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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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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 청년, 아시아 난민 함께 도와요”

아시아 재난구호 플랫폼 개척, 오니시 겐스케
피스윈즈 대표
등록 2017-11-14 08:22 수정 2020-05-02 19:28
오니시 겐스케 대표가 10월30일 일본 히로시마 세토 내해의 작은 섬 도요시마에서 실시한 피스윈즈 긴급구조 훈련 현장을 방문해 대원들을 격려하고 있다. 가상의 생존자를 찾는 이날 훈련에는 헬기 2대와 구조견 4마리가 동원됐다. 피스윈즈 재팬 제공

오니시 겐스케 대표가 10월30일 일본 히로시마 세토 내해의 작은 섬 도요시마에서 실시한 피스윈즈 긴급구조 훈련 현장을 방문해 대원들을 격려하고 있다. 가상의 생존자를 찾는 이날 훈련에는 헬기 2대와 구조견 4마리가 동원됐다. 피스윈즈 재팬 제공

이 사람, 변화무쌍하다.

정호승 시인의 표현을 빌리면 “길이 끝나는 곳에도 길이 있다”고 믿고 행동하는 사람이다. 남들이 하지 않는 일을 저지르고, 궁극에는 길을 만들어낸다. 은 10월30일 히로시마에서 일본 비정부기구(NGO·엔지오)의 대표적 인물 오니시 겐스케(50)를 만났다. 국제재난구호단체인 ‘피스윈즈 재팬’(Peace Winds Japan) 총괄책임자, 재팬 플랫폼 공동대표, 시빅포스(Civic Force) 대표, 아시아 6개국이 참여하는 재난구호 플랫폼인 에이팟(APAD) 대표 등 직함도 여럿이다.

시민운동가 시절 박원순 연상

오니시 대표가 생각하는 자신의 정체성은 ‘소셜 이노베이션 플랫폼’ 설계자다. 그의 활동 반경은 재난구호와 긴급구조에서 산골마을 재생과 유기견 살리기까지 자유자재로 뻗어나간다. 일하는 데 도움이 된다 싶으면 주식회사도 과감하게 설립한다. 흡사 참여연대를 이끌다 아름다운가게를 열고 희망제작소의 엔진을 돌리던 시민운동가 시절의 박원순이 연상된다. 10월30일 히로시마 세토 내해의 작은 섬인 도요시마의 재난구조 훈련 현장에서 오니시 대표와 길게 대화를 나눴다.

주업무가 난민과 이재민을 구조하고 지원하는 것이다. 어떻게 이런 일과 인연을 맺게 됐나.

영국에서 평화학을 공부하며 석사 논문을 준비할 때였다. ‘쿠르드 지역에 대한 이라크의 인도적 개입’이란 주제를 잡았는데, 내로라하는 교수들도 쿠르드 현지를 직접 가보지 않았더라. 그래서 모자라는 머리를 몸으로 때우자고 생각했다. 터키에서 국경을 넘어 이라크로 밀입국했다. 처참한 난민들을 보니, 연구만 하고 있을 수 없었다.

유럽 엔지오들의 활약이 대단했다. 목숨 걸고 현장에서 뛰는 영국 옥스퍼드의 인재들이 멋있어 보였다. 물량, 역량에서도 유엔에 뒤지지 않았다. 우리도 해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현지 일본 엔지오의 직원으로 들어갔는데 워낙 영세해 1년 만에 사업을 철수했다. 차마 버리고 나올 수 없어 혼자 설립했던 게 지금의 피스윈즈다. 그때가 1996년 29살이었다. 1년쯤 버티다 미국이나 유럽 엔지오한테 사업을 넘길 생각이었는데, 내 삶이 되고 말았다.

일본은 그때 부자 나라였을 텐데, 엔지오들은 가난했나.

당시 개발도상국에 공급하는 일본의 공적개발원조(ODA) 자금 규모가 세계 제일이었다. 하지만 일본 정부는 유엔 등 국제기구들만 지원했다. 국제재난 지역에서 일하는 일본 엔지오들은 정부 자금을 한 푼도 받지 못했다. 그러니 1999년 코소보와 동티모르에서 전쟁이 터져 난민 100만 명이 생겼을 때도,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이유는 분명했다. 일본 엔지오들의 신뢰와 정통성이 없었기 때문이다. 일본 경제는 급속하게 발전했지만 여전히 권위주의 문화가 팽배했고 시민사회는 성숙하지 못했다. 엔지오가 성장할 수 있는 토양 자체가 없었다. 피스윈즈라는 자동차 회사를 만들었는데 달릴 수 있는 도로가 없는 격이었다.

그래서 어떻게 도로를 만들었나.

