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유명 감독님들 동참해달라”

이명박 정부 국정원 블랙리스트 문화·예술인 82명 대표해

민·형사 소송하는 배우 문성근씨… “MB 소환 법적 책임 물어야”
등록 2017-09-26 05:32 수정 2020-05-02 19:28
검찰의 참고인 조사를 마친 문성근씨를 9월19일 만났다.

검찰의 참고인 조사를 마친 문성근씨를 9월19일 만났다.

결국, ‘이번에도’ 문성근이 총대를 멨다. 그는 이명박 정부의 국가정보원 블랙리스트에 오른 문화·예술인 82명을 대표해 민·형사 소송을 준비하고 있다. 지난겨울 한국 사회를 수놓은 촛불집회를 통해 “내가 움직여야 세상이 바뀐다”는 진리를 깨닫고 “피해자들이 고소를 하면 사건의 전모를 밝히는 데 도움이 되겠다는 판단”에서 고심 끝에 내린 결정이다. 그는 문화·예술인 82명의 전화번호를 일일이 수소문해 함께하자는 문자를 보냈다. 박찬욱, 김미화, 이외수, 김여진, 문소리, 김규리, 명계남 등 스무 명 넘는 사람들이 참여하기로 했다. 검찰 조사를 받은 다음날인 9월19일 오후 경기도 고양시 일산에서 문성근을 만났다.

“문성근 규탄 시위 20번 지시”7시간 진행된 조사에서 쟁점이 무엇이었나.

조사는 주로 국정원 개혁위원회가 검찰에 전달한 자료(‘MB 정부 시기의 문화·연예계 정부 비판 세력 퇴출 건’)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내 경우, 조사 범위가 2011년으로 한정돼 있었다. 국정원이 블랙리스트를 작성해 그것을 문화체육관광부, 방송사, CJ 같은 대기업 투자배급사들에 ‘누구누구를 빼라’고 실행 지시를 내린 것이 이번 사태의 핵심이다. 블랙리스트는 바닥(문화·예술인)에 있는 이들에게 피해를 일으켰다. 그런데 이 전체 과정에 대한 조사가 전혀 이뤄지지 않고 있다. 조사하는 대상 시기와 폭이 좁다는 생각이 든다.

이명박 정부 시기에 정부를 비판했다고 퇴출 리스트에 오른 이들만 조사하고 있다는 뜻인가.

그렇다. ‘이 문건에 나온 내용은 극히 일부분이니 전모를 밝히기 위해서는 수사를 확대해야 한다’고 말했다. 검찰은 ‘지금 당장 조사할 인력이 부족하다. 전모를 밝혀야 한다는 데 동의한다. 추가 조사가 필요할 수 있다’고 답했다. 그래서 ‘언제든 조사받으러 가겠다. 전모를 밝히는 게 목적이다. 원세훈 전 국정원장이 혼자 했을 리는 없으니 이명박 전 대통령을 소환해 법적 책임을 꼭 물어야 한다’고 주문했다.

조사 과정에서 언론이 다루지 않은 내용도 있었나.

김여진씨와 내가 나체로 침대에 누워 있는 합성사진이 국정원 문건에 인쇄돼 있더라. 그 사진의 유포 방법도 나와 있었다. 국정원이 추선희 대한민국어버이연합 사무총장에게 나를 규탄하고 음해하는 큰 규모의 시위 2번, 1인시위 20번을 지시했다. 그 옆에 각각 800만원이라는 금액도 적혀 있었다. 또 “SNS를 통해 나를 종북 DNA를 가진 자라고 공격하라” “찌라시에도 넣고, 인쇄물을 만들어 뿌려라” “백만송이 국민의명령(이하 국민의명령) 회원들의 탈퇴 운동을 해라” 같은 지시사항도 포함돼 있었다.

과거 악성 유언비어를 유포한 사람들을 몇 차례 고발한 적 있지 않나.

그때 공격을 어마어마하게 당했다. 2012년 19대 총선에 출마할 예정이었는데 심한 공격이 들어와 고발하려 했다. 그럼 경찰이 ‘IP를 못 찾는다. 트위터는 본사가 미국에 있어서 고소 접수가 안 된다’고 얘기했다. 그래서 2013년에는 극우집회에 나와 발언한 알려진 사람들, 예를 들어 탈북자 출신 영화감독 정성산씨를 포함해 예닐곱 명을 고소했다. 1심이 끝난 뒤 2심이 잘 진행되지 않더라. 어쨌거나 나에 대한 공격은 2011년부터 심해졌다. 당시 내가 만든 국민의명령 활동이 활발했고 정치권에서 그걸 유의미한 운동이라고 보았다. 국민의명령을 와해하고, 내 이미지를 추락시켜 운동의 동력을 꺾는 게 그들의 목적이 아니었을까 싶다.

