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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살 책임, 사법부에 묻는다

내년 4월 베트남전 한국군 민간인 학살 50주기 맞아 진실 규명 위한 민사소송 준비…

<한겨레21>, 한베평화재단과 스토리펀딩 진행
등록 2017-11-21 08:38 수정 2020-05-02 19:28
2014년 2월12일 베트남 꽝남성 퐁니·퐁넛촌 학살 위령제에 한국 시민단체가 보낸 조화들이 세워졌다. 한겨레 고경태 기자

2014년 2월12일 베트남 꽝남성 퐁니·퐁넛촌 학살 위령제에 한국 시민단체가 보낸 조화들이 세워졌다. 한겨레 고경태 기자

베트남전쟁이 한창이던 1968년 2월12일 베트남 중부 꽝남성의 퐁니·퐁넛 마을에서 한국군에 민간인 70여 명이 학살당하는 참극이 벌어졌다. 희생자는 대부분 여성과 아이였다. 전쟁 중에 비무장 민간인을 살상하는 행위는 국제법으로 금지돼 있다. 더욱이 저항할 힘도 변변찮은 여성과 아이들을 겨냥한 것은 인류사적 전쟁범죄로 비난받을 만하다.

한국 정부 상대 손배소송 ‘전초전’

그러나 베트남전 민간인 학살의 책임 문제는 크게 이슈화되지 않고 있다. 이 문제가 처음 공론화된 2000년 이후 17년 동안 피해자들의 절절한 증언이 이어졌지만, 한국 정부는 진상 규명 등 책임 있는 조처는커녕 부인으로 일관해왔다. 전쟁범죄에 대한 책임 회피는 가해국 정부들이 그동안 공통적으로 보여준 모습이다. 하지만 한국 정부는 일본군 ‘위안부’ 등 일제가 저지른 만행에 대해 책임 있는 태도를 일본 정부에 요구하고 있다.

내년 4월 서울에서 열리는 ‘베트남전 민간인 학살 진상 규명을 위한 시민평화법정’(평화법정)은 이 불편한 진실에 정면으로 문제제기를 하는 계기가 될 것으로 보인다.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민변)과 한베(한국-베트남)평화재단, 베트남평화의료연대가 함께 준비하는 평화법정은 베트남전 민간인 학살 50주기를 기리는 행사로 치러진다. 민변, 한베평화재단 외에도 아시아인권평화디딤돌 아디, 역사문제연구소, 참여연대 등 여러 시민사회단체가 결합해 11월21일 ‘베트남전쟁 시기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 진상규명을 위한 시민평화법정 준비위원회’ 발족 기자회견이 열린다. 도 평화법정 개최의 뜻을 알리고 더 많은 사람들과 함께하기 위해 11월 말부터 한베평화재단과 ‘내가 만난 베트남’이라는 주제로 스토리펀딩을 진행한다.

크라우드펀딩으로 소송비용 마련

행사는 단순한 ‘기림’에 그치지 않는다. 실제 대한민국 법정에서 대한민국 정부의 손해배상 책임을 따지는 소송을 진행하려는 ‘전초전’ 성격의 행사다. 국방부가 학살을 전면 부인하는 상황에서 대한민국 사법부에 실체적 진실과 배상 책임을 묻는 소송을 겨냥한 것이다. 평화법정에서 사용된 소장과 증거들은 법원에 그대로 제출된다. 평화법정이 형사소송 형식으로 진행되는 다른 시민법정과 달리 민사소송으로 준비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베트남 피해자들이 한국 정부로부터 손해배상금을 받도록 하는 게 행사의 최종 목표인 셈이다.

지난 11월7일 법무법인 해마루 사무실에서 만난 장완익 변호사와 임재성 변호사는 행사 준비의 가장 큰 어려움으로 ‘증거 확보’를 꼽았다. 장 변호사는 “베트남 현지에도 민간인 학살 기록이 많지 않다. 피해자의 생생한 증언이 있음에도 이를 뒷받침할 조사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은 탓이다. 그래서 학살에 대한 구체적인 사실관계를 확정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베트남 현지에서도 잘 조사되지 않았던 이유는 현지에서 이 문제를 적극적으로 제기하는 변호사나 활동가가 드물기 때문이다. 임 변호사는 “베트남에서 과거사를 다루는 변호사들은 감옥에 가거나 국외로 추방되는 처지라고 한다”고 말했다.