유럽과 미국에선 50~100년 걸려 시민사회가 이끄는 제3섹터를 만들었다. 그 길을 따라간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일본의 길, 일본식 도로를 만들어야 했다. 마침 기업들 사이에 사회적책임(CSR) 붐이 일었다. 정부와 기업의 힘을 빌리기로 했다. 그렇게 산고 끝에 2001년 탄생한 아이가 ‘재팬 플랫폼’이다. 정부와 기업이 엔지오들을 거들면서 키워나가는, 일본 고유의 크로스섹터 플랫폼이다. 언론도 참여한다.

산간벽지에 유기견 살리는 동물공원
긴급재난구호 개척자에서 마을 재생과 유기견 살리기까지, 자신의 삶을 이야기하는 오니시 대표의 표정이 천진난만하다. 피스윈즈 재팬 제공

긴급재난구호 개척자에서 마을 재생과 유기견 살리기까지, 자신의 삶을 이야기하는 오니시 대표의 표정이 천진난만하다. 피스윈즈 재팬 제공

재팬 플랫폼 공동대표도 맡고 있다.

재팬 플랫폼은 일본 외무성과 게이단렌(경제단체연합회), 그리고 40여 개 재난구호 엔지오가 참여한다. 재난구호 정책을 결정하고 자금을 조달·분배하는 일을 수행한다. 지금까지 무려 4천억원 이상의 재난구호 자금을 집행했다. 예를 들어 28개국에서 재난구호 활동을 벌이는 피스윈즈도 재팬 플랫폼의 자금 지원을 받는다. 덕분에 피스윈즈는 한 해 400억원 이상의 사업 규모로 발전했다. 또 정부가 아니라 민간에서 정책 결정을 주도한다는, 그 경험이 참 좋더라. 재팬 플랫폼에선 외무성 국·과장급 간부와 엔지오 사람이 평등하게 이야기할 수 있다. 그전에는 엔지오 대표가 외무성 사무관을 만나기도 힘들었다.

시빅포스와 에이팟이란 단체도 세웠더라.

잠시 피스윈즈 일을 쉰 적이 있었다. 돌아와보니 후임자가 나라 밖의 국제 재난 구호만 강조하더라. 설립 취지가 그런 것은 아니었는데…. 국내 재난에 대응하는 단체를 따로 만들어야 했다. 그게 2007년에 세운 시빅포스다. 시빅포스는 동일본 대지진 때 맹활약했다. 구조헬기로 재해 현장을 가까이에서 촬영해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등으로 실시간 전파했다. 600여 기업과 시민 5만 명의 후원, 350억엔의 모금을 이끌어냈다. 정부-기업-엔지오-시민이 협업하는 재팬 플랫폼의 경험이 축적됐기에 그런 일을 할 수 있었다. 에이팟은 일본과 한국, 인도네시아, 필리핀, 스리랑카, 방글라데시 6개국이 참여하는 국제 플랫폼이다. 아시아의 실정에 맞는 플랫폼을 만들자 생각했고, 이게 잘되면 새로운 형태의 국제기관 시초가 될 수 있다고 기대한다. 외무성은 유엔과 적십자사에 내는 정부 분담금을 에이팟에도 지원하기로 결정했다.

재난구호 엔지오의 외길을 걸어온 오니시 대표의 삶은 2011년 전방위 ‘소셜 이노베이션 플랫폼’ 개척자로 진화하는 전기를 맞는다. 히로시마현에서 인구 1만 명도 안 되는 진세키코겐(고원)이란 산골마을과 만나면서다. 진세키코겐의 인구는 10월 말 현재 9369여 명, 그중 65살 이상이 절반(46.3%)에 이르러 이론적으로는 25년 뒤 사람이 살지 않는 ‘죽은 마을’이 된다. 그 마을의 조합에서 보유하던 해발 700m의 캠핑공원(25ha 규모) 운영을 오니시 대표에게 맡기겠다고 한 것이다.

진세키코겐으로 들어오는 결정이 쉽지 않았을 텐데, 마을 사람들이 환영하던가.

다수 주민들의 정서는 좋지 않았다. 행성에서 날아온 외계인 취급을 당했다. 다른 엔지오 사람들한테는 웃음거리가 됐다. 오니시가 맛이 갔다느니, 이제 죽을 때가 됐다느니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시간이 흐르면서 작은 호응이 일어나더라. 마을에서 작은 사업을 하는 사람들이 맨 먼저 찾아왔다. 우리가 들어온 게 기회라고 생각한 것이다. 마을 재생에 고군분투하던 한 공무원과 의기투합을 했다. 그때 혼자 외치던 그 공무원이 지금은 정장(우리나라의 면장에 해당)이 됐다.

산꼭대기 캠핑공원을 어떻게 살려놓았나.