“홍창욱 PD 같은 이름 기억해줘야”블랙리스트로 어떤 피해를 입었나. 구체적으로 말해달라.

2008년 초 SBS 드라마 에서 정의로운 검사 역할을 맡았다. 이후 10월께 출연 금지 조치가 내려졌다. 5월 미국산 광우병 쇠고기 수입반대 촛불집회가 어느 정도 사그라진 뒤부터 블랙리스트가 실질적으로 작동한 것 같다. 2008년 9월인가 10월쯤이었다. SBS, MBC, KBS, CJ에서 모두 한 번씩 출연 거부당했다. “저 사람(문성근) 안 돼요”라는 지시가 하달되면 이후 안 되는 거니까.

방송사들로부터 어떻게 출연을 거부당했나.

조직 윗선에 있는 사장 또는 본부장급에 압력이 갔겠지. 그때 관련된 사람들이 먼저 얘기를 해줬으면 좋겠다. SBS 노조에 “일선 PD는 본부장 또는 CP한테서 ‘걘 안 돼’라는 말 한마디밖에 들은 게 없으니, 그런 말을 들은 PD가 자신이 겪은 ‘조각 정보’를 얘기해줘야 그걸로 본부장한테 물을 수 있다”고 얘기했다. 그다음에 본부장이 얘기해줘야 그게 어떤 방식으로 하달됐는지 전체 그림을 그릴 수 있다. SBS 드라마 에서 배우 김규리가 출연 배제됐다는 사실이 밝혀졌고 권해효를 “자르라”는 얘기가 공개된 것은 연출 PD가 버텨냈다는 거 아니냐? 이 사실을 공개한 홍창욱 PD 같은 사람의 이름을 기억해줘야 한다. SBS 노조가 최근 중간발표를 했는데 또 다른 사안도 밝혀주기를 기다리고 있다.

방송 출연을 못한다는 사실을 직감했을 때 어땠나.

배우 데뷔가 1985년 5공화국 때였다. 그때부터 출연하기로 한 프로그램이 취소된 일이 수차례 있었던 까닭에 이번 사건이 큰 충격은 아니었다. ‘명단이 있겠지’ 생각했는데 이렇게 많은 사람이 포함됐는지 몰랐다. 이명박 정부의 블랙리스트 82명이 박근혜 정부 때는 8천여 명까지 늘어난 거니까. 이번 사건이 가슴 아픈 건, 민주정부 10년 동안 사라졌던 리스트가 부활해 광범위하게 작동됐다는 사실이다.

박원순 서울시장이 이명박 전 대통령을 고소한 것을 두고 이명박 쪽에선 “정치 보복”이라고 반응하던데.

참 뻔뻔하고 비겁하다. ‘박원순 제압 문건’과 ‘블랙리스트’ 자체가 정치 보복이다. 없는 혐의를 덮어씌우며 언론에 거짓 정보를 흘려 괴롭힌 게 정치 보복이다. 적법한 절차에 따라 조사해 불법행위가 드러나면 처벌하자는 것은 이명박 전 대통령이 좋아하는 법치를 세우는 일이다. 한때 국가 지도자였으면 대통령 직속 국정원 수장과 직원들의 불법행위가 드러났으니 ‘내 책임’이라며 직원들을 감싸야 한다. 그들 뒤에 숨어버리는 게 얼마나 비겁한가. 국격을 있는 대로 추락시켰는데 이제라도 자백해 대한민국 지도자의 격을 지켜달라 말하고 싶다.

“민주진보 정부 상당 기간 연장돼야” 이명박 정부 국정원 블랙리스트에 포함된 사람 중 20여 명의 문화·예술인이 민·형사 소송에 참여하기로 했는데.

감독들의 연락이 적은 편인데 충분히 이해한다. ‘예술가는 작품으로 말하는 거다’라는 생각 말이다. 변호사 의견은 “직접적 피해를 입증하기 쉽지 않은 사람이 많다”는 것인데, 명단에 올랐다는 사실만으로도 배상받아야 한다. 그러려면 이름을 많이 걸어줘야 한다. 특히 유명한 감독들이 말이다. 전모를 파악하기 위해 수사를 촉진하고, 그래야 이명박을 구속할 거 아니냐. 지금까지 개인적으로 명단에 있는 분들께 전화를 드리진 않았다. 문자만 보냈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지만, 많은 참여를 부탁드린다. 이 기사 제목을 ‘영화인, 블랙리스트 고발에 참여해달라’고 해달라.

