양조사(남성 0.3%, 여성 0.7%)보다 7배 이상 높은 수치다.

당연한 얘기겠지만, 성소수자들은 자신의 성적 특성으로 인해 사회적 폭력을 당한 경험이 많을수록 더 심각한 자살 충동에 시달리는 것으로 확인됐다. 연구팀은 현재 진행 중인 별도 연구에서 사회적 폭력을 세 부류로 나눴다. 첫째, 성소수자라는 이유로 중·고등학교 시절 학교에서 집단 따돌림을 당한 적이 있는가. 둘째, 성소수자라는 이유로 만 19살 이후 신체적·언어적 폭력과 성폭력 경험이 있는가. 셋째, 성소수자라는 이유로 지난 12개월 동안 차별받은 적이 있는가. 폭력을 경험하지 않은 경우 자살 생각 위험도를 1이라고 했을 때 한 가지 폭력 경험이 있을 때는 1.29, 두 가지일 때는 1.56, 세 가지일 때는 1.82로 위험도가 높아졌다. 세 가지의 사회적 폭력을 모두 경험한 경우 성소수자가 자살을 생각할 가능성이 1.82배까지 늘어난다는 뜻이다.

반면 사회적 폭력을 당한 경험이 많을수록 의료기관 방문을 회피·연기하는 빈도가 높아지는 경향이 관찰됐다. 폭력에 노출되지 않았을 때 의료기관 방문을 회피·연기하는 수준이 1이라면, 한 가지 폭력의 경험이 있을 때엔 1.37, 두 가지인 경우 1.68, 세 가지인 경우 1.62 수준으로 의료 조처를 피하는 모습을 보였다. 연구팀을 총괄하는 김승섭 고려대 보건정책관리학부 교수는 “사회적 폭력에 많이 노출돼 치료가 더 필요한 성소수자일수록 낙인으로 인한 두려움과 의료인에 대한 신뢰 부족으로 의료기관을 피하는 양상을 보인다. 더 큰 위험에 놓인 성소수자들이 적절한 치료를 받지 못하는 상황에 놓이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소수자 스트레스’ 줄이려면…
2016년 6월11일 서울 시청광장 일대에서 퀴어문화축제가 열리고 있다. 참가자들은 성소수자를 상징하는 무지개 문양의 천을 들고 행진했다. 한겨레 김태형 기자

2016년 6월11일 서울 시청광장 일대에서 퀴어문화축제가 열리고 있다. 참가자들은 성소수자를 상징하는 무지개 문양의 천을 들고 행진했다. 한겨레 김태형 기자

이런 상황을 개선하려면 성소수자에게 사회적 폭력을 가하는 사회가 변해야 한다. ‘친구사이’가 운영하는 성소수자 자살예방 프로그램 ‘마음연결’의 박재경 팀장은 “성소수자나 비성소수자나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이유는 비슷하다. 뿌리가 잘려나가는 듯한 고립감과 좌절감 때문이다. 그러나 성소수자는 사회가 나를 위협하거나 환영하지 않는다는 스트레스를 더 받는다. 모멸감이나 두려움은 더 많이 느끼는데 나를 보호해주고 지지해주는 요소는 턱없이 부족하다. 이런 사회 구조가 위험성을 높인다”고 말했다.

논문의 결론도 비슷하다. 연구팀은 “모든 인간은 일상생활에서 스트레스를 경험하지만, 성소수자는 자신이 놓여 있는 소수자 지위로 인해 차별과 폭력 등 편견적 사건을 겪게 된다. 이들은 배제에 대한 예상, 정체성에 대한 숨김, 내재화된 동성애 혐오 등의 소수자만이 느끼는 스트레스를 경험한다”고 적었다.

성소수자들이 자신의 정신 건강에 문제가 있다고 느끼면서도 병원을 찾지 않는 이유 역시 소수자 스트레스 때문이다. 박재경 팀장은 “고통받는 성소수자들이 전문가를 찾아가 자신의 사정을 털어놓으면, 모든 문제의 원인을 성정체성 문제와 결부해 진단하는 사례가 많다. 성소수자인 것을 ‘일시적 현상’으로 보고 그 자체를 치료할 대상으로 여기는 것이다. 그런 경험을 하면 의료기관이나 전문가에 대한 신뢰를 가질 수 없게 된다”고 말했다.

성소수자들이 느끼는 ‘소수자 스트레스’를 줄이려면 어떤 변화가 필요할까. 가장 중요한 것은 성소수자를 차별하는 사회제도를 개선하는 것이다. 대표적인 예로 차별금지법 제정이나 동성혼 인정 등을 꼽을 수 있다.

다음으로, 성소수자 주변에 있는 가족과 친구 등의 역할이 중요하다. 김승섭 교수는 “사회적으로 더 많이 연결된 사람일수록 자살을 생각하는 빈도가 줄어든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 (성소수자가 느끼는) 고립감을 줄이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박재경 팀장도 “마음연결에 상담하는 이들 가운데 상당수는 커뮤니티 활동을 별로 하지 않는 사람들”이라고 했다. “나와 몇 차례 글을 주고받은 내담자가 있었다. 몇 개월이 지나 글이 왔다. 내 상담이 하나도 도움이 안 됐다는 내용이었다. (웃음) 다만 진심으로 걱정하는 마음만큼은 전달됐다고 하더라. 그래서 마음이 편해졌다고 했다. 누군가 나를 걱정한다는 생각만으로도 치유 효과가 있었던 것이다.” 박 팀장은 특히 부모의 역할을 강조했다. “청소년기의 경험이 성소수자의 정신 건강에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 교사나 부모의 역할이 굉장히 중요하다. 자녀의 정체성이 성소수자임을 알았을 때 부모의 반응이 폭력적으로 나오는 경우가 있다. 감금하거나 때리는 일이 많이 벌어진다. 이런 폭력은 나쁜 결과를 가져온다.”