처음엔 유기견을 캠핑공원에 데려와 재난 현장에 투입하는 구조견으로 훈련하기로 했다. 그런데 유기견 보호센터에 갔다가 나도 아내도 경악했다. 주인을 찾지 못한 보호센터의 수많은 유기견들이 처참하게 질식사(안락사)당하는 현장을 본 것이다. 2013년 ‘피스완코’ 프로젝트를 시작해, 1천 일 안에 히로시마현의 유기견을 완전히 없애겠다고 발표했다. 실제 2016년 4월 1천 일 계획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해, 지금 히로시마현에서 질식사당하는 유기견은 한 마리도 없다. 개들은 우리 공원에서 자유롭게 뛰어놀다, 한 마리 두 마리 새 주인을 만나고 있다. 은퇴한 경주용 말도 데려와 승마용으로 새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했다. 지난해에는 ‘동물의 공원’이라는 뜻의 주식회사(티어가르텐)를 세워 공원 운영과 동물 관리를 맡도록 했다. 티어가르텐은 히로시마와 후쿠시마, 오카야마 등지에서 사람들이 즐겨 찾는 유료 공원으로 발전하고 있다. 문을 닫으려던 근처 식당도 다시 살아났다.

재원이 문제일 텐데, 어떻게 해결했나.

10월 말 우리가 보호하는 개가 1741마리에 이른다. 지금까지 628마리의 주인을 연결해주었다. 개가 많아져서 견사도 4호까지 늘어났다. 당연히 재원이 많이 드는데, 구조견 유메노스케가 큰 공을 세웠다. 2014년 히로시마 산사태가 났을 때, 처음 재난 현장에 도착한 구조견 유메노스케가 조난자를 발견한 것이다. 유메노스케가 안락사될 유기견을 훈련한 구조견이라는 사실이 방송에 보도되면서 후원이 쏟아졌다.

유기견 유메노스케 활약, 시민 모금 봇물

피스윈즈는 유메노스케의 힘으로 지난해에만 3만여 명한테서 무려 100억원의 민간 후원금을 모았다. 여전히 시민사회의 토양이 빈약한 일본에서 이 정도 시민 후원금을 모았다는 것 자체가 기적 같은 일이다. 재팬 플랫폼의 방식도 그동안 정부와 기업 후원에 주로 의존하던 한계가 있었다. 올해에는 ‘고향세’(출신지나 거주지 등 재정이 부실한 지방자치단체에 자발적으로 내는 기부금)와 일반 후원을 합쳐 150억원 이상의 모금을 기대한다. 전체 후원자도 5만 명으로 늘어났다. 오니시 대표가 진정한 소셜 이노베이션 플랫폼의 구현을 자신 있게 강조하는 배경이다.

소셜 이노베이션 플랫폼의 다음 그림은 뭔가.

‘하늘을 나는 의사들’을 지켜봐달라. 재난이 발생하면 의료진을 곧장 헬기에 태워 현장에 보낼 수 있게 플랫폼을 구축하고 있다. 사가대학 부속병원의 지역 거점 응급센터에서 일하는 의료진 15명과 협력 의료진 5명이 참여한다. 재난이 생기면 초기 투입이 가장 중요하다. 정부 구조대는 의사결정에 시간이 걸린다. 우리 같은 민간 구조단체가 발 빠르게 대응할 수 있다. 경비행기도 확보했다. 또 하나, 시리아 난민 아이들을 데려와 외국 대학으로 진학시키는 국제학교 설립을 준비하고 있다. 진세키코겐의 폐교 부지를 확보해놓았다.

한국과 협력에 관심이 많다고 들었다.

한국과 일본 청년들이 분쟁 지역에서 함께 활동하는 모습을 상상해보라. 긍정적인 한-일 관계를 열어가는 데 도움이 될 거다. 에이팟에 6개국이 참여하지만, 한국의 역할이 더 기대된다. 이를 위해 올해 ‘에이팟 코리아’라는 한국법인을 세웠다. 첫 돌을 놓았다. 일본 에이팟 본부에도 네댓 명의 한국 청년들이 일하고 있다. 한국에 들어온 외국계 재난구호 엔지오들은 모금에만 매달린다. 정작 젊은이들을 재난 현장에 보내는 가장 중요한 일에는 관심이 없다. 한국 청년들이 아시아 청년들과 함께 재난 지역에서 땀 흘릴 수 있도록 에이팟이 길을 열어가고 싶다. 한국 스스로도 선진국이란 의식을 가지고 다른 아시아 국가를 돕는 일에 더 열심히 나섰으면 좋겠다. 그렇게 한국과 일본이 힘을 모으는 결단이 필요하다.

히로시마(일본)= 김현대 선임기자 koala5@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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