동료 감독들에게 직접 전화해 설득할 생각은 없나.

2001~2002년 ‘노무현을 사랑하는 문화예술인들의 모임’을 만들 때는 함께하자고 일일이 연락했다. 근데 함께한 사람들이 나중에 불이익을 받는 걸 보면서 ‘피해는 나만 받으면 되지, 뭐하러 다른 사람까지 끌어들여서…’라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인들이 입을 열기 꺼리는 이유 중 하나가 “정권이 바뀌면 보복당할지 모른다”는 건가.

에이, 설마. (웃음) 정권이 안 넘어가게 노력해야지, 걱정만 하면 어떻게 하나. 나라가 정상화하려면 민주진보 정부가 상당 기간 연장되는 수밖에 없다고 본다. ‘지배세력연구소’라는 재단법인을 만들겠다는 신학림 전 대표가 해준 얘기 중 너무 충격적이어서 잊히지 않는 게 있다. 2007년 말 미국 투자회사 리먼브러더스의 파산으로 시작된 월스트리트 사태가 터졌을 때 국가경제비상대책회의가 열렸다. 대통령, 경제 부처 장관들, 경제수석, 전국경제인연합 의장단이 모여 대책회의를 하고 단체사진을 찍은 게 신문에 실렸다. 신학림씨가 사진을 분석해보니 사진 찍은 25여 명이 모두 친·인척 관계라는 거다. 그 인맥을 동원하면 검찰이고 사법부고 뭐 제대로 작동되겠나.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이제야 구속될 수 있었던 건 촛불의 힘으로밖에 설명되지 않는다. 그런데 이재용 쪽이 ‘강요에 의한 뇌물’이라고 주장한 걸 보면 쟤네(기득권)들은 박근혜를 버리고 이재용을 살리려는 거다. 재판부가 이재용 같은 범죄자에게 법이 정한 만큼 형량을 선고하게 하려면, 민주정부가 상당히 갈 것 같다는 예상이 가능해야 한다. 판사는 명예직인데 재판을 제대로 못하면 진급이 안 된다는 걸 알아야 제대로 된 재판이 이뤄지지 않겠나.

이명박·박근혜 정부의 국정원 화이트리스트에 대한 진상 조사도 필요하다고 했는데.

국정원 처지에서 보면 블랙리스트를 실행하는 데 별로 돈이 안 든다. 전화 몇 통이면 되니까. 반면 화이트리스트를 집행하려면, 극우단체에 상당히 큰 지원을 해야 한다. 국정원에는 영수증이 필요 없는 예산이 많다. 이 부분까지 진상 조사를 하려면, 서훈 국정원장이 상당한 저항을 감수해야 한다. 돈을 만진 사람들이 아직 현직에 있으니 드러내기 쉽지 않을 거다. 하지만 국정원이 그런 식으로 버티면 제대로 적폐 청산이 안 된다.

“조악한 짓 효과 있으니까 하는 것” 고 김영한 전 대통령비서실 민정수석의 업무수첩을 보면 당시 김기춘 대통령비서실장이 ‘좌파는 부유하고 우파는 가난하니, 좌파에 대한 투자를 배제하고 우파에 대한 지원을 아끼지 않아야 한다’고 말했다.

우파 영화 만들어봐야 흥행도 안 되는데, 영화를 돈으로 주무를 수 있다고 본 게 저들의 수준이다. 뭐 영화뿐이겠나. 2년 전 군대에 간 친구 아들이 휴가를 나왔는데 절망에 빠져 있더라고 했다. 정훈 교육 시간에 문성근이 종북이라는 내용의 강의를 하더래. 2010년 충남 공주 우금치(전봉준이 이끄는 동학군이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참패한 곳)에서 백만민란 집회를 열었는데 거기서 횃불행진을 한 적이 있었다. 그때 찍은 사진과 문익환 목사가 김일성 만난 사진, 내가 김정일 만난 사진을 띄워놓고 강연했다고 한다. 아이가 집에 와서 하는 얘기가 ‘군에서 장병들에게 그렇게 세뇌 교육을 하는데 민주정부를 만들 수 있겠냐’는 거였다. 그들이 합성사진 같은 조악한 짓을 왜 했겠나, 효과가 있으니까 하는 거다.


김성훈 기자 pepsi@cine21.com
사진 최성열 기자 youl@cine21.com



독자  퍼스트  언론,    정기구독으로  응원하기!


전화신청▶ 02-2013-1300 (월납 가능)
인터넷신청▶ http://bit.ly/1HZ0DmD
카톡 선물하기▶ http://bit.ly/1UELpok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맨위로