평화법정에서 적용될 법은 대한민국 법령과 국제인권법, 국제인도법이다. 관련 법에 따르면, 베트남전쟁 때 한국 군인들이 교전 상대가 아닌 민간인들을 살해하거나 부상을 입혔다면 대한민국 정부는 군인(공무원)이 행한 불법행위의 책임을 져야 한다. 하지만 생사를 넘나드는 전시에 적군과 민간인을 구분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려운 측면도 있다. 소송에서는 이를 포함한 여러 쟁점에서 치열한 공방이 벌어질 것이다. 임 변호사는 “사실관계 확정부터 법리 공방까지 실제 소송에서는 넘어야 할 산이 많다. 하지만 국제법에서 전쟁범죄를 규정한 이유는 명확하다. 아무리 전쟁 중일지라도 민간인을 해쳐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평화법정의 원고는 실제 민간인 학살 피해자(생존자)들이다. 원고를 모으는 일은 결코 쉽지 않았다. 일당 독재의 잔재가 남아 있는 베트남에서 정부에 진상 규명을 요구하거나 배상 책임을 묻는 소송을 내는 것이 베트남 국민에게 익숙지 않기 때문이다. 소송에 참여하겠다는 뜻을 밝힌 피해자들도 언론에 공개되는 걸 극도로 꺼린다. 혹시라도 자국 정부로부터 불이익을 당할까 걱정한다고 한다. 이들을 국내에 무사히 입국시키더라도 평화법정에 나오게 할 수 있을지는 불투명하다.

행사 비용도 만만치 않다. 원고들이 입국해서 체류하는 데 드는 비용이 가장 큰 부담이다. 행사 준비팀은 크라우드펀딩으로 비용을 마련할 계획이다. 장 변호사는 “모자라는 돈은 다른 공익재단 등에서 협조를 받기로 했는데, 그래도 모자라면 사비라도 털 작정”이라며 웃었다.

평화법정 모델은 2000년 일본 도쿄에서 열린 ‘여성국제전범법정’이다. 일본군 ‘위안부’라는 전쟁범죄의 책임을 묻는 시민법정이 가해국 수도에서 열린 것이다. 당시 일본 법률가들이 행사를 성사시키기 위해 쏟은 노력은 참으로 인상적이었다. 임 변호사는 “우리가 ‘과거사 책임을 외면한다’고 비난하는 일본 사회가 18년 전에 했던 것을 우리는 이제야 시작하는 것이다. 그만큼 부담이 크다”고 말했다.

장 변호사 등은 궁극적으로 베트남 민간인 학살에 대한 특별법 제정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피해자가 최소 5천여 명에 이를 것으로 추산되기 때문에 이들의 개별적인 소송에만 맡겨두는 건 또 다른 책임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 장 변호사는 “국회에서 먼저 특별법을 제정해 책임 있는 조사 기구를 만들고 베트남 정부의 협조를 받아 진상을 규명한 뒤 그에 따른 배상 책임을 지는 방식이 가장 좋다”고 말했다.

실제 배상 이뤄질지는 미지수

하지만 실제 소송으로 베트남 피해자에게 배상까지 이뤄질 가능성은 그리 많지 않다. 장 변호사는 “일본군 위안부와 강제징용 등 일본 정부의 배상 책임을 묻기 위해 일본 법원에 낸 소송은 다 졌다. 우리 법원도 비슷한 결론을 내릴 공산이 크다”고 말했다. 그럼에도 굳이 소송을 준비하는 이유는 뭘까. “법률가가 할 수 있는 일은 소송밖에 없으니까요.” 장 변호사는 멋쩍게 웃었다. 그의 웃음은 일본에 ‘전쟁범죄를 잊지 말라’고 요구하는 데 그치지 않고, 가해자로서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없는지 돌아봐야 한다고 말하는 듯했다.

이춘재 기자 cjle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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