성소수자 자살시도 33%

이번 연구에서 확인된 또 하나의 슬픈 숫자가 있다. ‘성소수자 친구 또는 가까운 성소수자 지인 중 자살을 시도한 사람이 있냐’는 질문에 33%가 ‘그렇다’, ‘실제 자살한 사람이 있냐’는 질문엔 16.5%가 ‘그렇다’고 답변했다.

‘마음연결’은 해마다 자살예방 상담과 더불어 자살예방지킴이 교육을 한다. 2017년 상담을 요청한 사람은 80여 명 수준이지만 자살예방 교육에 참여한 사람은 그 두 배인 160여 명이다. 박 팀장은 “자살예방지킴이 교육에 참가한 사람들은 ‘주변에 스스로 세상을 떠난 이가 너무 많아서 교육을 받으러 왔다’고 말한다”고 덧붙였다.

사람은 모두 다르다. 서로 다른 타인이 서로의 아픔을 이해하고 따뜻이 감싸주는 것만이 수많은 개인들이 모여 사회를 이루고 ‘우리’로 살아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고통받는 이들의 아픔을 그대로 둔 채, 우리 사회가 안전하거나 살 만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숨을 끊은 이들에게 먼저 손을 내밀지 못했다는 후회는 결국 남은 자들의 몫이다. 우리는 남은 자들이다.

정환봉 기자 bonge@hani.co.kr우울감 등 말하기 어려운 고민으로 전문가의 도움이 필요한 경우 자살예방 핫라인 1577-0199, 희망의 전화 129, 생명의 전화 1588-9191, 청소년 전화 1388 등에 전화하면면 24시간 상담을 받을 수 있다. 성소수자는 ‘마음연결’의 온라인 상담 ‘http://chingusai.net/connect’(문의 070-4282-7943)으로도 도움을 받을 수 있다.

성소수자 자살예방 프로젝트 ‘마음연결’


알아채고, 물어보고, 이어주자


한국게이인권운동단체 ‘친구사이’는 2015년부터 성소수자 자살예방 프로젝트 ‘마음연결’을 운영하고 있다. 주로 온라인 상담 등으로 성소수자가 놓여 있는 위기에 개입하고 자살유족 집단상담 등을 진행한다. 2017년에는 총 80여 명의 위기자를 상담했다.
마음연결이 진행하는 또 다른 주요 사업은 성소수자 자살예방지킴이 양성교육인 ‘무지개 지킴이 워크숍’이다. 워크숍은 지난해 7차례 열렸고 84명이 수료했다. 전체 교육 시간은 3시간으로, 교육이 끝나면 수료증을 발급한다. 지킴이는 자살을 생각, 계획, 실행하려는 사람을 신속하게 알아차려 전문기관과 전문가의 도움을 받도록 격려하는 역할을 한다. 최근에는 성소수자들이 주로 찾는 가게의 주인이나 종업원을 직접 방문하는 교육도 시작했다. 지난 1년간 이 교육에 참가한 이는 80명 수준이다.
친구사이가 ‘마음연결’ 프로젝트를 시작한 것은 충격적인 조사 결과 때문이었다. 2014년 친구사이가 기획하고 ‘성적지향·성별정체성 법정책연구회’에서 2년간 연구한 ‘한국 LGBTI 커뮤니티 사회적 욕구조사’(나영정 외)가 발표됐다. 조사 결과 전체 응답자의 28%가 자살을 시도한 적 있고, 35%가 자해를 시도한 적 있다는 답변이 나왔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높은 수치였다. 심각성을 느낀 친구사이는 준비 기간을 거쳐 2015년 11월부터 누리집을 열고 ‘마음연결’ 프로젝트에 시동을 걸었다. 현재 마음연결에는 11명이 활동하며 이 중 4명이 주로 상담을 담당한다. 상담의 전체적인 조율은 전문상담사 1명이 맡고 있다. 상담은 주로 온라인에서 이뤄지고, 필요한 경우 전화나 대면 상담을 한다.
자살은 막을 수 있다. 마음연결은 자살예방지킴이 양성교육에서 자살을 방지하는 세 단계 과정을 제시하고 있다. 첫째는 ‘알아채기’다. 자살 이야기를 많이 하거나, 성소수자라는 사실 때문에 차별이나 폭력을 당했거나, 예기치 않은 아우팅을 당했을 때 자살을 생각하는지 알아차릴 필요가 있다. 다음 과정은 ‘물어보기’다. 자살 이유나 계획을 직접 물어보고 위기자에게 관심이 있음을 표현하는 것 역시 자살 예방에 필요한 일이다. 마지막 단계는 ‘이어주기’다. 성소수자 커뮤니티와 위기자를 연결해 소속감을 느끼게 하거나 위기자가 전문 상담기관이나 정신건강의학과의 진료를 받도록 하는 것이 도움이 된다.
마음연결은 현재 게이 구성원을 중심으로 활동하고 있다. 새해에는 다른 성별정체성을 가진 이들도 충원해 더 폭넓은 상담이 이뤄지도록 할 계획이다. 지역이나 청소년 단체와 연계하는 자살 예방 활동도 준비 중이다.
마음연결 온라인 상담은 http://chingusai.net/connect로 하면 된다. 문의 전화는 070-4282-7943이다.
정환봉 기자 bong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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